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런던 동부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파크(Queen Elizabeth Olympic Park)에 이색적인 문화공간이 열렸다. 바로 V&A East Storehouse(이하 East Storehouse)다. Storehouse는 ‘수장고’라는 뜻으로, 2015년 빅토리아 시대 수장고였던 Blythe House 매각이 영국 정부로부터 발표되며 새로운 보관 계획을 세워야 했던 V&A가 런던 동부 문화권 지역 사회와의 확장을 도모하며 설립한 곳이다. 2012년 올림픽 미디어센터 건물을 재활용했다. 사우스 켄싱턴(South Kensington)에 있는 본관이 역사적 건축물과 전시 중심의 전통적인 박물관으로 방문객들을 맞이한다면, East Storehouse는 박물관이 전시를 준비하고 소장품을 관리하는 과정 뒤편의 모습들을 보여주며 방문객들에게 다가간다.
East Storehouse가 추구하는 가치는 ‘일하는 박물관(Working Museum)’, ‘디자인의 영감(Sourcebook of Design)’, ‘이야기의 수집(Collecting Stories)’ 3가지다. ‘수장고’라는 키워드답게 ‘일하는 박물관’을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공간들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일반적인 전시 공간들과 다른 East Storehouse만의 소장품을 보여주는 방식들을 통해 이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영감, 수집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알 수 있었다. 방문기를 통해 East Storehouse가 앞서 소개한 세 가지 키워드로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을 탐험해 보자.

East Storehouse 수장고 로비 전경. 출처: 직접 촬영.
일하는 박물관, 작품 뒤편의 현장을 전시하다
‘수장고’라는 형태로 작품을 보여주는 공간이 East Storehouse가 최초는 아니다. 이전부터 국내외 여러 박물관에서 대중들에게 새로운 관람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개방형 수장고를 운영해 왔다. 한국에도 청주 국립현대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열린 수장고 등이 있다.
East Storehouse는 'Working'이라는 키워드를 강조한 기관답게 곳곳에서 박물관 직원들의 현장을 엿볼 수 있었다. 수장고의 문을 열고 통로를 쭉 따라가면 전체 공간이 한눈에 보이는 중앙 로비가 있으며, 그 중앙에는 방문객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넓은 유리 바닥이 있다. 이 유리 바닥 너머에는 V&A의 소장품 관리자들이 실제로 업무를 수행하는 지하 공간이 있다. 일반인들은 출입할 수 없는 대신 로비에서 이들의 현장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소장품과 직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리 바닥이 생각보다 넓고 무서워 오래 서 있지는 못했다. 출처: 직접 촬영.
로비부터 소장품을 둘러보며 3층의 한 구석진 방에 다다르면, 본격적으로 보존 활동이 이루어지는 ‘Conservation Overlook’이라는 스튜디오를 찾아볼 수 있다. 유리창을 통해 본격적으로 복원 업무를 수행하는 현장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처음 보는 장비들과 함께 세탁기, 다리미 등 익숙하지만 보존 업무에 사용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도구들도 있어 친근함이 느껴졌다. 작업 중인 작품 위에는 흰 천이 덮여있는데, 운이 좋으면 직원들이 실제로 작업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고 한다.

Conservation Overlook 구역 전경. 사진에 담기지 않은 왼편 사각지대에 한 보존 연구원이 길쭉한 중국 현악기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출처: 직접 촬영.
일하는 박물관, 작품 뒤편의 과정을 전시하다
East Storehouse의 ‘Working’이라는 컨셉은 생생한 현장성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일부 소장품의 보존 방식, 사용되는 도구, 참여하는 인력들에 관한 이야기로 현장에서 볼 수 없는 전시 공간 뒤편의 과정을 보여준다. 국내외 대형 박물관들을 방문하면 어떻게 가져와서 관리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소장품들이 있다. 가령 어떤 신전의 벽면이라든가, 어떤 건축물의 기둥 같은 것들 말이다. East Storehouse에도 비슷한 유형의 소장품 ‘Torrijos Ceiling(토리호스 천장)’이 있다. 중세 시대 스페인에서 지어진 성의 천장으로, 이슬람 문화권이 중세 스페인의 공예 양식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소장품이다.

Torrijos Ceiling, 누워서 천장을 볼 수 있는 편한 의자가 마련되어있었다. 원래 천장이 있었던 성의 소유주가 재정 악화로 판매를 결정했을 때 매입된 것으로, 약탈문화재는 아니다. 출처: 직접 촬영.
여기서 East Storehouse는 두 층에 걸쳐 천장의 디자인뿐만 아니라 그것이 유지하고 있는 겉면도 보여준다. 천장의 내부를 볼 수 있는 공간의 한층 위를 올라가면, 여러 조각의 나무 천장을 하나로 조립하기 위해 설계된 나무 구조물이 있다. 측면에 부착된 소개문으로 구조물 설계하고 설치하는 과정에서 목수, 건설업자, 엔지니어 등 목재에 전문성이 있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으며, 작업에 사용된 실제 도구들도 함께 살펴볼 수 있었다. 박물관에서는 소장품의 뒷면을 볼 수 있는 경우가 흔하지 않아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오랜 시간 머물며 구조물을 구경하고 있었다.

