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성경에 잊혀진 엄마의 이야기 - 뮤지컬 피에타

성녀가 아닌 인간 마리아의 이야기
글 입력 2024.03.2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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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피에타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걸작, ‘피에타pietà’ 조각상으로 이야기의 서문을 연다. 조각상은 숨을 거둬 축 늘어진 예수와 그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형상을 하고 있다. 신의 뜻을 전하려다 악한 권력자들의 위협을 거스르지 못하고 희생된 예수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이 되어, 위와 같은 자세를 한 성모 마리아를 그림 또는 조각으로 묘사한 작품들은 ‘피에타’라는 가톨릭 미술 양식으로 묶이기도 한다.


그런데 피에타의 오랜 역사 동안, 인간인 마리아의 이야기에 집중해본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그 명성에 걸맞지 않도록 마리아의 이야기는 그다지 조명되지 못했다. 특히 ‘인간’ 마리아의 슬픔 등 인간적인 감정을 다루는 이야기는 신성한 대화에서 배제되었을지 모른다. ‘성모’ 마리아가 아닌 평범한 인간 마리아의 감정은 신화의 신비로움과 숭배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모라는 수식어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마리아를 조명한 작품이 뮤지컬 <피에타>이다. 뮤지컬이 진행되는 동안 마리아는 뮤지컬의 유일한 등장인물로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오로지 ‘엄마’라는 수식어만을 달고 등장하는 마리아를 통해 우리는 신성함이라는 베일을 거두고, 그녀의 수난기에 온전히 감정을 이입한다.  


아들의 어린 시절부터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담은 뮤지컬의 내용을 따라, 이제부터는 예수의 죽음이 의미하는 인간사의 부조리와, 그것이 인간 마리아에게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예수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품에서 아들로 지칭되는 예수는 ‘그분’의 뜻을 전파하던 중, 악한 권력자들과 사제들에게 반감을 사고 말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신이 이해하는 인간 종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예수의 죽음은 어리석은 인간의 구제 불능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축복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뜻을 품은 예수를 인간 세상으로 보냈으나, 실상 땅의 인간들은 그를 의심하며 절벽으로 몰아세웠다. 그러다 결국 끔찍한 희생을 눈으로 목도한 뒤, 성스러운 힘이 발현되고 나서야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와 예수의 뜻을 칭송하기 급급하다. 즉, 예수의 말(言)을 타고 그분의 뜻이 암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시체가 사라지는 기묘한 일을 피부로 겪고 나서야 사람들은 신성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의에 무심하고 가르침을 깨닫는데 둔한 인간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부조리한 사회구조가 기여한 결과이다. 여기서 부조리한 사회구조란, 정의롭지 못한 존재(로마와 유태 지배층, 곧 권력자)에게 민중을 다스리고 자신들의 뜻대로 부리며 그들을 처분할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이 정당화되는 계급체계를 일컫는다. 이때 권력자들이 ‘무수한 민중을 부리고 처분할 수 있게끔 하는’ 권력은 수식어의 피상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발현된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정의로운 세상을 주장한 예수를 헛된 이야기를 퍼뜨리는 사상불온자로 치부하여 벌을 내렸다. 예수의 주장을 이해하기에 앞서 권력자의 시선에서 어긋난 주장에는 죄목을 붙여버리곤, 그를 처벌하지 않을 수 없는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결국 예수의 뜻과는 무관하게 그를 처분하여 그가 지닌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탈락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와 같이 권력자에 의해 사회적인 매장을 당하는 사례를 몇몇 떠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작품의 주제 의식이 드러난다. 타인의 주장을 경솔히 평가하여 이내 매도하는, 마치 우리의 본능처럼 새겨진 어리석음, 그리고 악을 행하며 권력을 얻는 자들에게 힘을 부여하며, 혹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악(惡)도 행할 수 있는 자조차 끌어내리지 못하는 사회체계로 하여금 인간사에서 반복되는 부조리를 꼬집는 것이다. 


인간 사회가 지닌 이러한 부조리에 대하여, 극은 이렇게 답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인간을 상징하는 표상으로 기능하는 예수의 죽음 사건에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죽음이 결부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들의 부조리한 사회체제는 정의를 주장할 수조차 없게끔 만든다고. 그리고 그것은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인간사에서 수없이 되풀이된 비극으로 증명되었다.

 

 

 

엄마는 답하지 못한 질문


 

그렇다면 이제 불쌍한 여인, 마리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신의 전지전능함이나 예수의 신성성을 걷어내고 인간 마리아의 입장에서 진행된 본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는 너무나 가혹해진다. 


미혼모의 신분으로 축복을 받아 아들을 잉태하였으나, 그 아들은 신의 뜻을 품고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였으며, 결국 땅에서 하늘의 뜻을 실현하려던 아들은 무자비하게 처형되며 유일한 희망마저 잃고 만 여인. 


아이가 태어나 종알종알 옹알이하며 걸음마를 내딛는 아름다운 순간에 그녀는 자신의 서글픈 운명을 암시하는 독백을 내뱉는다.


‘아이가 어떻게 자라도록 가르쳐야 할까요. 정의롭게 살도록? 아니면 세상은 바뀌지 않으니 꾹 참으라고.’


