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는 삶이 바뀌겠지, 지금부터 내 삶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지겠지 하고 생각했던 - 또는 그렇게 되길 바랐던 - 순간들이 여럿 있었다. 삶의 분기점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순간들. 그러나 삶의 분기점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많은 순간들은 의외로 삶을 그리 크게 바꾸어 놓지 않았다. 그리고 전혀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 순간들은 예상치 못하게 끼어들어 순식간에 삶을 바꾸어 놓곤 했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으나 실은 달라지지 않은 것과,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으나 실은 달라진 것의 연속. 이전과 다를 바 없으며 동시에 결코 이전 같을 수 없는 것.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한 것.
<하나 그리고 둘>의 원제는
놀랍게도, 또는 예상했던 대로, 그 순간들이 지나간 후에 그들이 맞게 되는 결말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순간들이 있기 이전의 그들과 그 순간들을 겪고 난 이후의 그들은 결코 같지 않다. 그들이 도달한 ‘상태'는 이전과 같을지언정, 그들의 ‘속성'은 완전히 달라진다.
언뜻 이해하기 힘든 이 묘사가 영화를 모두 보고 난 이후에는 비로소 와닿게 된다. 같은 이야기가 시간을 건너 되풀이되고, 그 이야기들은 동일한 하나이기도 하며 동시에 전혀 다른 별개의 둘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세대에서 존재했던 사랑이 딸의 세대에서 같은 모습으로 새롭게 반복되듯이. 이야기의 처음과 끝이, 동일한 장소에서 진행되는 서로 다른 예식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듯이.
‘보는 것’, 그리고 ‘듣는 것’은 영화를 이루는 거대한 두 축이다. 봄은 객관적이요, 들음은 주관적이다. 현실이 그러하듯, 영화 속 수많은 인물들은 대개 ‘듣는 사람'이다. 자신이 들은 것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것을, 말하자면 하나를 듣고 둘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듣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막내 양양은 홀로 ‘보려는 사람’이다. 직접 보지도 않았으면서 자신이 들은 것으로만 판단하는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들을 수만 있고 볼 수는 없는 상태가 된 할머니에게 무언가를 ‘들려주는’ 행위가 무슨 소용이느냐고 묻는다. 아버지 NJ는 ‘듣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언제나 이어폰으로, 음악으로 외부로부터의 소리를 막는다.
보려는 사람이 보지 못할 때, 듣지 않으려는 사람이 비로소 들을 마음을 먹을 때 삶의 모습은 예상치 못하게 변한다. 어두운 시청각실에서 상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오직 천둥 소리만을 겹쳐 들었을 때, 양양은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수십 년 전 첫사랑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고 지금에 와서는 다른 언어를 쓰는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인 파트너의 말을 굳이 듣지 않으려 했던 NJ가 파트너의 노랫소리와 말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그리하여 첫사랑의 목소리를 비로소 들어 볼 마음을 먹었을 때, NJ에게는 ‘삶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지겠거니 믿게 만드는 순간’이 찾아든다.
대개 영화란 본다는 행위의 총체로 이루어진 개념이지만, <하나 그리고 둘>은 독특하게도 관객을 ‘볼 수 없는’ 자리로 이끈다. CCTV 화면, 유리창 너머, 스크린 따위의 간접적인 대상을 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장면이 영화 속에는 상대적으로 적다. 더불어 관객은 영화 내내 사건의 전말이나 실제 맥락을 결코 ‘명확히 알 수 없다’.
아디가 그의 전 애인과 헤어지고 새로운 아내를 맞이한 데에 누구의 과실이 있었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욕실에서 간밤에 벌어졌던 일이 아디가 정말로 죽을 마음을 먹어서 생긴 일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사고였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할머니가 아무도 없는 아파트를 나서 1층의 쓰레기장까지 내려간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뉴스에서 흘러나온 ‘살인사건의 동기’는 진실이 맞는지, 팅팅이 할머니의 무릎에 기대어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은 환상이었는지, 관객은 무엇 하나 또렷이 알 수 없다.
관객은 다만 들을 수 있고, 들은 바로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들은 것으로 판단하기를 거리끼지 않고, 스스로의 뒤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영화 속의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무수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 그리고 둘>의 화면 전반에는 그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 특유의 먹먹한 색감이 살아 있다. 익숙함과 생경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타이페이의 모습은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 스크린 너머의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 본 적도 없는 시대와 장소에 향수를 느끼게 한다.
모든 것이 보이지만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하나이지만 동시에 둘인 현대의 고전 <하나 그리고 둘>은 다가오는 12월 31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한 해의 마지막 날과 그 다음 해의 첫날이란 말하자면 ‘삶이 이전과는 달라지겠거니 믿게 만드는, 그러나 이후에도 실제로 그리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순간의 한 종류다. 새로운 해의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삶의 분기점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삶을 바꾸지 못하는 순간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삶에 끼어들어 삶을 바꾸어 버리는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나이자 동시에 둘인 이 시기에 그와 꼭 어울리는 <하나 그리고 둘>의 이야기를 만나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