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를 말하는 이야기들이 사방에서 밀려온다.
서점의 매대에서도, 알고리즘이 밀어 올린 게시물들 속에서도,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도.
이 흐름을 외면하는 순간 시대의 바깥으로 밀려날 것 같고, 지금 익히지 않으면 곧바로 무능해질 것 같은 재촉이 시작된다. 어느새 조급함은 습관이 되었다. 시선은 화면 위를 쉴 새 없이 미끄러지고, 엄지는 세상을 따라잡겠다는 듯 바쁘게 움직인다. 지금까지는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쪽이 더 강하다고 믿어왔는데, 요즘은 변화에 빠르게 자신을 맞추는 사람들 쪽에서 더 거센 바람이 몰려오는 듯했다.
인공지능을 처음 겪었을 때,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질서를 바꿀 혁신임을 직감했다. 변화는 더 이상 설렘처럼 다가오지 않았고, 불안이 더 무겁게 따라붙었다. 나보다 더 영민한 사람들의 손에 이 도구가 쥐어지는 순간, 나의 자리도 세상의 질서도 쉽게 흔들릴 수 있겠다는 불안.
그 불안은 더 조급한 행동을 만들었다. 늦으면 안 된다는 몸짓으로 책을 읽고, 뉴스를 뒤지고, 빨리 익숙해지기 위해서 평소보다 더 오래 폰을 쥐고 있었다. 이 몸짓은 성장에 대한 순수한 열망처럼 포장되었지만, 사실 뒤처지지 않기 위한 조급한 방어의 모양에 더 가까웠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잘.
이 주문을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적응하고 있다는 흔적을 수집하며 숨구멍을 만드는 주문 같았다.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은 오직 다음 불안이 들이닥치기 전, 아주 짧게 허락되는 틈뿐이었다.
그 틈에서 질문은 시작되었다.
이 속도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 걸까.
멈추는 순간 정말 뒤처지게 되는 걸까.
왜 속도를 내고 있는지, 왜 횡단보도의 초록불이 아직 충분한데도 발끝부터 조급해지는지, 왜 영상은 2배속이 아니면 견디기 어려워졌고, 왜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는 사람 뒤에서 속으로 한숨을 삼키게 되었는지. 인공지능과 잘 지내는 법을 익히는 동안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건너는 법을 잊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계와의 엇박자를 줄이기 위해 들이는 공에 비해, 타인과의 불화를 견디고 매듭짓는 일에는 점점 무심해지고 있지는 않은지.
발전과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남보다 먼저 도착하는 일이 미덕이 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너무 오래 서로를 앞질러 왔다. 급격한 성장이 남긴 통증을 돌볼 틈도 없이 어른이 되어버렸다. 상처를 안은 채 자란 사람들은 자기 고통을 감추는 데는 능숙해졌고, 타인의 고통 앞에서는 점점 둔감해졌다. 자신을 돌보기보다 나보다 더 크게 다친 사람을 보며 안도하는 방식으로 가까스로 균형을 맞춘다.
그러는 사이 상처는 더 이상 개인의 비밀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는 흔한 사정이 되었고, 우리는 그 사정을 알아보면서도 모르는 척 서로를 스쳐 지나가는 일에 익숙해졌다.
세상이 매끈해질수록, 사람의 마음은 그만큼 날카로워졌다.
손짓 한 번에 즉시 반응하는 기계들, 지연 없이 도착하는 서비스들, 군더더기 없이 정리된 화면 속에서 오래 머문 눈은 타인의 작은 어긋남을 더 이상 배경으로 넘기지 못한다. 잠깐의 지체에도 짜증이 이는 일은 거의 본능이 되었고, 누군가의 실수에는 곧바로 책임을 묻는 발신자조차 불분명한 문장들이 순식간에 화면 위로 밀려든다. 완벽함은 더 이상 목표가 아니라 전제가 되었다. 그 기준에서 밀려나는 순간 사정은 설명이 아니라 변명으로 격하된다. 느림은 하나의 리듬이 아니라 수정되어야 할 결함이 되고, 서툼은 기다려지지 않고 제거되어야 할 오류가 된다.
