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상에 반드시 올라가야 하는 네 가지 과일, 대추, 밤, 배, 감이 있다. ‘조율이시(棗栗梨柿)’라는 심오한 이름을 가진 4인조 중에서도 단연 감은 오묘한 매력의 존재감을 지닌다.
감은 숙성 정도에 따라 떪은 감과 단감으로 나뉘며, 그로부터 다양한 파생종이 생겨난다. 초반에는 떫고 덜 익은 감이 점차 숙성되며 달달하고 물렁해지는 점에서 반전 매력을 지닌다. 감은 어찌 보면 가족이 내포한 의미와 꼭 맞는 과일 같다. 그래서 제사상에서 빠질 수 없는 과일일지로 모른다.
언제나 단단한 버팀목처럼 존재할 것 같던 웃어른들은 시간이 지나 물러지고, 연약해진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똘똘뭉쳐있던 식구들은 가족이기 때문에 쉽사리 멀어지고,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영화 <고당도>에 감이 등장하는 이유 또한 감이 가진 오묘한 속성 때문이라고 짐작해본다.
<고당도>는 그 누구도 선택할 수 없는 관계, 핏줄로 엮인 ‘가족’에 대한 심도 깊은 탐구가 몰입감 넘치는 서스펜스와 블랙코미디로 어우러진 고진감래 가족희비극이다. 단편영화 <굿바이! 굿마미>, <조의>, <개꿀> 등으로 국내외 다수의 영화제에서 일찍이 주목받은 신예 권용재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오는 11월 27일 개막하는 서울독립영화제2025 페스티벌 초이스 부문 장편 쇼케이스에서 첫 공개를 앞둔 작품이다.
영화의 제목 ‘고당도’는 부조에서 사용하는 한자 ‘고(故)’와 도달하다의 ‘당도’가 합쳐져 탄생했다. 아직 당도하지 않은 부고를 미리 앞당긴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유쾌하면서도 서늘한 의미를 지닌다. 동시에 한자 ‘고(故)’는 고향이라는 단어에도 쓰인다. 즉, 고향에 도달한 어떤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의미 또한 내포한다.
<고당도> 속 선영은 뇌사 상태로 수년째 의식 없는 아버지를 간병해 온 간호사이다. 그런 선영 앞에 아버지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고 남동생 ‘일회’의 가족이 나타난다. 일회의 가족은 이미 사채업자에게 쫓겨 도망을 다닌 지 오래다. 오랜만에 만난 남동생의 차는 더 낡은 모델로 바뀌어 있다. 돈이 없어 의대까지 붙은 조카 ‘동호’의 등록금을 내지 못해 의대 진학을 포기해야 할 지경까지 놓여있는 막막한 상황이다. 아버지의 임종을 앞둔 상황에서도 일회의 아내 ‘효연’은 미리 부고 문자를 작성해두기 바쁘다. 장례식으로 부의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후 효연의 실수로 미리 작성해둔 부고 문자는 지인 중에서도 가장 큰돈을 가진 ‘고모’에게로 발송된다.
운명의 주사위가 던져졌다. 답이 보이지 않은 불행 속에 있는 선영의 가족에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가 찾아왔다. 돈 많은 고모의 장례식 방문은 곧 조카 동호의 의대 등록금 마련이라는 희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선영은 가족의 미래를 위해 냉정한 판단을 내린다. 등록금을 위해 아버지의 장례식을 미리 치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선영의 지휘 아래 떫디떫은 가족의 일사불란 장례 사기극이 시작된다.
<고당도>가 당도하는 지점은 역시 가족이다. ‘가족은 무엇인가?’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관객에게 질문한다.
이 질문은 절연한 오빠의 장례식에 찾아온 고모의 넋두리에서도 등장한다. 고모는 소식을 받자마자 공항으로 향하던 차를 단번에 돌려 20분 만에 장례식장에 도착한다. 해외에서의 비즈니스 거래마저 무르고 술잔을 기울이며 이미 죽은 오빠와 가족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꺼내놓는다. ‘그렇게 지긋지긋해서 떠난 가족이 뭐라고 난 여기 와서 이러고 있지?’ 고모의 혼잣말은 앞에 마주 앉은 선영과 일회에게도 비수처럼 날아와 꽂힌다.
혼자서 의식 없이 병실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돌봄을 감당해야 하는 선영, 어쩌면 돌봄의 의무로부터 시작됐을지도 모를 채무로 인해 떠돌이 신세로 지내는 일회에게도 가족은 지긋지긋한 존재일지 모른다. 그런 아버지의 부고가 기울때로 기울어진 가족 상황에 회생의 기회로 작용한다는 기막힌 씁쓸함이 <고당도>가 가진 블랙코미디다. 대부분의 날, 차라리 죽었으면 싶은 각자의 아버지를 살리고야 마는 선영과 동호의 행동은 역설적으로 절실하다.
결국 가족은 그렇다. 친하면 어려운 처지여도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더니, 그 모든 가짜 장례식 소동을 거친 후 일회, 동호, 효연, 선영은 조촐한 감 한쪽도 나눠 먹는다. 앞의 모든 일들을 치러낸 후의 꼬질한 모습으로 말없이 감을 나눠먹는 네 식구를 보면 왜인지 모르게 뭉클해진다. 쿵쿵쿵 뛰는 아버지의 심장소리가 결국 가족의 '사랑'이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영화 <고당도>는 관객들에게 저마다의 가족이 가진 의미를 떠올리게 만든다.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 봤을 ‘가족’이라는 가깝고도 먼 집단을 향한 질문의 답은 좀처럼 내려지지 않는다. 무한한 가능성 중 조금은 우습고, 험난하고, 뭉클한 한 가족의 여정을 <고당도>를 통해 탐색해 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