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 연극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로비를 지나 문을 열면 무대와 객석을 구분 짓는 전통적인 경계는 지워져 있다. 어디가 무대이고 어디가 객석인지를 판단하려는 관객의 오랜 습관은 무력해지고, 자리를 찾아 앉는 행위 자체가 이미 이 연극의 세계로 진입하는 참여의 과정이 된다. 공간 한쪽에는 한자 여덟 팔(八) 모양의 비석이 쓰러져 있다. 공연의 막이 오르기도 전에 관객은 이미 이 묘한 기하학적 텍스트와 무너진 경계 안에 놓이게 된다.
2026년 3월,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 오른 극단 적의 신작 〈내가 살던 그 집엔〉은 세 여성의 얽히고설킨 기억을 좇는 작품이다. 그러나 극장에 앉아 극을 마주하는 순간, 그 단순한 시놉시스가 얼마나 얄팍한 설명인지 금세 깨닫게 된다. 이 연극의 이야기는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기억은 끊임없이 겹치고 어긋나며 서로를 배반하고, 같은 순간이 전혀 다른 감정으로 발화된다. 하나의 진실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여러 갈래로 흩어져 관객의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어느 순간부터 무엇이 사실이고 거짓인지 가려내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이 극을 관통하는 진정한 출발점이다.
‘내가 살던 그 집엔’ 이 연극의 제목은 하나의 서늘한 선언이다. 집이 안온함과 귀속감의 상징이라면, 이 연극은 그 상징이 처음부터 이 여성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음을 고발한다. 그들은 온몸으로 집을 지탱했으나 주인이 되지 못했고, 집 안에 있었으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으며, 도망치고 싶어도 도착할 다른 집이 없었다. 이 글은 그 부재의 공간에 무엇이 있었고 무엇이 없었는지를 따라가려는 시도다.
# 전복된 고전과 미끄러지는 진실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에서 모티프를 얻었지만, 철저히 중심부의 남성 서사를 전복시킨다. 원작에서 이아고는 사랑의 증거였던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을 불륜의 증거로 둔갑시킨다. 주목할 점은 이아고가 그 어떤 외부 권력도 동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저 어떤 물건이나 말도 확정된 뜻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 즉 맥락이 달라지면 의미가 미끄러진다는 언어적 틈새를 교묘히 이용했을 뿐이다. 이 의미의 미끄러짐 위에서 데스데모나는 결백을 외쳐도 끝내 믿어지지 않았고, 에밀리아는 오랜 침묵 끝에 진실을 폭로하는 순간 죽임을 당했다. 이들은 남성 서사의 비극을 완성하기 위한 도구로 철저히 소비되었다.
극단 적은 바로 이 지점을 뒤집어, 오셀로에서 지워진 여성들의 목소리를 1970년대 한국과 오늘날의 주변부 여성들의 자리로 불러온다. 진실을 말할 권위조차 갖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를 기존의 권위 있는 서사 구조(기승전결)에 욱여넣는 것은 모순이다. 이 연극이 어긋나는 기억과, 가장자리에서 서로를 향해 번져가는 말들을 극의 언어로 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극의 막을 여는 1971년 김추자의 노래 ‘거짓말이야’는 이들의 억압된 언어적 조건을 대변하는 강력한 메타포다. 특유의 경쾌한 고고리듬 위에 "거짓말이야"라는 비관적 가사가 반복되는 이 곡은, 들리는 것과 실제 내용 사이에 이미 깊은 균열이 있음을 첫 박자부터 선언한다. 권력을 가진 자는 진실을 직접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는 순간 위험에 처하거나 애초에 믿어지지 않는 자들은 우회로를 택해야만 한다. 거짓말처럼 들리는 방식으로 진실을 말하거나, 진실처럼 들리는 거짓말을 하거나, 그 경계 자체를 흩뜨리는 것이다.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어딘가로 미끄러지는 것, 그것이 이들이 세계와 불화하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 시공간의 해체와 살아있는 유령들: 세 여성의 궤적
극은 마마, 엄마, 그리고 딸이라는 세 여성을 통해 서사를 지탱하는 세 가지 축인 공간, 시간, 인물을 차례차례 해체해 나간다.
첫째, 공간의 해체(마마)다. 화교 출신인 마마는 서울에서 가게를 물려받아 살아가지만, 한국인도 중국인도 되지 못한 채 부유하는 디아스포라다. 이는 한국 현대사 속 화교들의 궤적과 닿아 있다. 그녀가 평생을 바쳐 일군 삶의 터전인 가게조차 법적 명의는 남편의 이름 아래 있다. 이주민이자 여성으로서 겪는 이중의 취약성은 그녀를 항상 경계 밖으로 밀어낸다. 마마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남편의 다정한 스킨십에 화들짝 놀라는 그녀의 몸은, 현재의 안전함 속에서도 과거의 폭력이 수시로 출몰하는 폐허다. 마마는 한 번도 실재한 적 없는 기억 속 환영의 고향을 갈망하지만, 그녀에게 온전히 속한 공간은 이 세계 어디에도 없다.
