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1.jpg


 

어릴 적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처음 읽었을 때,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산타도 믿지 않았고, 첫눈에 반하는 열정적인 사랑도 믿지 않았다. 지금은 첫눈에 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알게 되었고,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런 편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뿐이다.


주인공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이해하려면 나이부터 살펴보는 게 좋겠다. 원작에서는 13살 줄리엣과 16살 로미오는 16살과 20살로 상향 조정되었다. 유모나 줄리엣의 어머니의 말처럼, 그 시대 기준이면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나이었다. 지금이야 고딩엄빠에 출연할 만한 일이지만, 일찍 가정을 꾸리면 아직 한창의 나이에 벌써 아이가 무럭무럭 커서 장성하게 되는 시대였던 것이다.

 

 

2.jpg

 

 

줄리엣이 유달리 '운명의 남자'나 사랑에 집중하게 된 건, 오히려 유모도 엄마도 결혼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린 나이에 사랑으로 결혼하지 않는다는 말을 피부로 와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며칠 뒤에 등 떠밀려 전쟁영웅인 (아마도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면 다급히 운명과 사랑을 찾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3.jpg


 

그래서 캐퓰릿 가의 줄리엣은 가면무도회에서 결혼하기로 한 남자 대신 가면을 쓴 로미오를 만나서 사랑에 빠졌다. 어쩌면 줄리엣이 로미오가 말하지 않은 모습을 알았다면 사랑에 기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뮤지컬에서는 사촌과 친구의 손에 이끌려 원수 집안의 무도회에 간 줄 알았는데, 몬테규 가문의 로미오는 이전에도 캐퓰릿가의 다른 여자인 로잘린에게 마음을 뺏긴 적이 있었다. 그녀를 대체할 수 있는 여자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사랑에 빠지게 된 걸 보면, 그의 취향 또는 이상형은 캐퓰릿 가의 여자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이입하지 못했던 건 이들의 사랑이 너무나 열정적인데 비해 너무나 짧았기 때문이었다. 첫날 가면무도회에서 만나서 사랑한다고 이야기하고, 이틀차에는 비밀 결혼식도 치르고, 3일차에는 로미오가 베로나에서 추방되고, 줄리엣은 파리스 백작과 결혼이 추진된다. 4일차에 줄리엣은 신부님에게 받은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약을 먹고 잠들더니, 5일차에는 줄리엣이 죽은 줄 알고 자살한 로미오를 따라 그녀도 자살한다.


그러니까 이들의 사랑은 5일간의 사랑이다. 평일 기준이었다면 월-금이면 끝나버렸을 불나방 같은 사랑. 그래도 예전보다 그렇게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렇게 좋을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럼에도 헤어질 수도 있다는 걸 조금은 이해하게 되어서일지도 모른다. 5일이면 진실성이 없고, 50일, 500일이면 진실성이 있다고 반드시 말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물론 우리의 로미오는 첫눈에 반한 줄리엣의 발코니로 들어오고선 당황하긴 했다. 나를 사랑하냐는 줄리엣의 질문에 사랑한다고 하니, 줄리엣은 대뜸 결혼하자고 하니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영부영 결혼을 하게 되어버렸다. 나름 유경험자답게 다른 사람들도 좋아한 적 있을 거라는 함정 질문에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며, 너밖에 없다며 잘 넘어가는 게 재밌었다. 그래, 있었어도 없다고 하는 게 좋을 거다. 물론 줄리엣은 알았으면 좋았을 수도 있는 정보지만.


한 가지 어렴풋하게만 이해가 됐던 건 이 둘의 죽음이 어떻게 전쟁을 끝내고 사랑을 널리 알리며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냐는 점이었다. 그저 젊은이들의 사랑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더 분노나 혐오가 심해질 수도 있는데 말이다. 우리 집 귀한 딸/아들이 귀 댁의 아들/딸을 만나서 이렇게 된 거라면서.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베로나는 처음부터 몬테규와 캐퓰릿 가문이 서로를 무척이나 증오하고 싫어했고, 그래서 거리에서조차 두 가문에 속한 하인들이 마주쳐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영주도 베로나가 그런 곳인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리 손을 쓰지는 못했고, 두 가문의 어머니들은 서로를 무척 싫어한다는 넘버 La Haine(혐오)을 대놓고 드러낼 정도였다.


프랑스 넘버로 된 2001년 버전을 보니 이번 공연과 차이가 느껴졌다. 빠진 넘버들이 있었고 가사나 표현이 달라진 부분도 있었다. 예전 버전에서 패리스 백작은 보다 적극적으로 청혼을 했다. 알고 보니 30살인 그는 줄리엣을 사랑하며, 빚이 있다면 갚아줄 것이고, 자기에겐 믿을만한 빽도 있다면서. 유모는 이제 어엿하게 커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줄리엣에 대해 노래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바로 비밀결혼식을 이야기하지 않고 줄리엣을 도와줬다는 게 이해가 됐다. 유모의 이야기가 빠진 게 아쉬울 정도. 줄리엣의 아버지는 딸이 있는 아버지로서 남성과 여성을 보게 되는 관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마음은 그렇다 해도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신부님은 젊은이들의 사랑만을 응원했다기보다는, 두 가문의 사이가 좋아지기를 희망하면서 그들을 도와준 것이었다.

