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Essay] 초록의 잔상

마지막 칸 초록

by 이유빈 에디터
2025.11.30 10:57

 

 

"오늘도 많이 웃으시고, 행복한 여름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작년 5월, 부산행 KTX가 대전역을 지나던 참이었다. 어느 역무원이 승객들의 행복을 빌었지만, 객실의 그 누구도 화답하지 않았다. 엷은 미소와 주름진 표정 여럿이 기차 칸을 채울 뿐이었다. 새벽부터 기차에 몸을 실은 탓일까. 햇볕 아래서 착실히 건조되고 있었다.


행복, 겨우 두 음절밖에 되지 않는 소리가 그렇게 어색할 수는 없었다. 괜히 입꼬리를 올려보기도 하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기를 반복했다. 캐리어에 허겁지겁 챙겨간 옷처럼 어정쩡한 모양으로 좌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유쾌하지 않았다. 더 나은 미래를 꾸려야 한다는 초조함이 목구멍에 걸린 채로 있었다.

 

창밖을 바라봤다. 풀숲이 쏜살같이 흘러갔고 짙은 초록은 선명한 잔상으로 남았다. 잎새들을 조금 더 오래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기차는 터널로 진입해 버렸다. 마지막 여름방학이 급작스레 시작됐다. 재미난 일을 꾸려 볼 겨를도 없이.

 

그로부터 한 달 뒤, H에게서 얼굴을 보자는 연락이 왔다. 어릴 적부터 같은 교회를 다녔지만, 좀체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H가 다니던 학교는 모교와 30분 거리여서 5호선을 타고 만나려면 언제든 만날 수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나의 휴·복학과 H의 졸업 연주…. 시기가 엇갈려 심리적 거리는 미적지근했다.

 

 

KakaoTalk_20251129_221353462.jpg

 

 

거리를 좁힌 것은 다름 아닌 H의 사진이었다.

   

그 친구는 사진에 소질이 있었다. 특유의 서늘하면서도 온기를 품은 색감을 좋아했기에 가끔은 H에게 사진 파일을 보내달라고 부탁하곤 했었다. 어떤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지, 따로 엽서를 만들 계획은 없는지도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여느 때처럼 사진의 초여름 분위기가 좋다고 말하던 그때, 안국에서 H를 만났다. 능소화가 피면 무더위가 시작된다지. 마침,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약속 장소까지 가는 길에 능소화가 피어 있었고, H에게 능소화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볼 수 있었다.

 

더운 날씨에 대화가 전부 녹아서 아스팔트에 눌어붙었다. 꽃이나 사진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능소화의 주황만큼이나 기억에 선명한 단어는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가치관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물어봤을 때, H가 꺼낸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문제의 원인은 사랑이 부족해서”라고도 덧붙였다. 맞는 말이다. 오래 참고, 온유하고…. H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을 흉내 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온전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매년 여름에 보는 계절 친구가 되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얼그레이 밀크티를 좋아해도, 새로운 카페를 가보자고 말해도 괜찮은 사람. 여름이면 너와 내가 살아온 다른 삶을 늘어놓고 하나씩 마셔도 좋을 텐데.


그 이후에는 사진전을 종종 보러 다녔고, 그때마다 인상 깊은 작품 이야기를 나눴다. 올해 여름도 H를 만났다. 이쯤이면 봄 친구, 가을 친구…. 사계절 친구라고 이름을 바꿔 불러야 하지 않을까. 성탄절을 약 한 달 앞두고 역무원의 인사를 다시 떠올렸다. 여름 방학은 진작에 끝났다. 뿌옇게 흐려진 차창은 야윈 초록을 덮었지만, 그래요. 사계절 친구들, 계절을 함께 살아낸 모두, 오늘도 많이 웃으시고, 행복한 겨울 보내세요.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