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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주토피아2>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토피아의 첫 번째 이야기가 개봉한 게 벌써 9년 전이라니. 고백하자면 에디터는 9년 전, 살면서 처음으로 같은 영화를 극장에서 세 번씩이나 봤다. 그게 <주토피아1>이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어렸지만 마음이 통한 것에 찌르르 울림을 느끼는 법만은 잘 알고 있었다. ‘본편보다 나은 속담은 없다’라는 악담을 비웃듯, 개봉 첫날부터 흥행하고 있는 <주토피아2>를 보고 돌아온 새벽에도 그때와 비슷한 울림을 느꼈다. 분명 주토피아는 인간이 아닌 동물의 도시인데, 그 뒤로 자꾸 아는 얼굴들이 겹쳐 보였다. 디즈니 영화스러운 해피엔딩에는, 왠지 나의 세계도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초긍정적인 ‘게리-에너지’가 맴돌았다.
<주토피아2>는 첫 번째 이야기에 이어 경찰 콤비가 된 주디와 닉의 이야기를 다룬다. 파트너가 된 지 일주일째인 그들은 열정이 끓어 넘치지만,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서투른 마음만으로는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없음을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깨닫는다.
<주토피아1>이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의 공존에 대한 물음표와 그것을 개인과 사회가 대응하고 풀어나가는 과정에 집중했다면, 그 이후의 이야기인 <주토피아2>에서 등장한 키워드는 종의 다름이다.
각자 다른 동물들이 한 도시에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기후 장벽’이 세워지고, ‘함께(zoogether!)’를 외치는 주토피아에도 소외된 동물들이 있었다. 관객은 <주토피아1>의 이야기에서 주토피아 내부에 맞춰져 있던 시선의 각도를, <주토피아2>에서는 외부를 향해 조금씩 조정해 나가면서 그 외부를 똑바로 바라보게 된다. 주토피아가 세워진 이후 100년 동안 파충류는 주토피아의 일원이 되지 못하고 바깥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은, 이상적인 사회에도 이상은 없다는 걸 여전히 보여주고 있는 실제의 모습과 닮아있다.
<주토피아2>는 주토피아의 외부에서 내부의 편견과 오해를 견뎌온 파충류, 그중에서도 뱀인 게리가 기후 장벽 개발과 관련한 가문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다르다’는 말을 반복하고, 등장인물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어쩌면 그 다름에 대응하는 법이 이 두 번째 이야기가 강조하고 싶은, 우리가 이 세계를 살아가며 지녀야 할 소중한 가치일 수도 있겠다.
Zoogether를 꿈꾸며
게리의 증조할머니에게 누명을 씌우고, 주토피아 밖으로 파충류를 밀어내며 영역 확장을 꿈꾸는 링슬리 가문을 피해 게리를 돕는 과정에서 주디와 닉은 갈등을 맞이한다. 충분하지 못한 대화 때문일 거다. 닉의 “어쩌면 우린 너무 다를”지도 모른다는 말에, 두 인물 모두 충격에 휩싸인다. 대사로 옮기진 않았지만 둘의 눈에 비친 절망감은 아마 다음과 같지 않을까. 나와, 너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그건 주디와 닉이라는 두 개인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100년 전 주토피아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포유류와 파충류, 함께 살기엔 너무 다른 것이 아닐까”라며 특정한 동물들이 공존의 장 밖으로, 더 외부로 밀려 나가기 시작한 그때와 지금은 변한 것 없이 닮아있다.
가족과 달라질 수 있다며 링슬리 가문의 포버트를 회유하는 주디의 말에 그는 대답한다. “나는 달라지고 싶지 않다”고. 그는 가족과 달라지는 것이 극도로 싫고, 그리하여 집안의 인정을 받기 위해 범죄를 서슴치 않게 저지르고, 결국엔 가족과 함께 감옥에 갇힌다. ‘다름’없이, 함께. 영화는 포버트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 것 같다. 과연 완전히 같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법일까?
파충류의 귀환과 게리 가족의 누명을 벗기는 것을 위해 힘을 합친 주디와 닉, 니블스에게 포버트는 묻는다. 그건 너희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걔네(파충류)의 일은 포유류인 너희와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닉은 그런 너희와 우리를 돌아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얘(게리)에게는 중요한 일”이라고.
우리가 각자 다르기에 생겨나는 갈등을 인지할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대화를 통한 이해와 공감이다. <주토피아2>는 그것을 주디와 닉 개인 사이의 파트너쉽에 대한 갈등으로, 또 오랫동안 외부로 밀려났던 종에 대한 사회의 이면으로 보여준다. 개인과 사회는 같은 듯 같지 않은 듯 비슷한 얼굴을 하며 평행선을 걸었다가, 어느 날엔 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다양한 기후에서 사는 각양각색의 동물들이 기후 장벽을 통해 하나의 주토피아라는 도시에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기후 장벽이 모든 기후를 받아들이고 각자가 각자의 기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장치했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기후나 하나의 동물이 모든 걸 책임지고 모두가 같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공존은, 때로는 같아지는 것이 아닌 모두가 다른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영화는 말하고 있다.
Permission to hug? (안아도 될까요?)
우리는 다르기에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건 분명 나쁜 것이 아닐 테다. 변온동물인 게리가 정온동물인 주디와의 포옹hug을 통해 온기를 공유했기 때문에,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파트너쉽 갈등을 겪던 주디와 닉이 각자의 사정을 토해내듯 고백할 때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게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너와 내가 만나 서로를 공유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세계는 조금 더 다정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주토피아의 두 번째 이야기를 보고 돌아서 나오는 우리는 이런 말을 되뇌게 된다. 조금 다른 너와 너희, 그리고 내가 공존하는 이 세계를 향해. 서로가 서로를 안아줄 만큼의 온기를 허용하길 바라며. Permission to hu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