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여행에서 결국 만나게 되는 것

글 입력 2024.04.04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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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혼자 여행을 떠났다. 수요일 정오에 한 주의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서, 미련 없이 최소한의 옷가지만 챙겨 떠났다. 여행이라고 거창하게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지하철, 여기서는 트레인이라 불리는 그 교통수단을 타고 30분 정도만 가면 바다가 보인다.

 

구글 맵으로 혼자 어디를 갈까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시크릿 가든’이라는 이름에 발걸음이 이끌렸다. 기숙사 방문을 박차고, 선글라스를 끼고, 난생처음 ‘밀슨스 포인트’라는 역까지 가서 10분 정도 걸으니 웬디 와이틀리스 시크릿 가든에 도착. 시크릿 가든을 아우르는 그날의 날씨는 식상한 형용사를 붙이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새파랗고 맑은, 황홀한, 화창한 거대한 돔 같달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펼쳐진 녹색 길을 따라 걸었다. 목적은 원래 이 작은 가든에서만 머무는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바로 앞에 항구를 따라 펼쳐지는 산책로가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황홀한 광경에 이끌려 사진을 찍는 중에 한 중년의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배를 타고 낚시를 하는 중이었는데, 내가 그를 보자마자 꽤 통통한 물고기를 잡아올리는 것이었다.

 

오후 2시에 홀로 낚시를 하는 게 신기해 불쑥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와우”라고 소리쳤다. 해외에 와서 더 강력해진 내 특성은 아마 외향성일 텐데, 이때도 역시 예외는 없었다. 선착장에 서 있는 내가 리액션을 하자 그는 꽤 반가운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그는 2003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단돈 200달러만 손에 쥔 채 자그마치 10년간 세계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그중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남은 나라는 스페인이었다고. 언제 어디서나 정열적으로 외부 활동을 즐기는 아이들과 어른들을 보며 그 문화에 흠뻑 빠졌던 시간이었다고 했다. 2008년 금융 위기 때 그는 스페인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에게 영어 회화까지 가르쳤다고 했다. 도무지 일자리를 못 구해서 영어라도 배워야 했던 시절이었다고. 영어를 가르칠 능력이 있던 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신만의 특별함으로 탐험을 지속했다. 당시 나는 9살이었어서 세상 물정을 잘 몰랐다고 이야기하니, 그는 시간이 그렇게 빨리 흘렀냐며 놀라워했다.

 

그는 나보고 대학을 졸업하면 세계 어디든 바로 떠나라고 추천했다. 세상은 너무 넓다고. 우물을 벗어나라고. 그는 10년의 추억을 회상하는 눈빛으로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이곳에 온 것도 인생 최대의 용기를 낸 건데, 전 세계를 돌아다니라고?’와 같은 의문문부터 떠올렸다. 어쩔 수 없는 방어기제인가. 그럼에도 내게 해방감을 안겨주는 그 제안을 해줘서 고마웠다.

 

그에게 낚시는 본업이다. 취미냐고 물어봤던 나의 질문이 머쓱하게도. 그는 오전 4시에 일어나 6시에 첫 낚시를 나가고, 오후 2시였던 그 시간대에는 벌써 두 번째 낚시라고 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틀에 갇힌 8시간 노동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일 텐데 해외에서 그 틀에 벗어난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역시나 최초였다.

 

세상의 기준에서 빠져나와 자신만의 루틴으로 삶을 사는 그를 보면서, 오히려 그가 훨씬 더 탄력적으로 하루를 견인한다는 걸 철저히 깨달았다. 물론 그렇게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 하루하루 생존할 수가 없으니까, 성실함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나 당연하게 주도적인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더 굳건히 살아낼 것이라는 확신에 차있었고, 나 또한 그 깊은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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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뜻밖의 우연으로 만난 누군가와 대화의 매력에 빠질 확률을 생각해 본다. 새삼 겉치레의 ‘How are you’가 아닌 진정한 소통을 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다른 언어 체계를 가진 초면의 타인과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니. 단순히 ChatGPT를 통해 한 문장 읊는 수준과는 차원이 다른 소통의 영역이었다.

