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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작은가를 새삼 느끼는 것처럼, 인류 구원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진 그레이스와 그 소동의 배경이 되는 광활한 우주를 지켜보며 작고 사소한 질문들이 떠올랐다.
‘나는 누군가에게 로키 같은 존재가 되어주었나.’
이런 질문들이 자연스러웠던 이유는 영화의 방향성에 있다. 영화는 넓은 우주 공간을 활용하기보다 한정된 우주선 안의 공간에 집중하며, 인류를 구하기 위한 여정에서 시작해 내 친구 ‘로키’를 위한 여정으로 끝을 맺는다. 요컨대 큰 공간에서 작은 공간으로, 큰 주제에서 작은 주제로 이동하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축에서 영화가 흘러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견인하는 존재가 주인공 그레이스(라이언 고슬링)다. 그레이스는 프로젝트 책임자의 눈에 띄기 전까지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평범한 과학 교사였다. 그의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지구 멸망까지 30년이 채 남지 않은 상황,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그가 지목됐기 때문이다. 과학교사인 동시에 과거 분자생물학자였던 그레이스는 태양열을 갉아 먹는 외계 생명체, ‘아스트로파지’의 메커니즘을 분석할 수 있다는 이유로 ‘헤일메리호’에 탑승하게 된다. “전 세계가 당신만 믿고 있어요.” 유럽우주국 사무관 에바 스트라트의 말처럼, 그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숭고한 영웅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주인공이 서 있는 위치에 점차 의문점들이 발생하기 시작하는데, 이 여정에 그레이스 본인의 의지는 없었다는 점이다. 오롯이 타의에 의해 ‘헤일메리호’에 탑승한 그레이스는 고향 행성으로부터 11.9 광년이나 떨어진 곳에 홀로 남겨지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 여정의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가 ‘미혼에, 가족도 없는’ 무연고자였기에 임무에 투입되었다는 배경까지 밝혀지고 나면 그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달라진다. 영웅이 아닌 희생자, 우리와 똑같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보통의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지구를 구하고자 고결하게 목숨을 바친 용감무쌍한 탐험가 같은 게 아니다. 나는 문자 그대로 발버둥 치고 비명을 지르며 이 임무에 끌려 들어온, 겁에 질린 인간이다. 나는 겁쟁이다.”
- 앤디 위어, ‘프로젝트 헤일메리’
이처럼 본편은 그레이스의 불안과 공포를 축약하지 않는다. 용감한 영웅으로 포장하지도, 불쌍한 겁쟁이라 비난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죽음 앞에 떨고 있는 한 인간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한다. 보통의 영웅서사에서 문제 해결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내면 심리를 생략한다면, 본편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행위보다 심리에 초점을 두는 방식으로 주인공과 관객의 거리를 좁힌다. 그제야 ‘(두려움에 떨지 않는) 완벽한 존재’가 되기를 강요하는 공동체 안에서 관객은 모두 ‘헤일메리호’에 탑승한 그레이스가 된다.
이때 ‘로키’의 존재는 지구에서 쫓겨나 철저하게 혼자가 된 그레이스의 가장 내밀한 지점을 건드린다. 바로 마음을 주고받는 것, 진정한 교감의 순간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다양한 대상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제 인간의 감정적 공유 대상은 사람뿐 아니라 동물, 심지어는 인공지능으로 점차 확장되고 있다. 가족보다 AI에게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거나, 친구보다 익명의 상대와 각별한 사이가 되는 지금, 진정한 교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소통이 공감이고, 공감이 소통이다. 이건 우리 영화의 지침이자 원칙이기도 했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온 두 존재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여러 각도에서 접근한다. 언어적 차원에서, 문화적 차원에서, 환경적 차원에서, 공학적 차원까지.
- 씨네21, 크리스토퍼 밀러 인터뷰
영화는 그레이스와 로키의 만남을 통해 ‘나’의 언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닌 ‘너’의 언어를 배워나가는 것이 교감의 첫 발자국이라고 말한다. 가령 발버둥치는 그레이스를 향해 복종을 강요했던 지구인들과 달리, 그레이스와 로키의 첫 만남은 작은 통 던지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로키는 통 안에 메시지를 담아 자신이 다른 행성에서 왔음을 설명하고, 그레이스를 위해 속도를 조절해서 다시 던지는 등 천천히 소통을 시도한다.
그러자 몸짓으로 대화하던 둘은 점차 음파를 인식하는 번역기를 사용해 문장으로 소통하기에 이른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얼마나 닮아있는지, 또 얼마나 다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버팀목인 우주에서 어떻게든 우리는 공통의 언어를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 ‘나는 누군가에게 로키와 같은 존재가 되어주었나’ 에 대한 답을 해보자면, 부끄럽지만 자신이 없다. 늘 우리의 다름 앞에서 다가가기를 망설였고,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를 강조해왔다. 그래서 이제는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로키가 그레이스의 언어로 말한 것처럼 단호하고 다정하게 전하고 싶다.
오래오래 생각해도 됨! 평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