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센터선재에서 진행 중인 지금 가장 핫한 전시,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를 관람하고 왔다. 대규모 장소∙환경 특정적 프로젝트라는 목적에 맞게 건물 전체를 하나의 생태계로 구축한 전시다. 전시를 관람하며 핵심은 바로 이러한 공간의 총체적인 그림이 시사하고 있음을 느꼈다. 아드리안은 이미 있는 건물이라는 인공적 조형에 자연물과 여러 아티스트들이 참여해 손수 제작한 작품들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현재와 과거, 미래를 한 데 재현했다.
전시 중간 중간 거대한 기계들이 시선을 사로잡지만, 그는 그것들을 "actors"라고 칭한다. 토양과 식물이 그저 전시 주제의 주변부만은 아니라는 소리다. 그동안 작품 하나 하나를 감상한 후, 의미를 종합해 판단하는 공식으로 전시를 관람해 왔기에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가 주는 경험은 무척이나 신선한 것이었다. 이에 건물을 하나의 시뮬레이션의 세계로 제공하는 전시를 말 그대로 '거닐며' 보고 느꼈던 감상을 천천히 소화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몰락 후에 발전이 오는가, 발전 뒤에 몰락이 오는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전시는 다양한 요소를 통해 불안의 감각을 끝없이 자극한다. 이는 전시의 시작부터 느낄 수 있는데, 지하 1층의 서늘한 공기와 어둠이 맞이하는 공간에서 전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벽면에 붙어있는 설명문의 텍스트는 읽기 어렵도록 먼지처럼 흩어져 바닥에 널려 있다. 시선을 돌리면 거미줄처럼 모든 좌석이 비닐로 랩핑되어 있는 강당이 있고 좌석을 비추는 조명 위에는 새의 둥지와 식물이 엉켜 있다.
적막한 공간이 부여하는 상상력은 많지 않았지만, 강하게 드는 이질감의 이유를 포착하려 애썼다. 곱씹어 보면 이질감의 정체는 전시 공간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공간 자체로부터 거절당한 듯한 감각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인간의 존재는 삭제된 지 오래된 공간에 깊숙히 침투해 둥지를 틀었던 새 몇 마리가 떠난 후의 시간이 빠르게 뇌리를 스쳤다. 이 공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생명체는 숨소리도 내지 않는 고요한 유기체인 식물 뿐이다.
초록색의 스산한 빛으로 가득한 계단을 올라 1층으로 향하면 그곳에는 콘크리트가 노출된 공간이 나온다. 1층의 테마는 다소 동시대적으로 느껴졌다. 미래적인 조형물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불안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닥에는 흙이 즐비하고 자라나고 있는 이끼와 식물, 여기저기 뒹구는 바위가 있고 그 사이에는 거대한 로봇 조형물 두 개가 있다. 가장 먼저 보이는 조형물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고 한 손에는 다비드 상의 팔을 쥐고 있다.
인공지능(AI)을 상징하는 듯한 이러한 조형물은 우리에게 익숙한 멸망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아드리안의 말마따나 통제할 수 없는 것(이끼나 바위 같은 자연물)들 사이에 이질적으로 존재하는 문명의 이기(利器)는 인류의 발전과 맞닿은 이미지가 아니다. 어쩌면 AI가 인간이 잘 가꾼 문명을 무너뜨려 원시 상태로 인류를 회귀시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우리에게 이러한 연출의 원천이 된 상상을 아주 쉽게 가능케 한다. 고로 이는 우리 머릿속에 현재 존재하는 이미지이자,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교차한 미래의 시뮬레이션이기도 하다.
여기서 고개를 돌리면 이러한 감상을 뒤집는 또 다른 연출이 나온다. 세탁기에 앉은 조형물의 모습과, 그 주변에 잎사귀와 줄기도 없이 뒹구는 수박과 호박의 이미지가 시야에 들어오면, 방금 전의 상상이 무색하게 "아무 의미 없다"는 감상을 받게 된다. 그것이 존재할 이유나 존재할 수 있는 이유, 혹은 이곳에 있는 이유조차 알 수 없는 오브제들을 보면서 사실 허무함을 가장 먼저 느꼈다.
