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은 살 수 없는 사람들
나는 인간이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간단한 질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왜 살아?”라고 물었을 때 “그런 걸 왜 고민해?”라고 답하는 사람과 선뜻 답하지 못하는 사람. 물론 모든 삶에는 나름의 고충이 있겠지만 삶 자체에 대한 고민이 불필요하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인 것 같다. 그 무의미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느라 평생을 헤매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후자에 가깝고, 전공의 특성상 주변에도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 풍부한 감수성에서 비롯된 우울과 불안, 그리고 지나치게 많은 생각은 예술과 근접한 많은 사람들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 생각이 타당하다면 다양한 문화예술의 애호가들이 모이는 이 공간에도 알게 모르게 비슷한 경험이 공유되고 있을 것이다. 그게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다.
그렇다고 뻔한 조언을 하고 싶지는 않다. 건강한 생활 습관을 만들라던가, 운동을 꾸준히 하라는 말은 어딜 가나 들을 수 있고 누구나 안다. 나보다 훨씬 뛰어난 전문가가 훨씬 훌륭하게 정리한 수많은 정보가 이미 널려 있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매뉴얼’이라는 제목을 붙일 명분은 단 하나다. 남들처럼 무던하게, ‘그냥’ 살지는 못해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몸소 입증할 수 있으니까. 따라서 이 글은 매우 주관적인 성격을 지닌다. 나에겐 유용했으나 당신에게는 아닐 수 있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길 바라며 몇 자 적겠다.
정답 없는 서술형 문항
우선 처음의 문제부터 시작해 보자. ‘삶의 이유’에 대해서다.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수많은 종교와 철학자들이 답을 내놓았으나 한 번도 합의에 이르지 못한 문제를 우리가 풀 수 있을까? 삶의 본질을 두고 공통된 답을 도출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삶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부한 결론이지만,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결국에는 스스로 풀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외부의 조언도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관점을 빌리는 게 유용할 수 있다. “그런 걸 왜 고민해?”
『마음 지구력』의 저자 윤홍균 교수는 번아웃의 대표적인 증상으로 ‘늘어나는 질문’을 꼽았다. 이는 호기심이라는 중립적인 감정을 통해 불쾌한 감정을 회피하기 위한 현상이다. 우리가 삶의 이유를 궁금해하는 까닭은 살기 힘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왜 살지?”라는 질문이 사실은 의문문으로 둔갑한 감탄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고찰하는 사람은 없다. 맛있으니까 먹을 뿐이다. 반면에 단지 태어났다는 이유로 살기에 우리의 삶은 쓰디쓰다. 자꾸만 답을 찾으려는 것은 어쩌면 살고는 싶지만 구실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랬다. 돌이켜보면 내 삶의 역사는 그 이유를 갱신하는 역사였다.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뒤 한동안은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았다. 친구의 장례식을 다녀온 뒤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슬픔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살았다.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기 위해 살았다. 그리고 대학원에 입학한 뒤로는 내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해 살고 있다.
삶의 이유에는 정답이 없기에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세상이라는 바다에 나라는 배를 좀 더 단단하게 붙들어주는 닻을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삶은 지속된다. 살아가려는 마음만 있다면. 따라서 철학자처럼 근사하고 일관된 답을 도출하기보다는 끝없이 변화하는 삶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랄 총량의 법칙
하지만 자신의 솔직한 마음과 마주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무의식의 구성물은 대개 위협적이고 불쾌하기에 방어기제를 통해 억압된다. 의문문이 감탄문으로 둔갑하는 앞선 사례와 같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은 대상을 의식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뿐 없애지는 못한다. 무의식에 남아 있는 심리적 갈등은 우리의 삶에 계속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마음속의 온갖 불편한 것을 담아두는 무의식이라는 창고도 청소가 필요하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사람이 평생 써야 하는 지랄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이는 김두식 교수의 저서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사춘기나 젊은 시절의 반항적 행동이 성인이 되어 안정되는 현상을 설명한다. 반대로 지금 지랄하지 않으면 나중에 하게 되어있다. 이렇게 지랄에 총량이 존재하는 까닭은 무의식에 총량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누구나 일하기보단 놀고 싶고, 고통보다는 쾌락을 원한다. 하지만 사회에 진입할수록 부과되는 수많은 의무와 책임이 이러한 욕망을 억누른다. 타고난 기질과 삶의 방식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모두 무의식의 총량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총량을 유지하는 청소, 혹은 배출 작업이 바로 지랄인 것이다.
카타르시스란 마음속의 응어리를 언어나 행동을 통하여 외부에 표현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되찾는 것을 가리킨다. 누구든 어느 정도는 지랄하면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지랄이 꼭 지랄 맞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의무와 체면의 속박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달래고 속에 쌓인 것을 내보낼 수 있으면 된다. 많이들 추천하는 해소법이 일기를 비롯한 글쓰기다. 나 역시 추천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지랄 맞은 지랄도 제법 도움이 됐다.
속상한 일 때문에 잠 못 들던 어느 새벽, 충동적으로 무인 노래방에 갔다. 아무도 없어서 조금 무서웠지만 덕분에 마음껏 소리 지르고 울 수 있었다. 그렇게 2시간 가까이 지랄하다 까무룩 잠들었고, 아침에 눈을 떴다. 덥다고 겉옷을 벗어 던진 탓에 얇은 민소매 한 장과 짧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부모님이 아신다면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며 등짝을 얻어맞겠지만, 그 뒤로 능률이 무척 좋아져 나름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SOS
하지만 닻이든 지랄이든 전부 무력해지는 순간이 있다. 고통, 두려움, 우울 등의 부정적 감정이 너무 강력하거나 오래 누적되면 무엇이 어찌 되든 벗어나고 싶은 바람만이 간절해진다. 자칫 위험한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마음의 위급 상황이다. 이러한 경우엔 외부의 조력을 받으라고 강력하게 말하고 싶다. 가까운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지만, 사회적 관계의 부담이 적은 타인의 손길이 오히려 편할 때가 있다. 그게 전문 인력이라면 더더욱.