바람직한 교훈이라면 전자의 뜻을 따라야겠지만, 가난하고 천대받는 신분으로 태어나 인간 세상의 추악함을 너무도 알고 있는 그녀가 아들에게 쉬이 그 길을 가르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어느 쪽으로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하느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운명이란 것은 그리도 절대적이라 거부하지 못하는 것이었을까. 그래서 그분께서는 일종의 암시를 주셨던 것일지도 모른다. 예수가 열두 살 되던 무렵, 도성으로 향했다가 악한 신제와 민중들이 가득함에 좌절하고 돌아오던 마리아가 아들을 잃어버렸던 것은, 헐레벌떡 아들을 되찾으러 돌아간 그곳에서 예수가 저녁놀을 맞으며 그리도 아름답게 빛나도록 지켜주셨던 것은, 어머니인 마리아의 뜻과 무관하게 아들로서의 예수를 떠나보내야 할 날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을 암시하는 최소한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인류의 영웅을 아들로 낳았다는 것은


 

마리아의 고민과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흘러서 운명이 기한을 독촉하듯 찾아왔다. 어머니가 답하지 못한 인생의 질문에 대하여 아들인 예수는 정의롭게 살 것을 결심하고 그분의 뜻을 전하기 시작한다. 


마리아는 좋은 세상에 대한 설교를 하러 고향으로 돌아오는 예수를 기다리며 가난한 살림에도 빵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과 나누며 재회의 기쁨을 함께한다. 악한 세상이 두려워 자신은 택하지 못한 길을 기꺼이 걷기로 한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의를 추구하던 길의 끝에서 끔찍한 비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의를 추구하며 뜻을 전하던 예수가 권력자들의 악한 손아귀에 휘말려 처형된 것이다. 영웅과 같은 예수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인 안중근 의사와 그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의 이야기가 연상된다.


예수와 안중근 의사, 마리아와 조마리아 여사 사이에는 묘한 유사점이 존재한다. 살던 시대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는 다소 차이가 존재하나, 결국 정의로운 세상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인물과 그들의 어머니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예수와 안중근 의사의 대의가 분명 죽음을 각오해야 할 큰 희생을 담보로 함에도 불구하고 두 여사는 기꺼이 아들의 삶을 응원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어머니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도리어 옷자락이든 발목이든 부여잡고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지 말아달라 호소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두 여사는 아들들이 평범하고 안전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로서의 기대를 내려두었다. 그리고 조마리아 여사는 독립운동을 펼치던 중 투옥된 아들에게 수의를 지어 보내고, 마리아는 정의로운 설교를 펼치는 아들을 가로막지 않았다. 이러한 두 여사의 뼈아픈 희생을 통해 인류의 영웅이 탄생할 수 있었다. 


영웅이 탄생하기 위해서 그 인물에게는 비인간적인 고통이 따르고, 강렬한 고통이 민중에게 가시적으로 보여질 때 그들은 정의를 수용하고자 한다. 그 까닭은 앞에서 언급한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은 기꺼이 희생의 숙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아마 두 여사도 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의를 실현하는 영웅이 되는 길에 끔찍한 희생은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를 위해서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품에서 떠나간 아들이 영웅으로 거듭나며 어머니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겪지 않을 고통을 평생토록 껴안게 되었다.  


그 결과로 예수는 그분의 뜻을 전파할 수 있었고 안중근 의사는 조선독립을 외칠 수 있었으며, 두 어머니는 인간 예수와 인간 안중근을 떠나보낸 대신, 위대한 공적을 쌓은 영웅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의미가 있었을까. 세상 무엇보다 귀중한 존재를 잃어버린 어머니에게 그 어떤 칭송이 족하겠는가. 예수의 죽음과 동시에 끔찍하게 울부짖으며 절규하는 극 중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우리 모두는 분명히 깨닫게 된다.

 

 

 

신이시여, 이 불쌍한 여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같이 예수를 끌어안은 마리아의 모습으로 극의 막이 내리고, 성경에 따라 기적처럼 일어날 부활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자연스럽게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되었다. 성경과는 달리 내가 극 속에서 보았던, 자신의 인간적인 감정을 아낌없이 드러내던 ‘인간’이자 ‘엄마’였던 마리아의 이야기를 말이다. 

 

마리아는 아들의 비극을 제지하지 못한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일반 사람이라면 겪지 않을 끔찍한 고통을 가슴에 품고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아갔을까? 수많은 궁금증이 떠오르지만, 답해줄 이는 없다. 


분명한 것은, 그 사건으로 하여금 그녀는 단순한 인간에서 성모라는 신분으로 상승하여 후대의 엄청난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인간 마리아로서 사후의 영광이 기쁜 일일까? 뮤지컬을 보고 나온 우리의 내면에서마저 마리아의 슬픔이 여실히 느껴지는데.


조각상 <피에타>와 뮤지컬 <피에타> 모두 같은 장면으로 서사가 마무리되지만, 인간 마리아의 서사는 이제 시작이다. 그녀는 아들을 지키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 아들을 죽인 권력자들과 민중에 대한 분노, 크나큰 상실감을 모두 짊어지고 남은 날을 살아가야 한다. 성스러운 존재지만 결국은 인간에 불과한 마리아에게 주어진 앞으로의 날들이 너무나 가혹하다.


교훈을 학습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들과 불의를 지속시키고 강화하는 사회구조의 굴레 속에서 희생된 자들이 예수 이후로도 얼마나 많을까. 마리아와 같은 방식으로 소중한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은 끔찍이도 많을 것이다. 권력과 부의 논리 아래 희생된 생명의 목록이 우리의 목을 조이고 있다. 


본 뮤지컬에 등장하는 마리아도 마찬가지다. 21세기의 관객을 앞에 두고 아이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간순간을 독백하며 설명하는 것은 참혹한 인간들에게 받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자신의 상상 속에서는 여전히 아들의 죽음이 반복되고 있으니까. 매 공연마다 서로 다른 관객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호소하며 아들의 죽는 순간을 되풀이하고 있을 뮤지컬 <피에타>의 마리아는 여전히 그 비극 속에 홀로 남아있다.

 

 

[서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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