둘째, 시간의 해체(엄마)다. 택시 운전사인 엄마는 인지장애를 겪으며 딸을 죽은 마마로 착각한다. 가난한 집안의 큰딸로 태어난 엄마는 아들들을 위해 노동시장에 일찍 방출되어 가족의 생계를 떠안아야 했다. 착취당하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했던 엄마는, 이방인으로서 겉돌았던 마마에게 짙은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인지장애라는 설정은 이 동질감과 애도의 실패가 빚어낸 극단적인 시간의 붕괴다. 잃어버린 상실의 대상을 내려놓지 못한 엄마의 현재에는 매일 죽은 마마가 출몰한다. 그녀가 모는 택시는 매일 어딘가로 쉼 없이 이동하지만, 도착하는 곳은 언제나 ‘타인의 목적지’일 뿐 자신이 가고 싶은 곳에는 결코 닿지 못한다. 이동은 있으나 도착이 없는 이 닫힌 루프 안에서 엄마는 매일 과거의 순환을 산다.
셋째, 인물의 해체(딸)다. 엄마가 운전하는 택시에서 어디로 갈지 목적지를 정하는 딸 역시 실상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다. 어디로 향하든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 딸은 자신을 마마라 부르는 엄마를 굳이 정정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마마가 평생 감내해야 했던 폭력과 침묵의 자리를 딸이 자신의 몸으로 직접 살아내 보는 복잡한 의식이다.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의 자리를 대신하는 이 과정에서 딸의 정체성은 철저히 해체된다. 마마가 죽어서 출몰하는 유령이라면, 딸은 타인의 삶을 대신 살며 자신을 잃어가는 '살아있는 유령'이다. 에밀리아가 데스데모나의 뒤를 이어 똑같은 비극을 맞이했듯, 딸 역시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마마와 엄마의 자리를 대물림받아 함께 그 루프를 돌 수밖에 없다.
# 뫼비우스의 기하학과 쓰러진 운명
마마의 공간이 해체되고, 엄마의 시간이 해체되며, 딸의 인물이 해체된 자리에 남는 것은 ‘뫼비우스의 띠’라는 하나의 기하학적 형상이다.
1858년 발견된 이 형태는 안과 밖의 구분이 없다. 표면을 따라 걷다 보면 안에 있는 듯하다가 밖으로 나오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끝없는 이동이 반복된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지만, 나아가는 걸음을 멈출 수도 없다. 이 연극은 과거와 현재, 산 자와 죽은 자, 무대와 객석, 진실과 거짓이라는 모든 경계를 허물며 극의 형식 전체를 거대한 뫼비우스의 띠로 직조해 낸다.
특히 무대 한쪽에 쓰러져 있는 한자 팔(八) 모양의 비석은 이 연극의 다층적인 은유를 압축한 결정체다. 살짝 기울어진 ‘八’은 무한(∞)을 뜻하는 기호이자,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숙명(팔자)을 의미한다. 배우들은 발을 딛는 순간 자리가 끊임없이 이동하는 이 비석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미끄러진다. 진실이 말해지는 순간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리는 의미의 미끄러짐을, 무대 장치가 배우와 관객의 몸을 통해 직접 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석이 똑바로 서 있지 않고 쓰러져 있다는 것은 정해진 운명에 저항하려는 안간힘의 신호다.
뫼비우스의 띠가 주는 진짜 공포는, 경계가 없다는 것이 곧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안과 밖이 없다는 것은 벗어날 바깥, 즉 '탈출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될 때 끔찍한 감금이 된다.
# 끝나지 않는 질문, 창작산실의 존재 증명
뫼비우스의 띠는 막이 내린다고 해서 멈추지 않는다. 관객은 관찰자의 안전한 바깥이 아니라, 처음부터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없는 이 무한의 띠 위에 함께 서 있었기 때문이다. 세대를 건너 대물림되는 여성들의 억압된 궤도는 무대 위에서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극장을 나선 관객의 현재 안에서도 여전히 다른 형태로 살아 움직인다.
〈내가 살던 그 집엔〉은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하는 이 제도가 왜 필요한지를, 이 연극은 스스로의 예술적 성취로 증명해 낸다. 상업적인 흥행 공식에서 철저히 벗어나, 기승전결의 문법을 깨부수고 진실이 미끄러지는 방식 자체를 무대 언어로 삼은 이런 불친절하고 불편한 수작은 공공의 토양이 없다면 피어나기 힘들다.
이 연극은 관객을 결코 편안하게 돌려보내지 않는다. 진실을 말할 권위가 없는 자들의 말은 왜 세상에서 거짓말로 치부되는가. 억압과 미끄러짐은 왜 여전히 대물림되는가. 이 거대한 뫼비우스의 띠에서 우리는 과연 내려올 수 있는가.
연극은 끝났지만, 질문은 다치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흩어지는 그들의 서늘한 진실에 우리는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무대와 현실의 경계가 사라진 공간에 앉아 이 묵직한 미끄러짐을 함께 목격한 우리 모두가, 이제 각자의 일상 속에서 대답을 찾아야 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