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관계의 시작은 우정에서 비롯된다. 우정이란 벗 우(友)에 뜻 정(情)이 합해진 글자로, 친구 사이의 정을 뜻한다. 서로를 친구로 여기고 나누는 마음이 어떤 의미 있는 사이를 만들어낸다. 모든 관계의 최종적인 형태도 우정인 것 같다. 오래된 연인도, 수십 년을 함께 산 가족도, 일주일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동료도, 이웃사촌도 그 관계의 시작과 궁극적인 모습엔 모두 우정이 자리하고 있다.
이때 벗이라는 한자는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 뿐만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비슷한 또래가 아니어도 뜻을같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벗이 될 수 있고, 우정을 쌓을 수 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요즘 큰 화제가 되었던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단종’과 ‘엄홍도’의 관계다.
단종은 우리에게 늘 어린 왕, 특히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겨 처량한 최후를 맞이한 안쓰러운 왕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왕과 사는 남자>가 주목한 것은 이러한 사연 이면의 우정이었다. 삼촌인 수양대군과 그의 오른팔 한명회에 의해 폐위된 후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된 단종은 노산군이란 신분으로 엄흥도를 만나게 된다. 삶의 의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단종은 한껏 무기력하다.
반면 촌장인 엄흥도는 옆 마을이 그곳으로 유배해 왔던 대감 덕분에 풍요로워졌단 사실을 알게 된 상태라, 먹고 살기 힘든 자기네 마을을 위해 청령포를 유배지로 만들고 유배자의 마음에 들도록 물심양면으로 노력 중이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수염 덥수룩하고 나이 지긋한 영감 대신, 턱이 매끈한 소년이 유배됐다. 엄흥도의 눈엔 어쩐지 딱해 보인다. 죽으려는 이 아이를 간신히 또 간절히 살렸던 행동은 청령포에 보급될 식량 때문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밤낮으로 식사를 거부하는 이 양반 때문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서 정성스레 밥을 짓는다. 오늘은 과연 먹었을지 궁금하다. 후에 이 유배자가 조선의 왕이었던 이홍위란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주민들은 잘 먹이고 잘 살게 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한바탕 소동 후 엄홍도의 ‘청령포 소생 작전’과 마을 사정을 알게 된 이홍위는 미안함을 느끼고 그제야 밥숟가락을 든다.
조선의 왕, 폐위된 노산군이 아니라 인간 이홍위로 마을 사람들과 대면하게 되면서 그는 다시 살아갈 힘과 의미를 얻는다. 한명 한명 마주 보고 식사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같이 밥을 먹으면 가족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진심으로 한 인간으로 바라봐주는 마을 사람들에 정이 붙기 시작한다. 자신에게 전해져 온 식량을 내어주고, 아이들에게 글과 공부를 가르쳐준다. 또 그 발단이 촌의 이득 때문이었긴 하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챙겨주는 엄흥도와도 티격태격하며 인간적인 면모로 마음을 나누게 된다.
위기의 순간에도 서로를 위하고, 상대가 아끼는 사람들 속에 자신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 둘은 이제 정말 벗이다. 세조가 내린 사약에 죽기 싫었던 이홍위는 엄홍도에게 부탁한다. 그의 손에 죽게 해달라고. 엄홍도는 우정으로 그 활의 줄을 당겨준다. 물에서 나온 차가운 얼굴도 어루만져 본다.
후일담에 의하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삼대를 멸하겠단 명에도 불구하고 엄흥도는 이홍위의 장례를 치르고 그의 묘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이들 관계의 중심을 부성애로, 브로맨스로, 혹은 왕에 대한 백성의 충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이도, 성별도, 계급도 아니다.
바로 사람이다. 이홍위와 엄흥도라는 사람, 즉 그들이 함께 지냈던 순간들, 다슬기는 본인이 새벽부터 따왔다고 강조하던 모습, 기껏 데려왔더니 우리 마을 망하게 할 셈이냐고 옥체를 붙잡고 흔들던 모습, 마을 사람들의 특징을 소개해 주던 모습, 위험한 일을 말리던 모습, 맛있게 밥을 먹던 모습 등등이다.
따라서 이처럼 우정에는 감투 따위가 중요하지 않다. 우정은 벽을 넘어 존재를 연결하는 것이다. 어린 왕자와 여우처럼, <셰이프 오브 워터>의 엘라이자와 그것처럼, <언터쳐블>의 필립과 드리스처럼. 세상에는 ‘대학 후배’, ‘전 동료’, ‘대외 활동으로 알게 된 사람’, ‘입사 동기’ 등등 한 단어로만 설명하기 어렵고 애매한 관계가 있다. 각 관계는 상대와 나라는 단 하나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홍위와 엄흥도를 어떤 틀에 가둬 설명할 수 있을까. 그저 우정이다.
마음이 통하면 벗이다.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누군가는 모두 우리의 친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