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멜로디’는 이미 전부 등장해 버렸다는 말이 있다. 최근 대중음악 작곡가들이 고민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것보다, 어떻게 창의적으로 재탄생시킬 것인가의 문제에 가까워졌다. 이 과정에서 최근 자주 이용하는 기법 중 하나가 바로 ‘샘플링’이다. 케이팝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샘플링은 사실 20세기 후반 힙합 문화에서 시작된 기법이다. DJ들이 바이닐 레코드를 턴테이블이나 믹서 등을 통해 재생하며 새로운 음악을 만든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후 힙합을 넘어 전 장르로 확산되었으며, 최근에는 20세기 팝 등을 샘플링하는 방식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
다양한 샘플링이 등장한 21세기에도 클래식 샘플링은 다른 장르와는 다른 독특한 효과를 낸다. 클래식은 방대한 길이, 복잡한 구조, 정교한 화성으로 인해 대중음악보다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케이팝에 샘플링되는 클래식 음악은 곡 전체를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짧고 인상적인, 어디선가 들어본 몇 마디를 곡의 처럼 사용한다. 클래식의 질감과 분위기는 유지하되, 사람들이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케이팝에 흡수된 클래식은 대중음악 청자로 하여금 새로운 감상 경험을 제공하고 곡에 자연스러운 깊이감을 더한다.
ATEEZ - WONDERLAND (Symphony No.9 "From The Wonderland")
ATEEZ - WONDERLAND (Symphony No.9 "From The Wonderland")
Symphony No. 9 Op. 95 “From The New World” Mov. 4
에이티즈(ATEEZ)의 「WONDERLAND (Symphony No.9 "From The Wonderland")」는 안토닌 드보르자크(Antonín Dvořák)의 「Symphony No. 9 Op. 95」중 4악장을 샘플링했다. ‘신세계 교향곡’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은 ‘From The New World’, 즉 ‘신세계로부터’라는 명칭을 지녔다. 에이티즈의 기존 곡인 ‘WONDERLAND’는 이를 샘플링하며 ‘From The Wonderland’라는 이름을 함께 붙였다. 클래식 샘플링이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클래식의 존재감이 너무 강하면 곡을 압도해 버리고, 너무 흐릿하게 담기면 굳이 클래식을 샘플링한 의미가 퇴색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곡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조성을 포함한 원곡 그대로를 녹여냈음에도, 에이티즈라는 그룹의 강한 콘셉 덕에 원곡의 웅장함에 압도되지 않은 좋은 예시라고 생각한다.
여자친구 - 여름비 (SUMMER RAIN)
여름비 (SUMMER RAIN)
시인의 사랑(Dichterliebe) Op. 48: No. 1, Im bunderschönen Monat Mai
여자친구의 「여름비 (SUMMER RAIN)」는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의 「시인의 사랑(Dichterliebe) Op. 48」중 첫 곡인 ‘아름다운 5월에(Im bunderschönen Monat Mai)’를 샘플링했다. 여름비는 가곡의 피아노 반주를 전주와 간주에 사용함으로써 슈만 특유의 서정적이고 애틋한 정서를 여자친구의 감성에 맞게 결합시켰다. 멜로디를 직접 차용하기보다는 피아노 반주만을 배치하는 절제된 방식으로 동화 같은 몽환적 감성을 완성했다.
BLACKPINK - Shut Down
Shut Down
Violin Concerto No. 2 in B minor, Op. 7 Mov. 3
블랙핑크(BLACKPINK)의 「Shut Down」은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의 「Violin Concerto No. 2 in B minor, Op. 7」중 3악장을 샘플링했다. 크라이슬러가 편곡한 피아노 반주가 있는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유명하다. 이 곡의 부제가 바로 작은 종이라는 뜻인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 「Shut Down」은 힙합 느낌의 케이팝으로, 라 캄파넬라의 진행을 그대로 따라가기보다는 유명한 짧은 구간만을 반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때문에 원곡을 많이 들었었던 청자라면 곡 진행에 있어 약간은 정체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Shut Down」이라는 곡에 익숙해지면 다른 종류의 쾌감을 느낄 수 있다.
Red Velvet - Feel My Rhythm
Feel My Rhythm
Suite No. 3 in D major, BWV 1068: Air
레드벨벳(Red Velvet)의 「Feel My Rhythm」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Suite No. 3 in D major, BWV 1068」중 Air(아리아), 흔히 한국에서 ‘G선상의 아리아’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곡을 샘플링했다. 이 작품은 특유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평화로운 느낌으로 인하여 이전부터 많은 분야에서 활용되어 온 바 있다. 레드벨벳의 우아한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현악기의 다채로운 사운드가 신비로우면서도 낭만적인 감성을 선보인다. 특히나 곡 자체가 고전의 재해석을 표방하고 있기에, 명화를 오마주한 뮤비와 “오만과 편견”이라는 가사가 바흐를 샘플링한 음악에 더해져 전체적인 균형을 잡았다. 원곡의 화성 진행을 살린 편곡 또한 후렴 부분을 돋보이게 하며, 케이팝에서 클래식 샘플링이 성공한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Feel My Rhythm」 뮤비 속 밀레이의 『오필리아』 오마주
작곡가들은 이렇게 클래식의 매력을 추출해서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려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과거의 음악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감각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문화적 맥락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샘플링을 통해 사람들이 클래식을 더 자연스럽게 접하고 친숙하게 느낄 수 있다면, 이는 음악 문화 전체가 풍성해질 기회라 생각한다. 그것 또한 케이팝이 해낼 수 있는 멋진 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