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다. 등이라도 떠밀리듯 어영부영 한 해를 정리하고 나니 멍하게 새해다. 보통 새해는 모두가 다짐으로 시작하게 된다. 새해 첫 곡이 중요하다는 문화가 말해주듯, 올해 이루고 싶은 목표들을 하나씩 나열해 보며 삶의 형태와 방향을 구상해 보는 거다. 취득하고 싶은 자격증, 지원하고 싶은 회사, 올라가고 싶은 자리 같은 것들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친구들 앞에서 나는 이렇다 할 각오가 없어서 민망한 사람이다. 하필이면 최근 본 영화 속 젊은이들이 ‘게임으로 100억 벌기’를 외치며 야망을 품은 모습인데 말이다.
어릴 때부터 꿈이 뭐냐는 말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막연히 어떤 사람이 되어야지, 이런 환경에서 지내야지, 어느 분야에 종사하면 좋겠다 등의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특정 직업이나 직무를 죽도록 바라온 적이 없었다. 남들은 그게 아니면 안 되는 일, 젊음을 다 바칠 만큼 좋아하는 일, 자신이 천직이라고 느끼는 일을 다 찾은 것만 같은데. 이래도 될까? 내 속의 열정을 아직 정의하지 못해 공허한 사람들에게 연초는 더 시리다. 이들에게 영화 <소울>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소울>은 불꽃을 찾는 한 영혼의 이야기다. 이곳의 세상은 ‘태어나기 전 세상(the great before)’, 지구, 그리고 내세인 ‘머나먼 저 세상(the great beyond)’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영혼들은 인간이 갖춰야 할 속성이 모두 준비 되면 지구로 내려가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지구 통행증을 받게 된다. 여기서 영혼 ‘22호’는 자신 이후에 1082억 1012만 1415호 영혼이 생겨날 정도로 오랜 시간 지구로 가길 거부하고 있다. 딱 한 가지 남은 항목인 ‘열정’을 채우지 않는 방법으로.
22호는 영혼들을 교육하는 장소인 ‘유세미나(You Seminar)’에서 우연히 자신의 멘토로 ‘조’를 만난다. 조는 지구의 재즈 피아니스트로, 중학교에 기간제 음악 교사로 재직 중이지만 직업 연주자가 되고 싶어 오디션을 본다. 합격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나오던 중 맨홀에 빠지며 이곳으로 오게 돼버렸다.
당장 자신의 중요한 꿈이자 경력이 될 저녁 공연에 참여해야 하는 조는 지구로 내려가기 위해 22호에게 불꽃을 찾아주는 대신 지구 통행증을 달라는 교환 제안을 한다. 그 과정에서 마구잡이로 병원에 있는 자기 육체에 뛰어들며 22호와 조는 함께 영혼의 상태로 지구에 떨어져 버린다.
하지만 떨어지면서 영혼 22호는 조의 몸에, 조의 영혼은 그 옆의 고양이에게 들어간다. 이를 해결하려는 조의 이상한 행색을 담당자가 목격해버려 조는 저녁 공연에서 제외될 위기에 처한다.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둘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담당자에게 한 번 더 부탁하러 갈 준비를 한다. 그러면서 22호는 조의 몸으로 여러 사람을 만난다. 말로는 그만둔다 말하지만 사실은 연주를 너무 사랑해서 자신을 붙잡아주길 원하는 조의 제자, 원하던 수의대에 진학하진 못했지만 이발사로서의 일상에 만족하며 즐겁게 살아가는 데즈, 재즈 연주에 대한 조의 열정에 못 이겨 남편의 공연복을 내어주는 재봉사 어머니.
이 모든 사소하고도 지극히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불현듯 영혼 22호는 자신의 불꽃을 발견한 것 같다고 느낀다. 재즈도 아니고 운동도 아니다. 22호는 자신의 불꽃이 걷는 것 또는 하늘을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조에게 말한다. 다시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잡혀간 둘은 22호의 지구 통행증이 완성되었단 소식을 들었고, 조가 그것이 자기 덕분이라고 말해버려 싸우게 된다. 22호가 지구 통행증을 조에게 던져버리고, 조는 불꽃을 어떻게 얻었는지 궁금해하지만 불꽃은 삶의 영감이나 목적처럼 심오한 것이 아니란 말을 믿지 못한 채 그 통행증으로 지구에 돌아온다. 원하던 저녁 연주를 성공적으로 해내지만 정작 달라진 건 없는 것 같고, 왠지 모를 회의감이 밀려온다. 음악가 선배 도로시아에게 이를 털어 놓으니 이런 답이 돌아온다.
한 물고기 이야기를 들려주지.
그는 늙은 물고기에게 헤엄쳐가서 말했어. "바다를 찾고 있어요."
"바다?" 늙은 물고기가 말했지. "네가 있는 곳이 바다란다."
어린 물고기가 말했네. "여기가요? 여긴 그냥 물이잖아요! 저는 바다를 원한다고요.“
자신이 찾던 것이 이미 가까이에 있었음을 모르던 조는 22호가 자신의 몸에 모아둔 피자 조각, 베이글 조각, 바느질 도구, 단풍나무 씨앗 등을 보면서 그날 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에서 느낀 작은 행복들을 회상한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추억, 자전거 위에서 바라보던 하늘, 맛있는 파이를 먹은 일, 카페에서 수다 떠는 사람들 같은 일상생활의 기쁨 말이다. 조는 다시 22호에게 돌아가 지구 통행증을 돌려준다. 22호는 지구로 뛰어내리고, 링컨도 테레사도 해내지 못했던 22호의 불꽃 찾기를 완성한 조에게도 지구로 갈 한 번의 특별한 기회가 생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이냔 물음에 조는 모르겠다고, 하지만 날마다 기쁘게 살겠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고 답한다.
이상하게 우리를 살아가도록 하는 것들은 다 저랬다. 모르는 아기가 건네준 사탕, 강아지를 산책시키다 만난 초면인 사람들 구경, 어쩌다 먹은 디저트, 저 사람의 행복은 나의 행복이라며 노숙자에게 모자를 나눠준 카르마의 아저씨, 처음 가보는 동네, 늦은 밤 시원하게 타고 달린 자전거. 거창한 목표나 열정이 아니어도 불꽃이 될 수 있다.
이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말이 더 체감된다. 조가 ‘그건 그냥 사는 거’라고 했던 것들, 실존의 순간들은 그 자체로 불꽃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보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조처럼 모르겠더라도 하루하루 기쁘게. 아직 불꽃 칸이 완성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