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남다른 객석에서 엿본 일상적 삶의 모습 - 연극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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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에는 연극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장에는 누구나 흔히 보던 무대와 객석이 있다. 하지만 고정된 의자들이 열맞춰 놓인 그 통상적인 객석 공간은 객석으로 쓰이지 않는다. 대신 배우들이 무대 공간을 넘어 그 객석 공간까지 넘나들며 연기를 펼친다. 관객이 앉을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마련된 의자들은 무대 공간 위 곳곳에 퍼져 있고, 360도 회전하는 의자들은 방향이 고정된 객석에서 무대라는 한 곳만을 바라봐야 했던 전통적인 연극 관람 방식을 허물어버린다. 이처럼 ‘극장’과 ‘연극 관람’의 보편적 특성은 무너지고, 새로운 관람 방식과 의미가 세워진다. 그리고 이 곳에서 선입견 어린 퀴어 영화의 스테레오타입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방식의 영화를 제작하고자 했던 ‘나’의 영화감독으로서의 이야기와, 전쟁으로 무너진 이라크를 재건하기 위한 자이툰 부대 안 ‘나’의 파병군으로서의 과거가 교차되며 펼쳐진다.
2018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작가 박상영의 소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2021년 각색작가 김연재, 연출 임지민을 거쳐 국립극단 무대에 올랐다. 공연 기간이 한달도 채 되지 않는 데다가 한정된 객석 수로 인해 관람을 아쉽게 놓친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현장성의 측면에서 아쉬움이 다소 남는 건 사실이지만, 작품은 2024년 지금까지도 국립극단 온라인 극장 홈페이지에서 영상으로 관람할 수 있다.
무너진 나라를 재건하기, 무너진 나 자신을 재건하기
자이툰 부대 대원들이 이라크에 파견된 것은, 이라크를 재건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재건은 무엇인가가 무너졌다고 진단을 내린 후에 가능한 일이다. 이라크는 전쟁으로 무너졌고, 그곳에 파병비를 벌기 위해 간 청년들은 각자 경제적인 사정이 무너졌다. 파병비로 졸업영화를 찍고자 하는 ‘나’는, 성 소수자를 대상화하고 신파적으로 소모하는 통상적인 퀴어 영화계가 무너졌다고 진단했다. 그렇기에 성 소수자들의 대상화되지 않은 일상적인 모습을 담은 ‘태초의 어떤 작품’을 통해 퀴어 영화계를 재건하려 한다. 그리고 그 경제적 기반을 위해 이라크에 왔다. 무용 콩쿨 입상에 무수히 실패하고, 아버지가 실종되고,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왕샤도 자기 자신의 무너짐으로 인해 ‘새로운 경험을 하고자’ 자이툰 부대에 합류했다. 이들 각각의 재건은 이라크의 학교들에 벽화를 그리는 모습과 함께 제시된다.
벽화를 그리는 그들의 모습은 위태롭고 열악하다. 모래 바람이 불고 언제 폭격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고작 다섯 가지 색깔 페인트로는 무지개 하나 그릴 수 없다. 그 어려움 많은 상황 속에서 인물들은 페인트를 섞으며 최선의 벽화를 그릴 방법을 골몰하고, 무심코 내뱉은 말이 상처가 되어 사로 싸우고 화해하기도 한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재건을 위한 나름대로의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폭격 한 번에 벽화는 무너진다. 아무리 온갖 일을 감내하며 힘들게 그렸다 한들 그 작은 벽화 하나가 폭격 앞에 무슨 힘이 있으랴. 그들이 펼친 하나의 재건 시도는 그렇게 미완성인 채로 허무하게 버려지고 방치되고 만다.
자이툰 부대에서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사회에 나가서도 인물들의 생활은 무너짐과 재건 시도의 연속이다. ‘나’는 그 부족한 금액으로 졸업영화를 촬영하다 무너지고, 인권 영화제에서 ‘슬픔이 없는 일상을 담아 퀴어 영화다운 특별함이 없다’는 대상화와 선입견 속의 평을 받으며 무너진다. 왕샤 역시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할 정도의 무너짐을 겪는다. 그 시간 동안 전쟁이라는 커다란 상황 속 한 나라를 재건한다는 거창한 목적을 가졌던 그들의 소속, ‘자이툰 부대’는 어느새 부대에 속했던 미대생이 세운 다 망해가는 식당 ‘자이툰 파스타’로 변용되어 있다. 미대생의 진로 재건이 낳은 이 다소 우스꽝스럽고 별 볼일 없는 식당은 인물들의 재건 시도가 점점 더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간다는 것을 '웃프게' 드러낸다. 퀴어 영화를 만들어 칸으로 진출하려던 ‘나’는 어느새 수위가 높기만 한 영화를 만드는 퀴어 영화 감독이 되어 있다. 무용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자 한 ‘왕샤’ 역시 취업 실패를 포함해 이렇다 할 재건을 이뤄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원대한 꿈에서 시작된 그들의 반란은, 자신에게 모욕을 준 영화 감독을 그가 취한틈을 타 택시에 태워 화천까지 보내버리고,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훔쳐 달아나는 등 '찌질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마저도 실패하고 마는 두 사람의 일련의 재건 시도들은, 항상 무대 위에 공존하는 ‘미완의 벽화’와 닮아 있다.