 

 

4.jpg


 

로미오에겐 크게 벤볼리오와 머큐시오라는 두 명의 벗이 있는데, 로미오와 줄리엣만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던 나는, 보라색 옷을 입은 머큐시오가 왠지 2막에서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짐작했다. 벤볼리오는 그다지 사고를 칠 것 같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갑자기 2막이 시작되자 머큐시오는 줄리엣에 대한 묘한 마음이 있었던 티볼트를 엄청나게 긁기 시작하더니 말을 잔뜩 하고는 대신 칼을 맞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말하는 것의 반만큼 칼을 썼다면 그는 어쩌면 살아남았을지도.

 


5.jpg

 

 

물론 더 신기한 건 다소 유약하게 보였던 로미오가 그 광경을 보고 참지 못한 로미오가 티볼트를 칼로 찌른 것이었고, 그보다 더 신기한 건 사고를 칠 것 같지 않던 벤볼리오가 가장 큰 사고를 친 것이었다. 신부님이 자초지종의 힌트를 담은 편지를 로미오에게 전해달라고 했는데, 그는 갑자기 편지는 가져가 놓고 로미오가 상처받을까 봐 편지는 읽지도 못하게 하고 줄리엣이 죽었다며 말을 해버리고 만 것. 게다가 죽음의 화신 같은 존재가 그 편지를 불태웠으니, 벤볼리오는 이제 매일 밤 잘 때마다 가슴을 두드리게 생겼다. 편지를 그냥 전해줄 걸 하고.


줄리엣은 패리스 백작과 결혼하느니 죽겠다며 부모님과 유모의 마음이 무너질 만한 이야기를 하는 친구였다. 어쩌면 신부님은 그래서 그 마법 같은 약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부는 일심동체였는지, 로미오도 줄리엣도 자신의 생명보다는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실천력이 좋을 줄 알았다면 로미오에게도 냅다 가사상태에 빠지게 하는 약을 먹이고 둘이 나란히 눕혀둘 걸 그랬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의 결말은 그렇게까지 비극적으로 느껴지게 표현되고 있지 않다. 적어도 사랑의 메세지를 잘 전달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세상의 어른들(왕, 영주, 몬테와 캐퓰릿)과 젊은이들이 대립하는 구도로 본다면, 어른들은 권력을 위해 이 증오와 혐오가 가득한 전쟁을 끝내지 않고, 젊은이들은 그걸 보면서 괴로워한다. 삶을 사랑하고 다른 이를 미워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이 그들의 목표인 것이다. 젊은이들이 사랑하다 세상을 떠난 후, 그들의 죽음으로 소중한 딸과 아들을 잃은 어른들이 과오를 뉘우치고 화해한다는 게  슬프지만은 않은 결말이 되는 셈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민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 그들을 철부지 젊은이들로 보이게 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른이 된 후 이전엔 알고 있었던 것들을 잊거나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그 역시 어른들을 헛똑똑이로 만드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 어른들이 사랑을 느끼고 표현하는 방법을 잊었다면 더더욱.



vadim-sadovski-J6wTH1imoTc-unsplash.jpg

출처: Unsplash


 

작금의 시대를 로미오와 줄리엣이 본다면 그렇게 사랑이 있지도, 낭만이 있지도 않다고 할 것이다. 그들이 말하던 어른들은 그렇다고 쳐도, 젊은이들 중엔 사랑을 포기하기도 하고, 사랑했던 이를 증오하고 혐오하며 다치게 하기도 하니까. 우리는 만난 지 하루는커녕 시간이 지나도 결혼을 쉽게 약속하지 않고, 결혼을 하더라도 혼인신고를 빠르게 하지는 않으며, 가족을 만드는 것에 두려움이 앞서는 세대니까. 게다가 우리는 그렇게 상징적인 두 사람의 죽음만으로 이 모든 걸 해소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게 단순히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 부족해서라고만은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아마도 그들은 갸우뚱해 할 것이다.


인상 깊었던 건 앙상블들이 열심히 무대를 누비며 날아다니고, 죽음이 그림자처럼 인물들을 따라다니다가, 죽음의 순간이 되면 가까워져서 이마에 키스를 하면 숨을 거두는 장면이었다. 어쩌면 죽음은 신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언제나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 곁을 서성였고, 수많은 이유로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았지만, 적어도 바로 그 베로나에서 사랑을 이유로 죽음을 선택한 일은 오랜만의 일이었을 테니까.


 

사랑 아름다운 것 

높이 날아올라 

새들의 날개에 닿는 사랑 아름다운 것

사랑 시간을 훔치는 것 

살아 숨 쉰다는 것 

불처럼 타오르는 그 사랑 가장 위대한 것  

사랑 끝없는 능력 

모든 걸 줄 수 있는 것 

서로를 이해하는 것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것 

가장 아름다운 것 

날아, 더 높이 올라 

새들의 날개에 닿는 사랑 아름다운 것 

시간을 훔치는 것 

살아 숨 쉰다는 것 

불처럼 타오르는 그 사랑 가장 위대한 것 

밤을 불태우는 것 (불태우는 이 밤) 

서로 희생하는 것 (희생하는 것 ) 

삶을 깨닫는 그 사랑 (아름다운 우리 사랑) 

아름다운 것 

가장 아름다운 것 (불태우는 이 밤) 

날아 더 높이올라 (희생하는 것) 

새들의 날개에 닿는 사랑 (아름다운 우리 사랑) 

아름다운 것 사랑

 

Aimer(사랑하는 것) -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