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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빨간 마스크가 죽어서도 예쁘냐고 묻고 다녀야만 하는 이유 : 덤플링, 서브스턴스 [영화]

당신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by 오은지 에디터
2026.03.19 14:02

 

 

두 편의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젊음을 탐내면서 스스로 파멸하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1. 영화의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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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룻 챈, 〈덤플링〉(Dumplings), 2004

 

'칭'(양천화 분)은 왕년의 인기 배우였으나, 나이가 들면서 젊음과 미모를 잃고 남편의 사랑마저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불안해한다. 그녀는 ‘회춘 효과’가 있다는 만두를 파는 '메이'(백령 분)를 찾아간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그러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묘한 메이의 분위기에 끌려 ‘칭’은 만두를 먹기 시작한다. 그러다 ‘칭’은 만두의 비밀이 궁금해져 메이의 작업을 몰래 훔쳐보고, 큰 충격을 받아 도망친다. 만두의 속재료는 낙태된 태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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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랄리 파르자, 〈서브스턴스〉(The Substance), 2024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 분) 역시 한때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였지만, 현재는 50세가 되어 TV 에어로빅 쇼의 진행자로 일하고 있다. 그녀의 생일날, 제작자 하비(데니스 퀘이드 분)는 그녀가 "너무 늙었다"며 더 젊은 진행자로 교체하려 한다고 통보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중 자신의 광고판이 철거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한눈을 팔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엘리자베스는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퇴원하는데, 병원에서 마주친 젊은 미남 간호사가 코트에 몰래 넣어둔 ‘서브스턴스’라고 적힌 USB를 발견한다. USB 안에는 정체불명의 약물에 대한 광고 영상이 들어 있었고, 엘리자베스는 약물을 사용하게 된다.

 

 


2. 두 영화의 공통점: 가해자는 피해자, 피해자는 가해자


 

〈덤플링〉은 2004년, 〈서브스턴스〉는 2024년에 개봉되었지만 ‘젊음과 아름다움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던 주인공의 파멸’이라는 완전히 같은 주제 의식을 갖고 있다. 그리고 둘 다 주인공의 ‘뒤틀리고 부서진 영혼을 상징하는, 결국 기괴하게 망가지는 신체’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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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플링〉의 ‘칭’은 인육이 들어간 만두를 ‘먹는 행위’를 그만두지 못하고 기분 나쁜 체취와 피부 발진의 부작용에 시달린다. 그녀의 욕망은 점점 더 강한 효과를 쫓게 만들고, 결국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폭력을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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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는 세포를 분열하는 주사를 ‘주입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볼품없는 신체를 물리적으로 찢고 변형한다. 그렇게 얻은 젊은 분신은 사회가 보상하는 모든 것을 빠르게 획득하지만, ‘두 존재가 공존하는 규칙’이 무너지면서 관계는 공생이 아니라 경쟁이 되고, 결국 몸과 정체성 자체가 붕괴하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젊음은 선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둘로 찢어 서로를 소모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여기서 ‘칭’과 ‘엘리자베스’의 욕망은 “더 예뻐지고 싶다”가 아니라 “늙고 아름답지 않으면 버려진다”는 공포에 대한 반응이며, 그 공포가 내면화될 때 여성은 자기 자신을 가장 잔혹하게 착취하는 가해자이자, 가장 처절하게 파괴되는 피해자가 된다.

 

그런데 잠깐, 뭔가 이상하다.

 

 

 

3. 훌륭한 영화


 

영화가 이상하다는 것은 아니다. 두 영화의 연출과 톤, 색감과 미장센, 리듬은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앞서 짚어낸 주제 의식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낼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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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플링〉은 자극적인 장면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칭’이 만두를 ‘먹는 행위’만 보여주지만 칼질하는 모습, 만두를 빚는 모습, 만두를 입에 넣고 씹는 소리 등이 관객에게 저 너머의 공포를 상상하게 만든다. 부엌, 욕실 등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은밀하고 조용하게 이루어지는 파멸을 체감하면서, 조용히 무너지는 ‘건조한 으스스함’이 주는 여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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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스턴스〉는 아름다운 신체 또는 기괴한 신체를 쇼처럼 전시한다.

 

‘수’의 신체는 인공적인 광택이 더해져 극단적으로 아름답고, ‘엘리자베스’의 신체는 그야말로 스펙터클하게 붕괴된다. 화려한 이미지와 사운드가 더해져 멈출 수 없는 파국이 ‘폭죽처럼 터지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까지 한다.

 

 

 

4. 생산되는 이유, 소비되는 이유


 

그러니까 영화의 만듦새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탐욕 때문에 파멸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꾸준히 ‘생산’되고 ‘소비’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새롭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누구인가"를 거듭 물으면서 백설공주를 질투했던 왕비는 결국 자멸하고, 입이 찢어진 빨간 마스크는 죽어서도 "내 얼굴이 예쁘냐"고 묻고 다닌다. 죽음조차도 "내가 예쁘냐"는 질문으로부터 그녀를 해방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귀신이 되어서도 살아생전 받았던 외모 평가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타인에게 확인을 구한다. 그녀에게 "내가 예쁜가"라는 질문은 "내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와 동일한 의미이다. 동화부터 도시 괴담까지 온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여자의 욕망을 단호하게 단죄하거나 혹은 기괴하게 비틀면서 여성의 존재를 격하시킨다.


