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거슬리는 여름

글 입력 2023.08.11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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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네시 반이었다. 무려 네시 반. 세시 반만 됐어도 이렇게 짜증나진 않았을 거다. 다섯시 반이었으면 더 짜증 났을 수도 있긴 하겠다. 엄청나게 맛있는 무언가를 먹는 꿈을 꾸고 있던 것 같은데, 앵앵거리는 소리가 하늘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닌지라 서서히 잠에서 깨어버렸다. 물속에서 내려갈 수 있는 만큼 힘껏 내려가 죽은 듯이 잠수하고 있다가, 다시 수면으로 향해 올라오는 것처럼. 침잠해 있던 몸이 천천히, 둥실둥실 떠오르는 느낌으로다가. 매번 꿈에서 깰 때마다 느끼는 기분이지만 참 묘하다.

 

겨우 눈을 뜨곤 베개 밑을 휘저어 폰을 찾았다. 잠금화면에 떠 있는 4와 32. 그리고 감쪽같이 사라진 소리. 앵앵. 분명 방금까지 들렸는데.

 

출근 전에 온갖 물구멍과 방충망을 확인해보았지만 모기가 들어올 구멍은 없었다. 어제 택배 상자를 집어넣느라고 현관문을 잠깐 열어둔 틈에 들어온 걸까. 그렇다면 정말 잽싼 놈이다. 그래서 잡지 못한 건가. 하지만 아침의 불쾌함을 출근 뒤의 오전, 점심까지 이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선 잠부터 깨야 할 것 같았다. 메일을 읽으며 반숙란 두 개를 먹고 난 뒤 커피를 내렸다. 얼음은 가득, 샷 두 번. 그리고 물은 적게. 진한 농도로 퍼지는 맛을 힘껏 음미하고 있는데. 지이잉. 아 피곤해. 밝아진 잠금화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이잉. 어떻게 집 왔는지 기억이 안 나요. 지이잉. 머리가 너무 아프네. 10초가 지났을까, 화면이 꺼졌다. M이었다. 괜히 꼴 보기가 싫어 알림을 지웠다. 커피 덕분에 컨디션이 훨 나아진 참이었는데.

 

어제저녁부터 술 마신다고 연락이 끊겼던 터였다. 읽씹을 해볼까 생각하다 이내 말았다. 유치하게 굴지 말자. 내 사람도 아니니까. 누구랑 놀았든 내 알 바가 아니다. 혼자 마셨다고 하지만 거짓말이라 해도 나는 알 길이 없다. 하여간 쓰레기 같은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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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결국 13분 만에 답장하고 말았다. 왜 기억이 안 나요? 시치미를 뚝. 무슨 핑계를 대볼지 떠본다. 그러고 덧붙여 보고 싶었다. 내 기분을 배려하기는 하는지, 내 생각을 하기는 하는지. 하지만 명확한 대답이 돌아올 리 없음을 알기에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다. 또 그 특유의 가식적인 웃음으로 넘길 게 뻔하니까. 개자식..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사람인 척, 세상에서 제일 순박하고 순진한 척, 제일 착한 척. 사람 물 먹이고 짜증 나게 하는 데에는 도가 텄으면서. 엿 먹이는 데에는 천재라 대화하자면 짜증만 나서 길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싫었다. 두 귀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들 천지였지만, 입천장에 붙은 말들을 녹여 삼킨다. 이상하게 목에 뭐라도 걸린 기분이다.

 

그럼에도 M과 계속 연락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M이 보여준 사진들이 좋아서. 본인이 작업했다며 보여준 사진들이 너무 좋았어서. 그 몇 장의 사진들로 나는 M과 내가 잘 통할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이 모든 농락을 참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까짓 사진 따위 단순한 우연으로 내 취향에 너무나 잘 맞았던 것일 수도 있지만, M과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과의 것과 확실히 달랐다. 어쩌면 내가 오랜 시간 M의 손을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고 근거 없는 믿음. 이단과 딱히 다를 게 없었다. 네까짓 게 뭐라고 내 신앙이니. 웃기다.

 

실없이 코웃음을 치는데. 지이잉. 한강에서 혼자 술 마셨어요. 알림을 또 지웠다. 열이 올랐다. 무릎 언저리가 가려워서 바지를 걷어 보니 빨갛게 부어있었다. 아. 집에 들어가는 길에 홈키파라도 사 가야겠다. 갑자기 무릎이 미친 듯이 가려워 벅벅 긁었다. 땡땡하게 부어오른 자국을 보고 있자니 짜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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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루가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바빴고, 소나기가 쏟아진다며 블라인드를 걷는 부장님의 말에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퇴근 30분 전이었다. 분명 아까는 해가 쨍쨍했는데 느닷없이 비라니. 지구가 아픈 게 맞구나, 하며 먼눈을 잠시 팔고 있는데. 지이잉. 비가 엄청 와요. 지이잉. 우산 갖고 올 걸. 2시간 만에 온 답장이었다. 꼴 좋다.

