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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케이크 악보집 - 2026 서울시향 김선욱과 알리스 사라 오트 [공연]

밤과 안개와 햇살 앞에서

by 장유진 에디터
2026.05.02 17:57



생각해 보면 대단한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 문장을 놓자마자 라벨 피아노 협주곡 2악장을 재생했다. 이제 보니 벌써 5월 2일이었다. 마지막으로 글을 쓴 날이 4월 18일이었고, 다시 문장을 나열하기 시작한 날이 30일이었으니, 4월을 거의 다 보내고 나서야 이 자리로 돌아온 셈이었다.

 

그 공백 동안 무엇을 했나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없던 때의 나로 돌아가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벚꽃도 많이 봤다. 예전에 즐겨 보던 드라마도 보고, 친구가 좋아하는 핸드볼 경기도 직관했으며, 오랫동안 가지 못했던 노래방도 갔다. 나를 소개하는 글도 부지런히 썼다.


나는 이런 걸 했었어요. 저런 것도 했어요. 무언가를 많이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돌아보니 별게 아니었다는 것도 알았다. 물론 이 생각도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어?”라고 스스로 반문하게 될 것을 안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좋아하는 것이 많으면 행복한 일만큼이나 눈꺼풀이 무거운 때도 많다는 것을 온몸으로 겪어볼 수 있었다. 기쁜 일이다.


이제는 조금 차분해졌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언제든 불같이 타오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글을 쓰면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여전히 한밤을 꼬박 샐 수 있고, 그 일에 기꺼이 며칠을 내놓을 수 있지만, 이제는 그렇게까지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얘기를 많이도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해요? 일이 아닌가요? 그렇게까지 피곤하게는 하지 마.


그 말들에 한들한들 흔들렸다. 아마 말한 이는 기억하지 못할,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겠지만, 말 하나를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내게는 제법 무거운 돌멩이들이었다. 활활 타오르지 않는 지금, 마냥 방방 뛰며 기뻐할 수는 없게 된 내게 그 말들은 걸음을 늦추게 하는 무게로 남았다.


보통 때라면 그래, 이쯤에서 그만하자, 하고 펜을 내려놓은 뒤 다른 재미난 것을 찾아 떠났겠지만, 이걸 진작에 눈치채고 있던 나는 일을 꽤 많이 벌여두었다. 여전히 내겐 써야 할 글이 있었고, 함께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카메라도 있다. 글자 안에만 사람을 녹여두려 했는데, 이제는 사진으로도 내 앞을 붙잡으려 애를 썼다. 찍어두면 보기 좋더라.


붙잡을 수 있는 풍경이 있고, 넓혀 볼 수 있는 세상이 내가 모르는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넋 놓고 있는 사이에 누군가는 무대 위에 오르고 있었고, 누군가는 까만 정적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는 상영되고, 장막은 올라가고 내려간다.


그러니 다시 음악 앞에 서보기로 했다. 2026년 5월 8일과 9일,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무대 위에는 김선욱의 지휘와 알리스 사라 오트의 피아노, 그리고 무소륵스키와 라벨, 브람스가 차례로 놓인다. 악령이 몰려오는 밤과 안개처럼 다정한 피아노, 그리고 그림자를 품은 브람스의 햇살 앞에서 우리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어제는 한국 무용 공연을 보러 갔다. 시민관객단 활동을 통해 매칭된 공연 중 하나였는데, 깜빡하고 있다가 공연 당일이 되어서야 사전 예매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은 공연 시간에 맞춰 들어가지만, 현장 발권을 위해 한 시간 일찍 도착했다.


티켓을 끊고 시간이 남아 근방에 있던 한옥 사이를 빙빙 맴돌았다. 창문 밖에서 눈으로 방과 방 사이를 거닐다 새파란 조명이 가득한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노란색 치맛자락이 보랏빛 아래에 저물어 들고, 하얀 천이 무용수의 오른손과 왼손을 타고 흘렀다. 발 두 개가 소리에 맞춰 오밀조밀 움직였다. 온 바탕이 파랗게 물들어 있을 때, 갓을 쓴 선비의 까만 옆모습이 보였다.


장구를 메고 나타난 두 명과, 무대 옆편에서 같이 호흡을 맞추는 또 하나의 장구 소리. 장단에 맞춰 나타난 얼굴, 무슨 일이 있든 웃고 있겠다고 약속한 것만 같은 그 얼굴이 폐부를 뚫었다.


