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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뮤지컬 <시지프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팬데믹으로 인해 황폐해진 어느 미래의 세상에서, 극렬한 무의미 속에 놓여 있는 네 명의 배우 언노운, 포엣, 클라운, 아스트로가 한때는 극장이었던 곳에 멍하니 있다. 그들은 현재 삶에 대한 강력한 무력감을 느끼고 있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 그들은 현재 무력감을 느끼는 만큼, 한때 그들이 강렬하게 느끼곤 했던 '유의미'의 감정을 다시금 느끼고 싶어한다.
이 극을 보기 전까지 나는 '이 뮤지컬의 제목이 왜 <시지프스와 그리고 뫼르소(소설 '이방인'의 주인공)>가 아닌가?'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더란다. 즉, 시지프스 신화 속 인간 시지프스와 뫼르소가 어떤 고리로 연결 되어서 제목이 <이방인>이 아닌 <시지프스>로 결론지어질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글은 뮤지컬 <시지프스>를 관람하면서 연결고리를 추적해보려는 지난한 고뇌의 흔적을 다룬 글이기도 하다.
'시지프스 신화' 속 인간 시지프스는 신과 인간이 함께 살던 시절, 인간들보다 욕망이 센 신들의 잘못을 샅샅이 밝혀낼 만큼 겁이 없고 대담한 인간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신들의 미움을 받았고, 그런 시지프스에게 신들은 돌을 산 정상까지 굴리라는 형벌을 내린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돌은 가벼운 짱돌도 아니고 커다란 바위라는 걸. 그리고 그 바위를 굴려 올리는 것만으로 충분히 힘들 테지만, 그 돌은 정상에 도달하자마자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면 소설 '이방인' 속 뫼르소는 어떠한 환경(혹은 좀 더 극적인 용어로는 운명)에 처해있는가? 이에 대해 뮤지컬 <시지프스>는 붉은 태양의 이미지를 관객이 느낄 정도로 강렬하게 연출하는 방식을 통해, '이방인' 속 뫼르소가 '눈부시도록 작열하는 태양'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강조한다.
뫼르소는 많이, 그것도 상당히 무심한 성정의 인물이다. 왜냐하면 엄마의 부고 소식을 듣고도 눈물을 흘리지도, 엄마가 계시던 요양원에 갔을 때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볼 건지 물어보는 질문에 대해서도 그는 수차례 거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아가신 엄마의 장례식에 가는 길도 그리고 입관하러 가는 길에도 뫼르소 앞에는 눈뜨기도, 숨쉬기도 힘들 정도의 태양이 내리쬐고 있다. 게다가 그의 친구 레몽과 놀러 간 바닷가에서 마주친 레몽의 천적과 뫼르소가 석연치 않게 싸움이 붙게 되었을 때도 그 태양은 뫼르소 앞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때, 뮤지컬 <시지프스>는 그 두 인물을 단순히 나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극은 알베르 카뮈의 대표적 개념인 '부조리'를 매개의 연결고리로 삼아, 시지프스가 처한 '돌이 떨어질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돌을 굴려야 하는 운명'과 뫼르소가 처한 '작열하는 태양 앞에 무력하게 종속되어 사형 집행까지 이르고 마는 운명'을 유기적으로 조합해낸다.
이는 <시지프스>의 넘버 가사에서도 나타난다. 즉, 시지프스가 계속 돌을 굴려야 하는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상황은 시지프스가 자신에게 스스로 가한 형벌이 아니라, 나보다 더 큰 존재인 신이 시지프스에게 가했던 형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뫼르소 앞에 계속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 앞에서 무력화되는 뫼르소는 태양의 강렬한 에너지에 잠식당할 것 같은 나머지, 자신과 싸움이 붙은 레몽의 천적을 총으로 네 방이나 쏴 버리고 그로 인해 사형 집행이라는 상황에까지 처하고 만다.
시지프스와 뫼르소 이 두 인간으로부터 공통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자기보다 더 큰 위력적인 존재(시지프스에겐 신, 뫼르소에겐 태양과 같은 자연)에 의해서 그리고 딱히 정당한 사유도 없는 채로 부조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Why So Serious?' 넘버의 가사에서도 드러나듯, 마치 '신이 그렇게 디자인해 놓은 것처럼' 말이다.
시지프스가 돌을 굴려야 하는 합당한 이유도 없다. 오히려 시지프스가 신들을 열받게 했다는, 다분히 신적인 이유에 의해 강제당한다. 왜냐하면 합당함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뫼르소가 자신을 없애버릴 것만 같은 태양 앞에 놓인 상황으로부터 그의 의지로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태양에 무력하게 종속되어 있다(물론, 그럼에도 뫼르소가 레몽의 천적을 총으로 쏜 것과 관련하여, 작열하는 태양이 그의 동기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는 견해도 물론 존재한다).
다시 네 명의 배우들 이야기로 돌아가,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는 무의미의 시대에서 포엣은 자신들과 처지가 비슷한 한 인물, 즉 인간 시지프스를 떠올려 우리도 그처럼 우리들만의 돌을 굴려보자고 제안한다. 그들은 한때 배우였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돌은 '이야기'다. 그래서 그들은 무의미밖에 남지 않은 세상 속에서도 다시 '의미 있음' 속에서 삶에 대한 강렬한 감정을 느끼고자 한 이야기를 가져오는데, 그것이 바로 뫼르소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다.
역설적으로 네 명의 배우들은 돌을 굴려내는 과정에서 그들은 '살아있음' 그 자체를 느끼게 된다. 돌을 굴려내기 위해 힘껏 달려서 느꼈던 힘듦이 강렬하게 뛰는 자신의 심장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들은 소설 '이방인' 속 여러 인물들이 되어 이입하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는, 극 마지막에 소리친다. 정말 힘들지만, 동시에 그렇기에 정말 재밌었다고 말이다.
순전한 행복과 무의미 속 간혹 느껴지는 희미한 희망, 그중 어떤 것이 인간을 살아가게 하고 움직이게 할까? 아무래도 인간은 한 가지 선택지만을 택할 수 있는 타율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 차가운 사실이라면 사실일 수 있다. 그럼에도 자신이 처한 존재적 조건을 인식한 인간은 적어도 충만하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아마 인간에게 남은 유일한 한 가지 따뜻한 사실일 것임은 분명하지 않은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