 

그 순간 그 대화에 나는 어떤 연속적인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가보지 않은 길, 경험하지 않은 세상,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던 삶을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이야기를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이해할 수 있어 더 짜릿했다. 만나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을 넓혀주고, 보고 듣는 세계가 확장되도록 돕는 외국어가 이토록 사랑스러울 줄이야.

 

혼자 시작했던 여행에서 시간의 구애 없이 그저 소통의 희열에 머물렀다. 무언가에 쫓기지 않고 대화 그 자체에만 집중한 건 오랜만이었다. 그가 풍기는 생기 넘치는 에너지가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그저 홀로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하러 간 것이었지만, 덤으로 한 사람의 인생까지 넝쿨째 감각했다.

 

그날 이후 혼자 보내는 시간을 더욱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드넓은 바다 위에 혼자 낚시를 했던 그 사나이를 보고 말이다. 다른 누구와의 관계보다 가장 우선시하고 싶은 것은 바로 나와의 관계라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내가 먹는 것, 입는 것, 생각하는 것, 정돈하는 것, 손길이 닿는 것. 그 모든 것에 신중함과 정성을 버무리고 싶었다.

 

그날의 대화는 다시금 삶의 관성과 방향성을 돌아보게 했다. 단 5분의 대화로도 그가 얼마나 자신의 삶을 아끼고 사랑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보통의 선택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대담함과 자기 확신. 오로지 자신의 손과 발로 거쳐왔던 세상의 크나큰 기운이 그 사나이에서 느껴졌다. 그 담대한 모습을 닮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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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혼자 지내는 방에서도, 나는 나를 신경 쓴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내가 보고 있다. 

 

가지런히 정돈된 내 방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돈하는 루틴을 즐기기 시작했다. 가족들과 평생 살 때는 몰랐는데, 이제 교환학생이라는 신분으로 한 학기 동안 나만의 집이 생기니 알게 되었다. 나는 꽤 독립적으로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걸. 어머니의 잔소리 없이도 알아서 빨래를 제때 할 수 있고, 먹은 것은 곧바로 설거지를 할 수 있고, 물건은 제자리에 둘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 가족의 그림자에서 멀어지니 이제서야 혼자 서 있는 내 그림자의 크기가 선명히 보인다.

 

귀찮음이라는 오래된 악을 벗어던지고 경험의 축적이라는 새 옷을 입게 됐다. 기꺼이 내가 혼자 먹을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하고, 플레이팅하고, 식사를 하고, 살림을 꾸린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새 집처럼 구석구석 모든 곳을 청소하고, 내일과 앞으로의 일주일, 한 달,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한다.

 

또 하나 새롭게 깨달은 사실은, 생각 그 이상으로 부지런한 생활을 사랑한다는 걸 확신한 것이다. 나에겐 시간과 체력, 젊음과 돈, 여유,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는 타이밍. 모든 게 있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아주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내가 되길 간절히 원하고 또 바라왔던 것만 같다. 새로운 땅, 환경, 언어, 사람들을 마주해도 온전히 나로서 두 발을 지탱하는 이 삶. 그 자체로 불완전한 인간임에도 매일 한 발자국 나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이 생활을 사랑하게 되었다. 

 

여행에서 진정 깨닫고 이해하게 될 그 무엇은 유명 관광지도, 맛집도, 문화도, 사람도, 언어도 아니다. 결국 자기 자신이다. 물론 그 여정은 생의 끝까지 완성될 리는 없겠지만 다른 무엇보다 더 명확한 그림을 그리게 되는 대상은 바로 나라는 확신이 든다. 나만의 그 무엇들을 쌓아가는 여정만 있을 뿐이겠지.

 

내일의 나는 또 어떤 색깔을 발견하게 될까.

 

 

[신지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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