미처 잡아내지 못한 먹먹함이 사라지고, 곧게 뻗은 손끝 안에서 몸체를 줄였다. 그때 생각했다. 아, 다시 글을 쓸 수 있겠다. 사라진 물음표와 느낌표가 나타났다.


그렇게 다시 나타난 물음표와 느낌표를 들고, 나는 서울시향의 세 곡 앞에 섰다.

 

 

 

무소륵스키, 민둥산에서의 하룻밤 


 

 

 

이곳을 단번에 휩쓸어버린다는 느낌보다도,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서 무슨 일이 이쪽으로 몸집을 키우며 다가오는 듯하다. 이 곡이 성 요한의 밤, 마녀들이 산에 모여 축제를 벌인다는 슬라브 설화에서 출발했다면, 온갖 악령들이 나타나 정신없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면, 눈앞에 드리워진 팔레트 위엔 어떤 색이 가장 전면에 놓여 있을까.


보라색일까, 초록색일까, 노란색일까. 오히려 쨍한 색감의 핫핑크가 전면에 놓일지도 모르겠다. 울렁거리는 소리는 언제든 전복될 것처럼 엎치락뒤치락하고, 이 밤은 어둡기만 한 밤이 아니라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해 웃고 떠드는 밤에 가깝다.


무섭지만 우스꽝스럽고, 우스꽝스럽지만 끝내 불길한 밤. 단순히 축제의 한 장면을 묘사하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끝이 정해진 밤일지라도, 이 어둠은 오로지 치닫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달려간다. 몇 개의 목소리가 자리하고 있는지, 이 서사에 주인공은 몇 명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비행하고 있다면 하늘로 향하는 길이라기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추락의 여정에 가까울 것이다.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이 곡을 들어봤다면 어땠을까. 곡 자체만 음미하면 마치 조금 더 다이내믹해진 신밧드의 모험 같기도 하다. 내가 이 곡을 관객석에서 목도한다면 어느 순간에 저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고 말까.


같이 재롱을 부리고 광대 짓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끝에는 멀미를 하게 될 수도 있겠다. 제동 장치가 고장 나버린 이 고속 기차는 쉽게 멈추지 않고, 김선욱의 손끝은 이 소동을 한꺼번에 누르기보다 끝까지 굴러가게 둘 것만 같다.


그날의 밤이 교회의 종소리와 함께 사라질 것이라면, 악령들은 왜 이곳까지 찾아왔을까.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몰려오는 것들. 끝을 알고도 끝까지 몸집을 키우는 것들. 그 밤의 결말이 지휘자의 손 안에서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궁금해진다.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 중 2악장


 

 

 

서울시향 SPO 매거진 인터뷰에서 알리스 사라 오트는 이렇게 말했다.

 

 

“라벨 피아노 협주곡의 세 악장 모두 아끼지만 2악장에 가장 마음이 갑니다. 음표와 음표 사이 여백 속에서 연주자들은 물론 청중과도 가장 깊이 연결되는 기분이 들거든요.”

 


당신이 이 2악장의 도입부를 듣게 된다면, 듣자마자 사랑에 빠지게 될 수도 있고, 피아노가 건네는 다정함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엄지손가락에서 세 번째 손가락까지 ‘하나, 둘, 셋’ 접어가는 속도로 피아니스트의 걸음을 따라가 보면 어떨까?


하나 다음에 둘이 나타나기까지의 시간 사이에 띄워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 악장은 빠르게 마음을 빼앗는 음악이라기보다, 천천히 곁에 앉아 나의 호흡을 자기 쪽으로 옮겨놓는 음악에 가깝다. 그러니 피아니스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이 발걸음에 이름을 붙여보자.

 

미처 열지 못한 문 위에 놓인 노크. 설레는 마음에, 혹은 두려운 마음에 내려놓는 발망치. 눈맞춤. 한밤중의 딱딱한 시계 초침 소리.


채워내지도 비워놓지도 못한 종이 위의 볼펜 자국. 한 번씩 꾹, 꾹 눌러보는 카메라 셔터. 숨이 찬 줄도 모르고 올라가는 계단.


다음 걸음이 놓이기 전, 조용한 틈 위에 떠오르는 것들을 하나씩 놓아보자. 그 여백은 비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들어올 수 있을 만큼 조용해서 아름답다. 라벨의 2악장은 그 조용함 위에 손을 올려두고, 듣는 이가 미처 말하지 못한 마음의 속도를 대신 걸어준다.


