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사회에 얽매이지 않고
행복하게 공복을 채울 때
잠시 동안 그는 제멋대로가 되어 자유로워진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의식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는 고고한 행위.
이 행위야말로 현대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최고의 ‘힐링’이라고 할 것이다.
'고독한 미식가'는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2012년부터 방영 중인 일본 드라마다. 수입 잡화상 이노가시라 고로가 ‘혼밥’을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며, 대중은 그를 친숙하게 ‘고로 상’이라고 부른다.
한 남자가 일하며 밥을 먹으러 다니는 단순한 구성이지만, 드라마를 보다 보면 어느새 고로 상의 옆자리에 앉아 함께 맛을 음미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의 맛 묘사는 마치 구전 동화처럼 세밀해서 그의 독백과 표정을 따라가다 보면 화면 너머 음식의 온기까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물론 이 드라마가 단순히 ‘음식’만을 담아내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는 음식 그 자체보다, 음식을 즐기는 ‘고독한’ 고로 상에 집중한다. 쉴 틈 없이 바쁜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온전히 기댈 곳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음식은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며 언제나 묵묵히 만족감을 선사한다. 타인에게 에너지를 쏟지 않고 오로지 맛과 나의 감상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고로 상은 바로 그 순간의 가치에 집중한다. 그렇게 고로 상은 스스로 고독한 길을 택했다. 하지만 그의 식탁은 전혀 외롭지 않다.
한겨울 출장 속 따뜻한 ‘신코 구이’ - 시즌 5 정월 SP(2016.01.01. 방영)
고로 상은 업무에 치여 공복조차 잊고 있다가, 이왕이면 맛있는 한 끼를 먹기 위해 홋카이도의 선술집 ‘산시로’에 들어간다. 자신의 이름인 고로와 숫자의 의미가 이어진다는 사소한 끌림이 그를 식당 안으로 이끈다.
따뜻한 난로가 훈훈한 열기를 뿜어내는 식당 안에서 그는 양념 닭구이인 ‘신코 야키’를 마주한다. 버섯국과 계란말이, 수제 채소 절임을 곁들인 풍족한 상차림은 단순한 끼니를 때우는 자리가 아니다. 메뉴판의 키워드 하나하나를 신중히 골라 구성한 그만의 특별한 의식이다. 정겨운 손 글씨 메뉴판 사이에서 찾은 따뜻한 옥수수차가 마음에 들어 자신을 위한 선물로 사 가는 모습에서 그가 일상을 대하는 태도가 묻어난다.
추운 지역에서 눈을 맞다 들어간 따뜻한 선술집은 식당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고로 상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사장님의 말투는 단순히 영업적인 태도에 그치지 않는다. 술을 못해 옥수수차를 주문하는 고로 상을 무안하게 하지 않고, 선물로 받은 단호박을 조려 대접하겠다는 사장님의 말에는 투박하지만 깊은 정이 배어 있다. 추운 세상으로부터 잠시 도망쳐 온 도피처에서 고로 상은 그렇게 몸과 마음을 녹인다.
튀김꼬치와 함께 오사카의 품속으로 파고들다 - 시즌 6 제1화(2017.04.08. 방영)
오사카 출장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가기 전, 고로 상은 우연히 튀김꼬치를 파는 포장마차를 발견한다. 맛있는 음식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그는 포장마차로 들어가 보리멸, 곤약, 소 힘줄 등을 주문한다.
그는 꼬치를 한입 베어 물며 비로소 오사카의 품속으로 깊숙이 파고든 것 같다고 느낀다. 겉으로 보기에 그저 음식을 먹는 행위에 불과하지만, 업무를 끝낸 해방감 속에서 맛보는 현지의 맛은 도시와 자신을 잇는 연결 고리가 되어준다. 사장님과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꼬치를 먹으며 정답게 담소를 나누는 이웃들의 풍경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그의 마음은 충만해진다. 다정하게 대화하는 부녀의 모습을 보며 지어 보이는 미소는 그가 식탁에서 발견한 또 다른 형태의 기쁨일 것이다.
익숙함에 대한 그리움, 크림 안미츠 - 시즌 2 제1화(2012.10.10. 방영)
고단한 삶의 틈새에서 달콤함은 빼놓을 수 없는 위로다. 한천과 과일 위에 팥소를 얹고 시럽을 끼얹어 먹는 일본의 전통 디저트, ‘안미츠’가 특히 그렇다.
바쁘게 배를 채워야 하는 시간이라면 디저트는 사치일지 모른다. 하지만 고로 상에게는 업무의 고됨을 상쇄할 정서적 보상이 필요하다. 그가 선택한 ‘크림 안미츠’는 매우 ‘충실한’ 맛을 낸다. 이는 맛이 예상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기대치를 완벽히 충족한다는 의미다.
가게를 둘러보며 "전혀 새로운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라며 오히려 기뻐하는 고로 상의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누군가는 매번 새로운 자극을 찾지만, 복잡한 세상에 지친 현대인들은 오히려 변하지 않는 익숙함에서 안정감을 얻기도 한다. 고로 상에게 안미츠는 잠시나마 세상을 잊게 해주는 가장 익숙하고 달콤한 안식처가 된다.
고로 상이 전하는 이 시대의 고독한 ‘힐링’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먹어야 한다. 하지만 이 필수적인 영양 보충 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 고로 상은 식사를 단순히 에너지 비축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식사 시간의 소중함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 기꺼이 ‘혼밥’을 자처한다. 한입 한입에 최선을 다해 음미하고, 그 진솔한 감상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고로 상은 업무를 보다가도 갑자기 모든 동작을 멈추고 제4의 벽을 넘어 우리에게 외친다.
“배가 고파졌다….”
이 한마디가 던져지면 고로 상은 자신을 위한 밥집 찾기에 본격적으로 돌입한다. 자신의 업무 시간에서 빠져나와 온전히 음식을 위한 시간으로 바꾸는 하나의 신호인 것이다.
드라마 특유의 경쾌한 배경음악 역시 몽글몽글한 일상의 분위기를 완성하는 데 일조한다. 매번 반복되는 비슷한 선율이지만 이게 싫지 않다. 마치 매일 같이 되풀이되는 우리의 하루처럼, 이 음악은 단순하지만 나름의 의미를 지닌 우리의 일상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 리듬 속에서 고로 상은 언제나처럼 식사를 한다. 매번 다른 메뉴와 식당, 그리고 다른 날의 공기를 음미하면서 말이다.
결국 이 드라마의 메시지는 오프닝 내레이션에 집약되어 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의식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 고고한 행위’를 통해 온전한 자유를 누리자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에게 허락된 가장 평등하고도 위대한 힐링이다.
고로 상은 그렇게 오늘도 식사를 한다. 여느 때와 같이 말이다.
* 사진 출처: 고독한 미식가 공식 'X' 계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