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먼 곳- 박은지
멀다를 비싸다로 이해하곤 했다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정말 먼 곳은 상상도 어려웠다
그 절벽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어서
언제 사라질지 몰라 빨리 가봐야 해
정말 먼 곳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었다
돌이 떨어지고 흙이 바스러지고
뿌리는 튀어나오고 견디지 못한 풀들은
툭 툭 바다로 떨어지고
매일 무언가 사라지는 소리는
파도에 파묻혀 들리지 않을 거야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면 불안해졌다
우리가 상상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상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었고
거짓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은
상상을 벗어났다 우리는
돌부리에 걸리고 흙을 잃었으며 뿌리를 의심했다
견디는 일은 떨어지는 일이었다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래야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1. 거리를 둔다.
<정말 먼 곳>은 정말 먼 곳을 다루는 한편의 적적한 시처럼 느껴진다. ‘죽음’ ‘이별’ ‘이루어지지 못한 마음’이 영화 곳곳에 부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편에는 죽음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이를테면 할미양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이후 새끼 양의 죽음과 할머니 명순의 죽음을 재현한다. 특히 할머니, 명순의 치매증상은 중만, 문경에게 가족을 영영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안겨준다. ‘죽음’의 또 다른 이름, ‘이별’은 극의 모든 인물들이 겪는 아픔이기도 하다. 중만이 키우던 소를 우시장에 팔아넘기며 ‘섭섭하다’고 읊조리는 장면과 명순의 화장 장면은 여러 형태의 이별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동물과 사람, 사람과 사람 간의 이별뿐 아니라 닿지 못한 마음이 선연하다. 이들의 관계도는 영화 속 경사면으로 시각화되는데, 수평도 수직도 아닌 기울어진 땅에 발을 딛고 선 인물들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내내 휘청인다. 가령 문경이 진우와 현민을 발견한 이후에 배치된 쇼트를 보면 왼쪽부터 설과 할머니, 진우, 현민을 순서대로 담는다. 진우는 울타리 안쪽에 있는 설이를 보호하듯, 목장의 울타리에 망치질을 하고 있다. 다음 쇼트에서 진우가 현민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면, 그곳엔 진우를 올려다보는 현민이 있다. 현민은 진우를, 진우는 설이를 바라보는 이 구도는 각자 품은 마음이 서로 호응하지 못하는 관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또한 본편은 ‘거리 두기’를 통해 강원도 화천과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을 본다. 흔한 플래시백 없이 진행되기에 관객은 인물들의 과거를 알 수 없으며, 카메라는 극단적으로 인물과 거리를 두고 있다. 초점은 프레임의 모든 대상에 맞아 감독의 의도를 강요하기보단 있는 그대로를 조명하는 것에 가깝다.
‘거리 두기’ 기법은 영화와 관객의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 인물들 간의 관계에서도 작동한다. 중만이 블라인드 너머로 진우와 현민의 다정한 모습을 포착하는 장면과 문경이 한 침대에 누워있는 진우와 현민을 발견하는 장면에서 그러하다. 더불어 진우를 포함한 목장 가족들의 모습을 자동차 조수석에 앉아 응시하는 현민의 모습은 그들과 완전히 융화될 수 없는 심리적 거리를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정말 먼 곳>은 먼 곳에 대해 말하고, 그 사이 간격을 조명하는 영화다.
2. 거리를 허문다.
그러나, <정말 먼 곳>은 거리를 포착하는 방식으로 거리를 허무는 것에 가깝다.
우선 영화는 죽음과 생의 거리를 좁힌다. 영화의 전체 구조는 죽음에서 시작하여, 탄생으로 끝맺는 수미상응 구조로 죽음을 상징하는 명순과 탄생을 상징하는 설이를 한 프레임에 담아낸다. 또한 명순의 죽음 이후,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양들과 눈, 그리고 식혜는 명순의 영혼이 되어 남겨진 이들을 위로하고 있다. 죽음과 이별로 가득한 공간에 살아 숨 쉬는 호흡을 불어 넣는 영화는 명순과 설이의 애틋한 우정만큼이나 생과 죽음의 거리를 좁히고 있는 것이다.
명순과 설
동시에 본편은 언어와 언어가 재현하는 이미지 사이의 거리를 지운다. 예컨대 영화의 초반, 설이 죽어 있는 양을 발견하곤 진우를 부른다. ‘엄마’ 하고 힘껏 외치면, 다음 장면엔 엄마가 아닌 진우가 있다. 그 순간 관객이 상상하던 엄마의 이미지는 진우로 대체된다. 설이 진우를 엄마라고 부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엄마인 은영이 부재했고, 그 자리를 진우가 채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은영을 포함한 주변 인물들은 설이 진우를 ‘엄마’라 부르는 것에 대해, 여성이 아닌 남성이 엄마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불편하다고 말한다.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현민의 수업 시간이다. 극 중에서 현민은 시인으로, 작은 성당에서 시를 가르치는 수업을 연다. 첫 번째 수업의 목적은 목적어와 서술어 사이에 존재하는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다. 현민은 ‘휴대폰’과 연관되는 서술어 ‘꺼낸다’ ‘넣는다’ ‘던진다’ ‘부숴버린다’를 나열한 다음, 곧바로 ‘휴대폰’의 자리에 ‘가을’을 넣는다. 그럼, 평평했던 문장이 ‘가을을 꺼낸다’ ‘가을을 넣는다’ ‘가을을 던진다’ ‘가을을 부숴버린다’라는 재미있는 문장이 되어 우리를 간지럽힌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아주 멀리 있다고 생각한 곳이 실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생각. 어쩌면 ‘거리’를 만드는 것은 사회가 규정하는 언어, 사람들의 시선, 먼 곳(낙원)을 바라보는 사이 놓쳐 버린 현재에 있다. ‘엄마’는 단지 설이 진우를 부르는 호칭으로 ‘휴대폰’과 ‘가을’처럼 계열체적 속성을 띨뿐이다.
진우가 현민을 찾아, 더는 먼 곳으로 떠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완벽한 낙원은 없을지라도, 완벽히 무너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서 가을을 꺼내고 넣고 던지고 부숴버리며 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