 

비 오는 날엔 모든 선이 뚜렷해진 세상을 구경하는 게 묘미인데, 엄청난 폭우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선을 지워버렸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추적거리는 정류장을 거쳐 쾌쾌한 버스에 올랐다가 철벅거리며 내렸고, 겨우 쾌적한 집에 들어섰다. 복도에는 각 세대들의 우산이 펼쳐져 있었다.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이웃들이었지만 다들 낮에 생활하는 것 같아 이유 모를 동질감이 들었다. 색색 우산의 대열에 내 우산도 한자리 만들어 주고 현관문을 닫았다. 지이잉. 그런데 비 오니까 술 생각 나. 지이잉. 혹시 오늘 저녁에 뭐 해요? 정말 답 없는 사람이다.


신발을 벗다 퇴치제 사는 것을 깜빡하고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어딘가 앉아 편히 쉬고 있을 모기를 생각하니 짜증이 확 올랐다. 신발을 벗고, 가방을 던져놓고, 시계를 풀고, 목걸이도 풀고, 물 한 잔 마시고. 그리고 알림을 눌렀다. 오늘 몇 시 퇴근인데요? 나도 참 볼썽사납다. 바깥을 보니 그새 비는 그쳐있었다. 변덕이 심한 것이 꼭 내 마음 같다. 널려있는 수건들을 주워 빨래통에 넣는데, 흰 냉장고 문에 붙어있는 모기가 눈에 들어왔다. 잽싸게 손을 날리자 새벽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놈치고는 꽤 쉽게 잡혔다. 손바닥을 보니 피가 조금 묻어나왔다. 무릎을 다시 보니 조금 빨갛기만 할 뿐 부기는 없었다.

 

다만 모기 자국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편이라 신경이 쓰였다. 이번 여름에 물린 모기 자국들은 전부 옅은 갈색 반점이 되어 한 달도 넘게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낮에 꽤 부어올랐던 것을 보면 자국이 오래 남을 것만 같았다. 이번 여름은 지나야 사라질 텐데. 이 여름이 끝나기는 할까. 겨울도 없이 내내 더웠던 것처럼 구는 이 무더위는 언제 잦아들까. M은 겨울을 좋아한댔는데. 크리스마스에 같이 있을 수 있을까. 여름이 끝나지 않는 것도 좋겠다. 지이잉. 나 이제 곧 퇴근해요. 지이잉. 우리 집 쪽으로 올래요? 언제까지 이런 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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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씻고 거울을 보자 눅눅한 공기 탓에 가라앉은 머리가 보였다. 앞머리에 롤을 말고 옷장을 열었다. 내일은 주말이니까 편하게 입고 가야지. M의 집에는 어차피 저번에 두고 온 티셔츠도 있었다. 밴딩 반바지와 라운드 반소매를 꺼냈다. 신경 쓴 듯 안 쓴 듯, 적당하다. 부른다고 그저 반가워서 달려가는 주제에 자존심 세우는 것도 웃기지만, 티 나게 꾸민다면 M이 나를 갈수록 덜 찾을 것만 같았다. 이름 한번 제대로 불러주지도 않는 사람 뭐가 좋다고 헐레벌떡 달려가는 건지. 겨울 따위 사라졌으면 좋겠다.


화장이 꽤 잘 먹힌 것 같아 살펴보다 문득 생각이 나 상의를 올려보았다. 가슴팍 언저리에 상처같이 남았던 흔적은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M의 못된 습관 중 하나였다. 자꾸만 흔적을 새겨놓는 버릇은 괜히 소유욕처럼 느껴져 볼 때마다 언짢으면서도 몸이 달아오르곤 했다. 문득 나한테만 이랬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하고.


머리를 만지고는 나가려던 찰나 거울에 붙어있는 모기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어제부터 한 마리가 아니었던 걸까. 손을 휘둘렀지만 모기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앵앵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금방 멈췄다. 놈을 찾는 데에 혈안이 되어 천장과 벽을 훑어보는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택시였다. 아, 내려가야겠는데. 어디선가 또 애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젠장. 급하게 향수를 뿌리고는 밖으로 나섰다.


짜증이 잔뜩 올랐다. 대체 언제 들어온 거지. 나오자마자 높은 습도 탓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지이잉. 그럼 언제 도착해? 지이잉. 나 집 가서 샤워만 하고 나올게요. 지이잉. 너무 덥다.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택시에 재빠르게 올라탔다. 자꾸 땀이 났다. 토도독. 응.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집안을 유유히 배회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자꾸만 거슬렸다. 정말 언제 어느 틈으로 들어온 걸까. 방충망이 뜯어지기라도 한 걸까. 그러면 정말 끔찍한데. 이미 나와 버렸으니 잊는 것이 상책이건만 당최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성가신 것이 너무 많았다. 짜증을 돋우고 심기를 거스르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감도 오지 않는 것들. 내쫓을 방법도 없이 느긋하게 돌아다니는 것들. 자꾸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것 같아 열이 올랐다. 이마에 흥건한 땀을 손으로 닦았다. 한여름 밤의 열은 한번 들어차면 쉽게 빠지지 않는 법이라 피하는 게 상책인데.

 

언제, 어떻게 들어온 건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신호가 바뀌자 택시가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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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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