자살 사고 및 충동과 관련하여 빠르게 전문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루트는 생각보다 많다. 가장 유명한 것이 전화를 통해 자살과 관련된 고민을 상담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서비스다. 자살예방상담전화 10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모두 전문 인력에 의해 24시간 운영되니 언제든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다. 109는 나도 이용해 본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이야기를 세심하게 들어주시면서 도움이 될 만한 절차를 안내해 주신다. 필요하면 내담자가 있는 곳으로 경찰을 대신 불러주기도 한다.
가장 효과가 확실한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입원이다. 아직도 ‘정신병동’ 하면 무서운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 역시 경험자의 입장에서 말해 보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일반 병실보다 분위기가 편안하고 의료진 또한 친절하다. 물론 병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정신병동은 다른 병원에 비해 특수한 곳이다 보니 입원의 종류가 환자의 자발적 의사로 이루어지는 자의 입원, 환자와 보호의무자의 동의에 의한 동의 입원, 보호의무자 2명 이상의 신청으로 이루어지는 보호 입원, 시·군·구청장에 의한 행정 입원, 자·타해 위험이 급박한 경우 경찰과 혹은 보호자의 발견과 의사의 진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응급 입원이 있다. 가장 흔한 유형인 자의 입원으로 입원할 경우, 입원 뒤에도 환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퇴원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보통 입원 절차는 이것저것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지만 자·타해의 가능성이 심각한 경우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그야말로 위급 상황이기 때문. 실제로 자살을 기도한 경우가 아니라도 의사가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병원에 와 있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안정(폐쇄)병동이 답답해서 싫다면, 개방병동을 운영하는 병원도 있으니 알아보기를 바란다. 그런 걸 알아볼 여유조차 없다면 그냥 119에 전화를 걸어서 자살하기 일보 직전이니(물론 꼭 이런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데려가달라고 말하면 응급 입원 절차가 시작된다.
급한 게 아니라면 정신건강의학과 외래 진료 혹은 일반 심리상담센터를 이용하거나 지자체 정신건강복지센터 혹은 교내 심리상담센터를 방문하는 방법이 있다. 병원 진료와 일반 심리상담센터의 경우 비용이 발생하지만, 정신건강복지센터와 교내 심리상담센터에서의 상담은 무료라는 큰 장점이 있다. 전부 이용해 본 결과, 상담의 퀄리티는 병원이나 상담센터에 비해 정신건강복지센터가 떨어지니 금전적 여유가 부족한 학생이라면 교내 심리상담센터를 우선적으로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물론 개인적인 의견이니 참고만 하기를 바란다. 정신건강의학과와 일반 심리상담센터는 서로 다른 장단점이 있다. 정신건강의학과의 경우 비용이 비교적 저렴하지만 진료 예약을 잡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으며 상담이 짧은 대신 약물을 처방받을 수 있고, 일반 심리상담센터의 경우 긴 상담이 가능하지만 약물 처방이 불가능하고 비용이 한 회기당 7~10만원대 정도로 비싼 편이다.
길고 질 좋은 상담을 받고 싶은데 학생도 아니고 일반 심리상담센터가 너무 비싸서 고민된다면 대학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전공의 PT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전문의가 아닌 전공의 수련 과정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상담이기 때문에 회기당 3~4만원 정도로 저렴하다. 다만 교수님께 진료를 받은 뒤 PT를 받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또 전문의가 아닌지라 상담의 퀄리티가 복불복이다. 나의 경우 안 맞는 선생님은 한 번에 그만뒀지만, 잘 맞는 선생님은 2년 동안 뵙다가 선생님의 수련 과정이 끝나 어쩔 수 없이 상담을 종료한 경험이 있다. 이처럼 수련 기간의 제한을 받는다는 점 역시 단점이라 할 수 있다.
약함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가장 중요한 이야기와 함께 슬슬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 놓고 보니 할 수 있는 건 그야말로 다 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조차 흐릿한 세월 동안 끊임없이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다 보니 이 역시 내 삶의 일부임을 천천히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오늘은 살고 싶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내일 다시 죽고 싶어져도, 그다음은 장담할 수 없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다시 약해지지 않겠다는 다짐은 대개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 인정할 수밖에. 나는 약하다. 자주 흔들리고, 넘어지고, 죽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 다시 일어서면 되는걸. 넘어지는 게 아프다면 낙법을 배우면 된다. 물론 처음부터 넘어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편할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게 생겨 먹지 않았다. 그러니까, 결국 살아가는 거다. 이 약함과 함께.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며칠 뒤 면접에서 떨어져 죽음을 떠올리는 나 자신을 상상한다. 운이 정말 나쁘면 그때야말로 죽게 될 수도 있다. 그럼 이 글은 나의 유작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코인 노래방에서 목이 터져라 열창한 뒤 집에 돌아와서 쓰러지듯 잠드는 그날 저녁의 나도 상상할 수 있다. 며칠 뒤 병원에 방문하고, 약물의 용량을 높이고, 자연스럽게 다음 회사에 지원하는 나 자신 또한. 그렇게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 ‘이젠 자살하기에도 너무 늦었군’ 투덜대며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나를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