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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혼자만 아는 말 한 줄을 새겼다. 조금은 찌질해 보일 수 있는 상상조차 하나의 취향이 된다.
 

     

보통 다들 이렇게 글을 쓰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한 슬픔이나 기쁨, 혹은 괴로움을 텍스트로 써내려갈 때, 재미있게도 그 텍스트는 점차 자라 또 다른 내 세상를 만들어 준다. 어처구니 없는 상상이든, 입으로 뱉을 수 없는 상상이든 그것을 표출한다는 것과 표출하지 못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글은 욕망을 표출해 줄 수 있는 가장 쉬운 수단이다.

 

위 텍스트는 전시 중 패션에 관한 챕터인 더 리얼 부티크에 전시되던 패션잡화 소개 중 하나이다. 기억하기로는 영어 욕이 적혀있던 신발이었는데, 디자인처럼 신발 위가 아니라 밑창에 적혀 있었다. 나 이외엔 아무도 모르는 곳, 거기에 나 혼자만의 외침을 숨겨둔 것이다. 소개를 읽고 이건 역시 '글을 쓰는 이들은 모두 공감하겠구나' 싶었다. 패션과 글은 전혀 공통분모가 없는 것 같아 보이는데도?

 

그러니까 이 전시는, 공감과 공유의 영역에 가장 가까운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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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백화점 서울 Vol.2는 포스트 서브컬쳐를 주제로, 서브컬쳐가 하위문화에 국한되지 않고 도시와 브랜드 구조에 삽입되는 단계를 의미하며, 전시 관계자는 "여기서 서브컬쳐란 유행의 속도에 반응하는 취향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맥락을 이해하고 자신의 기준으로 연결을 선택하는 소비 방식"이라고 정의했다.

 

챕터 1 매거진에서는 수 십개의 인사이트가 적힌 종이들 중 원하는 종이 15개를 골라 담는 것이었다. 영화, 패션, 매거진, 맛집, 음악, 애니 등 다양한 주제가 많았고, 친구와 함께 가니 이런저런 취향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 매우 즐거웠다.

 

특히 애니를 좋아하는 둘은 '에반게리온' 내용이 적힌 종이를 보자마자 덥썩 집어들었다. 애니 전시회에서 좋아하는 애니를 감상하는 것과, 애니와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전시회에서 애니의 내용을 발견하는 것은 기분이 천지 차이다. 후자가 훨씬 흥분된다.

 

또 밴드 음악을 좋아하는 나는 커트 코베인이 여성복을 입게 된 이유가 적힌 종이와, 자신이 선호하는 밴드에 어울리는 밴드를 추천해 주는 종이 등 다양하게 담았다. 아마 열 다섯개가 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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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미친듯이 좋아했었던 무언가, 그리고 그 순간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과 같다. 살아나가는 행위는 시간이 더해지는 일이고, 시간이 더해지고 더해질수록 이전의 시간은 희미해진다. 나 역시도 그렇다. 지금 역시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지만, 이전에 좋아하던 무언가 말이다. 시간에 묻혀 희미해졌지만 열렬히 좋아하던 무언가.

 

그리고 챕터 2, 비사이드 레코즈에서 엘피 판을 뒤적이다가 떠올랐다. '열렬히 좋아하던 무언가'가 말이다. 무언가는 라디오헤드였다. 여러 노래와 각자의 이야기가 담긴 엘피 판 속에서, 나는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발견한 것이었다!

 

전혀 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의 음악을 텍스트로 발견한 점, 그리고 음악을 추천한 누군가와 취향이 겹친다는 점이 마음을 무척 들뜨게 했다. 라디오헤드를 열렬히 좋아했던 순간이 있었다. 우울하면서도 신선한 라디오헤드의 사운드는 마음을 극도로 안정시켜주기도, 우울에 기대고 싶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라디오헤드를 발견한 나와, 취향인 음악을 찾는 친구는 엘피 판을 뒤적거리다 십 분이 지나서야 만나게 되었다. 나는 라디오헤드 음악만 담긴 두 엘피를 선정했고, 친구는 아는 노래와 좋아하는 노래가 담긴 엘피를 선정했다.

 

이 전시는 무언가를 떠올리게 해 주었다. 발바닥 아래에 영어 욕을 그려놓을 만큼 찌질하게 시작했던 글의 첫 걸음마, 그리고 좋아했던 것. 그리고 이에 대해 누군가와 대화하고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 아주 단순해보이더라도 삭막한 삶에 어떠한 구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뭐, 빛이든 물이든 나뭇가지이든 간에. 다시 라디오헤드 3집에 재생 버튼을 누른 나처럼.

 

ps. 대표사진은 라디오헤드 멤버가 아니고 시드 비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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