끝내 미완성으로 완성되는 삶
작품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의 태도는 사뭇 모순적이다. ‘나’는 보통의 사람들이 말하는 ‘퀴어 영화다운’ 특별한 지점이 없는, 소수자들의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을 담은 영화를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그 평범함을 담은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영화를 '특별하게' 봐 주고, 그래서 자신과 영화가 중요한 위치에 오르기를 바란다. 왕샤 역시, ‘나는 이 세상의 작은 점’이라는 주제를 가진 무용 작품으로, 작은 점과는 반대되는 특성을 가진 ‘콩쿨 우승자’가 되려고 한다. 또한 벽화를 그리면서 예술의 오리지널리티를 강조하던 왕샤는 재능이 없는 자신의 모습, 소수자로서의 자신의 고유성을 감추려고 한다. 이는 샤넬 향수를 통해 체취를 감추려는 그의 모습을 통해 표현된다.
왕샤는 생텍쥐베리가 우주에서 혼자 떠돌다가 죽었기에 그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왕샤가 그를 알 수 있는 이유는, 결국엔 생텍쥐베리가 정말로 혼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를 기념하는 모형까지 세워질 정도로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 유명했고,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그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나’는 ‘정체성의 혼란과 공허함, 마음속의 우물’을 담아야 한다는 영화계 유명 인사들의 공식과 같은 퀴어 영화에 전적으로 반발하지만, 왕샤와의 관계에서 그 공식들을 어느정도 차례차례 마주하곤 한다.
어쩌면 모순이 있는 것은 이들 개인뿐만이 아니라, 이들이 처한 세상 전체일수도 있다. 인물들이 속했던 사회, 자이툰 부대가 평화 재건을 위한 집단인데, 평화 단체의 시위로 인해 출국에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그러한 모순 속에서 왕샤는 결국 그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받아들였으나 사회에서 인정받아 직장을 가지지도, 뭔가가 되지 못했다. 또, ‘나’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퀴어 영화를 상영했으나, 그렇기에 특별하게 여겨지지는 못했다. 결국 커다란 모순들 속에서 그들이 원하는 재건의 어떤 부분은 항상 미완일 것이다, 인물들은 자신이 무얼 이루어냈고 그래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하나로 정의해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를 ‘실패’라 말하는 왕샤에게 ‘나’는 이것을 실패가 아닌 ‘완성’이라 말한다. 관객으로서 그 대사가, 하나로 규정되고, 인정받고, 명확한 한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정의 가능한 명확한 존재로 완성되지 않아 함부로 정의되지 않는 어떤 것, 그 자체가 완성이라는 의미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왕샤의 무용 작품 속 그는 '이 세상의 작은 점'이다. ‘점’은 하나의 중심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시킨다. 하지만 ‘점 조자 되지 못한’ 존재는, 명백하게 범주화되고 의미화되지 못해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인위적으로 유도된 한 방향의 주의집중’을 넘어서서 도처에 떠돌며 다양한 각도의 시선 속에 다양하게 머무르는 가장 일상의 것이 된다. 그들과 공존하던 무대 위의 미완의 벽화는, 하나의 주제나 형식을 가진 예술작품으로 정의되지 못하고, 그래서 극중 특정 소품이나 무대장치로 크게 주목받지도 못한다. 하지만 인물들의 사고방식이 변화한 것처럼, 어느 시간 속 누구의 풍경에나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일상적인 것의 이미지로 변모한다.
극장의 재건과 온라인 스트리밍
연극이 이루어지는 극장에서는 앞서 설명했듯 관습적으로 무대와 객석, 그리고 관극의 방식이 허물어진다. 관객은 한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360도 회전하는 의자를 통해 자신이 주체적으로 보고 싶은 방향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사람들의 가장 일상적인 시선을 닮았다. 동시에 인물들의 이야기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일상과는 다른 층위의 작품이 아닌 일상 속의 어떤 한 풍경으로 느껴지게 한다. 연출이나 극장이 지정한 한 방향을 바라보아야 하는 시선은 극장 안에서의 인위적인 규범이다. 극 중 이 규범을 지키는 경우는 외부자의 시선으로 ‘성 소수자를 성 소수자 답게’ 한 방향으로 대상화 한 예술로 상징되는 ‘영화’가 상영되는 장면과, 그러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GV 장면에서이다.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가진, 클로즈업과 같은 기법으로 ‘감독이 보여주고자하는 하나의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 강한 특성이 사회적 시선의 선입견과 연관된다. 이를 관객의 시선의 자유가 비교적 보장된 ‘연극’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요소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프로시니엄 액자 틀 안에서 공연이 진행된다면 관객은 무대 위 펼쳐지는 인물들의 일상을 한 눈에 모두 볼 수 있고, 그렇기에 그들의 삶과 정체성을 함부로 정의내릴 수 있다. 하지만 360도 회전하는 객석에서는 자신의 한 가지 시선을 선택할 수 밖에 없고, 그렇기에 시야각에서 밀려나 필연적으로 놓칠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생긴다. 이는 관객들에게 자신의 자의적인 시선으로 인해 인물들의 삶을 다 보거나 알지 못했다는 감각을 주며, 인물들의 삶에 대한 임의적이고 확고한 정의가 불가능함을 일깨운다. 프로시니엄 무대에서는 영화와 같이 하나의 제한된 프레임 안에 창작자가 보여주고 싶은 방식대로 정제된 세상을 재현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기존 프로시니엄 무대의 고정된 시선을 무너뜨리고 거기에서 나아간 새로운 관람 방식을 재건함으로써 대상화를 벗어난 일상성에 대해 체험하게 한 것은, 소수자를 향한 기존의 선입견에 대한 작품의 적극처럼 대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온라인 공연으로 관람하게 되면서 관객의 시선은 영화만큼이나 제한된다. 따라서 영화와 연극이라는 매체의 대비를 통한 상징은 관람객에게 제대로 닿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앞으로의 온라인 공연 운영에 대한 하나의 고려할 지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박보경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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