물론 〈덤플링〉이나 〈서브스턴스〉는 여성이 파멸하는 원인이 사회적인 압력에 있음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여성을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남성’과 ‘선택받지 못한 여자 주인공’을 대비시키면서, 여자 주인공에게 젊음과 아름다움을 욕심내야만 하는 절박함과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남성의 시선과 권력, 사회의 압력에 굴복하게 되는 여성의 내러티브는 상대적으로 너무 짧다. 무엇이, 왜 그녀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남성과 사회에 대한 통찰은 얕다.

 

반면 파멸한 여성의 모습은 너무나 극적이고 집요하다. 칭이 태아를 먹는 장면, 수와 엘리자베스의 신체가 끔찍하게 변형되는 장면들은 아주 오랫동안 변주되면서 끊임없이 화면을 채운다. 그녀들은 일순간 잘못된 선택으로 괴물이 되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멸된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저 볼거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즉, “세상이 문제다”라고 말하면서도 관객이 가장 오래 보고 가장 강하게 기억하는 것은 “파괴되는 여성의 몸”이다.

 

이것이 정말 "경각심"이나 "사회 비판"일까?

 

아니면 여성의 욕망을 계속해서 병리화하고 통제하는 또 다른 방식일까?

 

진정한 비판이라면 왜 사회가 여성에게만 이런 불가능한 기준을 요구하는지, 왜 나이 든 여성은 가치 없는 존재로 취급되는지를 구조적으로 파헤쳐야 한다. 그리고 그 압력에 저항하거나 다르게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도 함께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대신 우리는 "욕망하는 여성은 괴물이 된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본다. ‘구조’에 대한 통찰이 아니라 ‘괴물’에 대한 혐오감만 남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페미니즘적"이라고, "여성주의적 비판"이라고 포장된다.

 

 

 

5. 외모 정병


 

‘외모 정병’이라는 밈이 있다. 단어 그대로 “외모 때문에, 혹은 외모에 관해서 정신이 병든 상태”라는 뜻으로, 사회적 기준에 맞춰 자기 외모를 감시하고 교정하는 게 상시 가동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냥 “외모 스트레스” 수준을 넘어 스스로 봐도 “내가 좀 너무한 것 같다, 아픈 것 같다”고 느껴질 만큼 외모에 대한 강박적 사고와 행동이 일상을 지배하는 상태를 지칭한다. 인스타나 유튜브에는 "옆광대가 튀어나왔다", "두상이 납작하다" 등 해부학에 가까운 지식으로 자신의 얼굴을 나노 단위로 쪼개 분석하고 비하하는 영상들과 "인중 길이 줄이는 수술", “요정귀 만드는 필러” 등 각종 수술과 시술에 대한 정보들이 가득하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금기를 깨고 위험한 선택을 하는 과정은 현실에서 여성들이 고통스러운 시술을 감수하고,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다이어트를 하고, 경제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성형을 고민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메커니즘이다. 정도의 문제일 뿐, 그 뿌리에는 "지금의 나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똑같은 자기 부정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신병’이라는 단어를 쓰게 되면 이 문제가 개인의 심리적 결함으로 프레이밍 된다. 하지만 외모 정병의 진짜 원인은 개인이 아니라 외모를 통해 여성을 평가하고 서열화하는 사회 구조 그 자체이며, 불안을 연료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시장이다. 인스타그램, 틱톡 등의 플랫폼에서는 필터와 보정으로 완벽하게 다듬어진 이미지들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여성들은 불가능한 미의 기준을 내면화한다. 알고리즘은 불안을 자극하는 이미지와 해결책을 바로 붙여서 판매한다.

 

 

이제 말해보자.

 

외모 정병은 정말 개인의 정신적 질병일까?

 

아니면 사회가 만들어낸 집단적 트라우마일까?

 

왜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그렇게 간단하게 각자가 가진 병증으로 현상을 설명해도 되는 걸까?

 

 

영화에서 여성의 욕망이 괴물화되듯, 일상에서는 욕망하는 자아가 ‘정병’으로 낙인찍힌다. 〈덤플링〉이나 〈서브스턴스〉 같은 영화들이 보여주는 파멸의 서사는 외모 정병을 겪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네가 이렇게 외모에 집착하면 결국 파멸할 거야"라는 경고이자 예언이 된다. 결국 ‘정병’은 다른 양상으로 더욱 심화될 뿐이다.


모든 여성이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아름다움을 욕심내도 벌받지 않았으면 좋겠고, 정신병을 앓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괴물도 아니고 당신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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