그러다 문득 세탁기보다도 비대한 AI를 보며, 언젠가 세탁기 없이는 살아도 AI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세계가 올 것인지 궁금해졌다. 발전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전에는 토양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었던 근간이 발전을 위해 삭제되고, 지속가능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과실의 생산을 요구하는 세계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발전 끝에 몰락이 오게 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뻗어나갔지만, 이러한 질문을 이끌어내는 것을 반드시 의도한 공간은 아닌 것 같았다. 보는 이의 내면에서 다양한 질문과 충돌하며 이러한 풍경을 무엇으로 받아들일지에 대한 각자의 답이 있을 것이다.
혼란스러운 내면을 잠재우며 이동한 2층에는 화장실 앞을 붉은 LED 조명으로 내리쬐는 아주 좁은 복도와, 복도 바로 옆에 위치한 또 다른 넓은 전시 공간이 있었다. 거대한 조형에 가까이 다가가면 철골이나 기계 부품이 용접 등을 통해 정교하게 연결된 모습이 아니라 엉겨 붙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위로 군데군데 정체불명의 살점이 덮여 있기도 하다. 땅과 하늘이 뒤집힌 듯한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작품들은 적대감과 익숙한 오브제를 발견하며 느낄 수 있는 친근감을 동시에 안겨주고 있었다.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보며, AI의 최종적인 모습일 수도, 혹은 조악한 실패작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간은 AI가 한없이 정교해지기를 바라지만, 인간의 모습과 극도로 흡사해진다면 반드시 복잡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인간의 파편을 간직하면서도 결코 완벽해지지 말기를, 인간적이면서도 적대적이지 말기를 바라는 이 미묘한 욕망의 선 사이에서 탄생하는 AI는 어떤 모습일 것인가.
적의 존재를 통해 우리를 인식하고 발전해왔던 인간에게 AI는 적이자 동반자다. 반대로 생각하면 완전해지기를 바라는 인간의 의지에서 탄생한 AI에게 인간이 지닌 딜레마가 적이자, 발전을 이끌어낼 열쇠이기도 할 것이다. AI를 통해 인간은 자신이 입력한 인간의 모습이 사실은 온전히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AI는 상충하는 피드백의 홍수에서 다양한 모습을 덮어쓰게 된다. 그렇다면 AI는 멀끔한 모습이 아니라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형상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느 한편에서는 적의를 읽고, 다른 한편에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면을 읽어낼 수 있는 모습으로 우리가 이미 AI를 만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상상은 아니다.
이런 긴 상상을 펼친 후, 복도와 입구로 이어지는 디지털 공간에서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는 벽을 지나 3층으로 향했다. 전시의 마지막 공간인 3층 빈 방의 중앙에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 가공할 파괴력으로 인해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또한 인류를 눈부신 발전으로 이끈 것이 불이다. 우리의 적이자 동반자인 불을 바라보며 둘 중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이 옳았을까. 입구와 꽤 거리가 있는데도 그 너머로 뜨거운 열기를 전하는 불의 힘을 그저 느끼며 몇 분간 서 있다 전시 공간을 빠져나왔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는 언급했던 것처럼 여러모로 긴장감을 선사하는 전시였다. 전시에서 희망보다는 절망의 정서를 더 강하게 느꼈고, 인간의 흔적은 있지만 인간의 완전한 원형을 찾을 수 있는 요소는 부재하다시피 한다. 다만 그렇기에 적대감으로 날이 선 감각으로 전시에서 더욱 샅샅이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가능했다. AI와 대결하는 동시에 AI를 친구로 두는 이 시대에, 이 모든 행보가 어쩌면 몰락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도 AI와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는 전시를 통해 이러한 고민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고 있었다.
언젠가 이러한 고민이 다음 식사 메뉴에 대한 고민과 같이 하루에 한 번 이상 자신에게 묻는 문항이 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