인공지능 시대를 말할 때 사람들은 가장 먼저 사라질 직업의 목록을 펼쳐 들고, 그다음에는 살아남는 데 필요한 능력들을 덧붙인다.
더 정교한 프롬프트, 더 빠른 적응력, 더 민첩한 대응.
입력과 출력이 반복되는 사이 조금씩 비어 가는 질문이 있다.
- 우리는 이 도구를 통해 무엇을 더 잘하고자 하는가.
- 더 효율적이고 더 생산적인 세상은 오래전 우리가 꿈꾸던 삶과 닮았는가.
- 더 매끄럽고 더 속도감 있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더 행복해지고 있는가.
물론 이 모든 변화가 인공지능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닐 것이다. 세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속도와 효율을 중심으로 움직여 왔고, 인공지능은 그 질서를 더 촘촘하고 더 빠르게 만드는 장치 중 하나에 가깝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인공지능의 완성도 자체가 아니다. 그 완성도 높은 성능을 너무도 자연스러운 기준으로 받아들이게 될 인간의 태도다.
결핍과 허점을 끊임없이 해명해야만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세계
이미 우리는 타인의 작은 실수가 나의 시간과 공간을 침범한다고 느끼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길 위에서 느리게 걷는 사람에게 짜증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나는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만큼이나 내 마음의 리듬도 빠르게 어긋나고 있음을 실감했다.
아침에는 다정함을 말하는 문장에 '좋아요'를 누르고, 낮에는 앞사람의 느린 걸음을 견디지 못하고, 밤에는 인간다움을 걱정하는 글을 쓰는 사람.
그 모순된 셋이 모두 나라는 사실 앞에서, 나는 문제가 어디 있는지 찾기도 전에 이미 사회의 속도를 내 몸이 닮아가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기술은 늘 인간의 수고를 덜어주었다. 계산기가 사칙연산을 대신하고, 세탁기가 손빨래를 밀어냈듯이. 인공지능 또한 우리에게 더 정교한 지능을 빌려줄 것이다. 어쩌면 지능이 더 이상 개인의 자산으로 기능하지 않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기술이 지능을 빌려주는 세계에서의 인간은 굳이 성장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처럼 보일 수도 있다.
성장의 필요가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우리를 다듬게 할 수 있을까.
무엇이 우리를 타인의 고통 앞에 오래 머물게 할 것인가.
*
기술 덕분에 우리는 시간을 얻었지만, 그 시간이 곧장 관계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여유는 함께 숨 쉬는 공간이 아니라 나만의 몫이 되어야 했고, 타인의 느린 몸짓은 그 몫을 침범하는 일처럼 받아들여졌다. 편리함은 너그러움을 낳지 못했다. 오히려 참지 못하는 마음이 우리 안을 더 깊숙이 잠식해 온 것 같다.
음식이 더 빨리 나오게 되어도 키오스크 앞에서 오래 머무르는 사람을 향한 눈초리는 거세졌다. 인터넷이라는 가면은 생각을 검열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만들었고, 혐오와 조롱은 거의 비용 없이 누군가의 눈앞으로 순식간에 펼쳐진다. 우리는 끊임없이 방해물을 찾고, 그 방해물은 대개 사람이 된다. 기다려 주고 싶어도, 그 기다림이 또 다른 누군가의 시간을 건드릴까 봐 먼저 자신을 재촉하게 만든다. 그 안에서 배려는 마음의 습관이 아니라 계산의 기술이 되었고, 사람들은 사랑보다 눈치를 먼저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르고 더 정교한 지능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빠르게 잃어가고 있는 것은 어쩌면 미완을 견디는 힘인지도 모른다.
내 속도를 조금 늦추더라도 누군가가 머물 자리를 남겨두는 것, 내 효율을 앞세워 타인의 더딤을 곧장 결함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
희미해지고 있는 사람다움을 다시 붙잡는 일은, 빠른 세상에 휩쓸려도 우리 안의 다정함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고집에서 시작될지 모른다.
시대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여야 한다.
다가오는 시간이 혁신의 기록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끝내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를 집요하게 묻는 시대가 되기를. 훗날 이 시대의 성취가 처리 속도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오래 인간다움을 버리지 않았는지로 기억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