오케스트라는 멀리서 안개처럼 번지고, 피아노는 그 안개 사이로 길을 더듬는다. 어느 순간부터는 독주자가 혼자 걷는지, 우리가 함께 걷고 있는지 알 수 없어진다. 알리스 사라 오트가 말한 “음표와 음표 사이 여백”이 바로 그런 곳이라면, 그날의 객석에도 서둘러 말하지 않는 시간이 내려앉을 것이다.


무해해지는 것이다.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지 않아도, 아주 작은 손짓 하나가 오래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보자. 다정함은 늘 크고 밝은 얼굴로 오지 않는다. 때로는 셋을 세는 속도로, 아주 천천히, 그러나 틀림없이 도착한다.

 

 

 

브람스, 교향곡 제2번




 

 

파란 하늘 혹은 오렌지색 노을, 그 사이에 회색 그림자를 품은 하얀 구름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 풍경 안에 자리한 이는 오전의 사람일 수도, 오후의 사람일 수도, 한밤이나 새벽을 막 지나온 사람일 수도 있다.


애초부터 활기찬 상태라기보다, 기운이 없다가 이제야 고개를 조금 높이 들 수 있게 된 상태에 가깝다. 현악이 일렁일 때 가장 큰 감정선은 환희보다 회복 쪽으로 기운다. 완전히 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어둠 속에 머무르지도 않는 얼굴이다.


연두색 언덕 위에 기둥 두꺼운 나무 한 그루가 자라 있다면, 나뭇잎의 나부낌을 먼저 응시해볼 수도 있고, 그 아래 자리한 시원한 그늘 한가운데에 앉아볼 수도 있겠다. 브람스의 풍경은 어느 한쪽을 강요하지 않는다.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기대고 싶은지 조용히 기다린다.


브람스의 이야기가 내 앞에 주어진 것들과 얼마나 다르고 같은지를 떠올려 보면 좋겠다. 당분간은 이해할 수 없는 고즈넉한 평화가 남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영원히 온전할 것만 같은 저 안정감이 감사한 매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울상인 얼굴로 삐딱한 시선을 짓고 있더라도, 김선욱이 이끄는 서울시향의 손끝을 따라가볼 수는 있겠다. 휴양지에 떠나온 마음으로 구름 결을 따라 동동 떠다녀 봐도 좋겠다. 그들에게 나의 상념을 잠시 의탁해 본다.


아니면 어떤 일이 있었든지 잠깐 내려놓고, 있었던 일을 잊어버려 볼 수도 있겠다. 눈을 감았을 때는 비극을 그리고, 눈에 빛이 담겼을 적에는 웃는 얼굴만 응시하는 것도 좋겠다.


내가 이 천장 아래가 아니라 탁 트인 들판 위에 있다면, 아마 가만히 무릎을 모은 채 작아질 수 있는 만큼 작아진 채로 앉아 있을 것이다. 브람스의 선율은 그 작아진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지 않는다. 다만 곁에 앉아, 지금 고개를 들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쪽에 가깝다.


어디에 있든지 눈앞에 놓인 꿀 케이크는 고소할 것이고, 그 옆에 있는 아이스커피 한 잔은 쌉쌀한 맛이 가득할 것이다. 브람스의 장난스러운 빛 사이를 오가야 할 것이니, 잠깐 달콤한 상상을 해보자. 관악기 하나가 장난스럽게 고개를 내미는 순간마다, 주방 안쪽을 살짝 훔쳐보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브람스의 그림자 섞인 경쾌함을 음미해보자. 뒤로 몸을 누인 채 여유를 부려도 좋겠다. 오늘의 교향곡이 청중을 어디로 데려가고자 하는지 천천히 따라가 본다.


끝으로 향해 가는 길의 열망은 밝은 얼굴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좋은 때라면 햇살 뒤의 그림자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브람스의 햇살은 그래서 마냥 눈부시지 않고, 오래 바라볼 수 있는 빛에 가깝다.


무소륵스키의 밤과 라벨의 안개, 브람스의 햇살과 그림자까지. 김선욱과 서울시향, 그리고 알리스 사라 오트가 이 오래된 음악들을 오늘의 공기 안으로 데려올 때, 나는 그 앞에서 어떤 악보가 될까.


이 밤의 악령은 얼마나 소란스러울지, 안개는 얼마나 다정할지, 그리고 브람스의 빛은 얼마나 오래 남을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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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GRAM ■

 

무소륵스키, 민둥산에서의 하룻밤 


라벨, 피아노 협주곡 


브람스, 교향곡 제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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