여기저기 널부러진 신문이 보인다. 거기 찍힌 여자는 자신이 실린 사진을 오려 붙이고, 또 오려 붙인다. 광적으로.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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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오피니언에는
연극 ‘그의 어머니’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SYNOPSIS
불현듯 낯설어진 아들, 뒤엉킨 일상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그의 어머니.
그녀는 가족을 지킬 수 있을까?
두 아들을 위해 아침식사를 요리하는 브렌다의 평범한 아침.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미 모든 신문의 표지를 뒤덮었다.
둘째 아들 제이슨은 학교에 가기를 거부하고,
10대 소년인 첫째 아들 매튜는 2층에서 가택연금 중인 상황.
브렌다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자신의 아들이 미성년자(청소년범죄)로 처벌받을 수 있도록 싸우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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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 플레이시의 연극 〈그의 어머니〉는 하룻밤 사이 세 명의 여학생을 성폭행한 미성년자 아들을 둔 어머니 브렌다의 이야기다.
범죄 피해자도, 수사관도, 가해자도 아닌, 가해자의 어머니. 우리가 기사 댓글창에서 가장 먼저 욕하고 가장 빨리 잊어버리는 그 사람을 무대 위에 세운다.
극은 150분 내내 해소되지 않는 갈등이 쌓이고, 등장인물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무너져 간다. 공연장을 나와서도 맴도는 불편함에 머릿속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연극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인 듯하다.
무대는 깔끔하다. 1층 거실과 주방, 2층 매튜의 방, 그리고 집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정 장면에서 암전이 될 때 측면에서 쏘아지는 조명은 이 공간들을 감옥의 독방처럼 보이게 만든다. 덕분에 가택연금 중인 매튜의 방과 그를 지키는 브렌다의 거실은 대사 한 마디 없이도 이미 '갇힌 자들의 공간'으로 읽힌다.
연출가는 이 단일한 공간에서 영상과 조명으로 극의 호흡을 조절하며, 관객이 긴장을 놓지 못하게 붙잡아 둔다.

이 연극은 관객이 "대체 매튜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를 파고들지 못하게 막는다. 그 역할은 변호사가 맡는다. 변호사는 등장할 때마다 브렌다가 겪는 곁가지 갈등들을 차단하고, 극의 시선을 오롯이 브렌다에게 돌려놓는다. 매튜에 대한 정보는 의도적으로 적다. 극은 여자친구 제시카에게는 단 한 번도 폭력적이지 않았던 매튜가 왜 그랬는지를 끝내 설명하지 않는다. 그 빈자리를 관객 각자의 상상으로 채우게 하면서 브렌다가 매일 밤 겪었을 그 혼란 속에 관객도 함께 남겨진다.
브렌다의 딜레마는 단순하지 않다. 그녀는 아들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싸우면서도 동시에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네 인생도, 내 인생도, 네 동생의 인생도 망쳤다." 버릴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다고 하면서 증오를 고백하는 이 모순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그녀의 모성은 아름답지 않다. 첫째처럼 되지 않길 바라며 둘째 제이슨을 폭력적으로 통제하고, 매튜의 잘못을 대신 짊어지려 하고, 결국 무너지면서도 끝까지 자식의 곁에 있기를 선택한다.
이 연극은 모성을 숭고하게 포장하는 대신 모성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때로는 파괴적인 형태로 발현되는지를 직시하게 만든다.
1막의 절정이 그것을 압축해 보여준다. 가운만 걸친 브렌다가 현관문을 열고 쏟아지는 플래시 앞에 서서 외친다. "너희들이 원하는 '그의 어머니'!" 그리고 가운을 벗어던진다. 언론이 소비하는 '범죄자의 어머니'라는 역할을 스스로 극단적으로 수행해버리자 미디어와 사회적 시선이 한 인간을 어떻게 대상화하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신이 실린 기사 사진을 병적으로 스크랩하며 서서히 무너져 가던 브렌다가 결국 대중이 원하는 이미지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이 장면은, 이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남았다.
극의 마지막, 브렌다는 마켓에서 피해자의 어머니와 우연히 마주쳤다고 전한다. 피해자의 어머니는 브렌다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브렌다는 피해자의 어머니 가방에 붙어 있던 공정무역 스티커를 기억한다. 그리고는 “매튜가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우리는 친구가 될 수도 있었겠다고” 말한다. 공정무역은 중간자로 인해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고통받는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다. 두 어머니 사이에도 언론이라는 중간자가 있었다. 기사는 브렌다를 공격했고, 피해자의 어머니도 처음엔 가해자의 어머니를 공격하는 사회의 기조 안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피해자의 어머니는 저쪽도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바로 1막의 마지막, 가운을 벗은 브렌다의 사진이 인터넷에 떠도는 것을 보고 말이다. ‘미안하다'는 한 마디는 그 인식의 결과다. 두 사람은 직접적으로 용서를 하지도, 화해를 하지도 않는다. 다만 서로의 고통을 알아본다.

©장수정
‘그의 어머니’는 가해자를 옹호하지 않는다. 가해자 가족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손쉽게 단죄하고 돌아서는 그 자리에 남겨진 사람을 끝까지 바라보게 만든다. 불편하다. 불편한 채로 극장을 나온다. 그리고 그것이 이 연극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