Torrijos Ceiling의 설치를 유지하고 있는 나무 구조물이다. 출처: 직접 촬영.
박물관, 영감의 원천이 되다
East Storehouse의 두 번째 가치는 박물관이 수많은 창의 산업 종사자들에게 영감을 제공하는 자료집(Sourcebook)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전시’된 것이 아닌 ‘보관’된 형태로 접하게 된 소장품들은 그 조명과 배치 방식에 있어 전혀 다른 인상을 주었다. 물류창고처럼 놓여있는 소장품들과 그 사이로 보이는 철근 보관고는 그 공간 자체로 색다른 전시 공간이었다.

수장고 내 소장품 틈새. 가구와 작품들이 빽빽하게 놓여있다. 출처: 직접 촬영.
그러나 East Storehouse가 영감을 전달하고자 하는 방식은 색다른 공간에 방문객들을 초대하는 것만이 아니다. V&A는 East Storehouse를 포함하여 최소 2주 전 사전 신청을 마치면 실물 소장품을 가까이서 여러 각도로 살펴볼 수 있다. 작품의 안전 관리 차원에서 만 16세 이상부터 가능하다는 나이 제한이 있지만, 박물관 관계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별도의 심사없이 개별 소장품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것은 드문 사례다. 소장품의 유형에 따라 전문 관리인이 함께하기 때문에 훼손 우려도 크지 않다. 특히 V&A의 소장품들은 주로 가구, 식기, 장식품 등 정교한 패턴과 문양이 새겨진 공예품들이 많기 때문에 이러한 서비스는 디자이너들에게 값진 영감을 전달할 것이다. 말 그대로 박물관이 소장품을 통해 ‘Sourcebook’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V&A 웹사이트의 소장품 조회 페이지. 필터 기능을 통해 예약할 수 있는 소장품만 조회할 수 있다. East Storehouse의 소장품은 온라인 예약이 가능하지만, 본관 소장품은 담당 부서에 직접 문의해야 한다. 출처: V&A 공식 웹사이트 캡처.

East Storehouse의 Study Centre 전경, 예약을 완료하면 이곳에서 소장품을 볼 수 있다. 사진을 찍어갈 수도 있다. 출처: 직접 촬영.
역사는 흐른다, 동시대의 이야기를 모으는 박물관
V&A가 추구하는 마지막 가치는 ‘Collecting Stories’다. 앞서 소개한 ‘Torrijos Ceiling(토리호스 천장)’에서도 알 수 있듯, East Storehouse가 작품을 소개하는 방식은 기존의 박물관과 사뭇 다르다. 이곳은 방문객들에게 소장품과 함께하는 동시대의 과정과 커뮤니티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Robin Hood Gardens(로빈후드 가든)’의 테라스는 그 대표적인 예시다. 런던은 역사적으로 서부를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다. 귀족이나 부호들이 거주했던 빅토리아식 건축물이나 고급 저택은 켄싱턴과 첼시에 밀집되어 있으며, 주요 역사적 건축물과 의회 시설 상당수도 서부 중심지 자리를 잡고 있어 오늘날도 부유 계층 상당수가 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저렴한 주거지가 필요했던 이민자나 서민 계층이 동부로 정착하며 서부 반대편도 정체성과 커뮤니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Robin Hood Gardens는 당시 이러한 새로운 동부 커뮤니티들을 수용하기 위한 브루탈리즘 양식의 공공 임대주택으로, 현재는 유지비 부족과 인근 지역의 인프라 침체로 철거된 건물이다. 지난 10월까지 운영되었던 테이트 모던에서 전시 ‘Walk The House’를 선보였던 작가 서도호도 “Robin Hood Gardens, Woolmore Street, London E14 0HG”라는 영상 작업으로 해당 건물을 기록한 바 있다.
V&A는 이 건물이 지닌 20세기 영국 주거 정책의 실패와 이민자 사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영국의 근대사를 전달하고자 철거된 구조물의 일부 파편을 소장품으로 가져왔고, 그것을 East Storehouse에 전시하여 런던 동부 활성화를 지원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앞으로도 East Storehouse는 기존의 오랜 역사성을 지닌 소장품뿐 아니라 비서구 커뮤니티와 젊은 세대들과도 공감할 수 있는 근대적 서사들을 나눌 예정이라고 한다.

Robin Hood Gardens. 영국 브루탈리즘의 특징인 콘크리트 소재가 눈에 띈다. 사진: 직접 촬영
일하는 박물관, 영감을 주는 박물관, 이야기를 모으는 박물관, 모두를 위한 박물관
V&A East Storehouse는 평소 전시 방문을 즐기는 나에게도 탐험하는 재미가 있는 공간이었다. 기존의 대형 박물관들에 비해 ‘관계자들의 영역’을 엿볼 수 있는 공간들이 많았고, V&A의 소장품이 생각보다 광범위하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특히 이번 방문을 통해 느낀 것은 East Storehouse가 런던 동부 커뮤니티를 비롯한 다양한 대중들과 관계를 형성하고자 함을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박물관 내부 일부 실무 공간들의 노출과 더불어 하나의 작품이 방문객들 앞에 놓이는 과정에서 기존에 권위를 지녔던 큐레이터와 보존 연구자뿐만 아니라 목수, 건설업자 등이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주어 친근한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공개된 수장고 영역 뒤편 관계자들의 공간. 소장품 사이를 돌아다니다 보면 괴도가 된 기분이 든다. 출처: 직접 촬영.

저주받은(?) 곰 인형. 본관은 로댕의 조각품, 회화, 가구, 공예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예상외의 소장품이었다. 묶여있어서 불쌍해 보인다. 출처: 직접 촬영.
방문객과 인근 주민들이 박물관에 소속감을 형성할 수 있는 전략 또한 적극적으로 취하고 있다. 기관에 대한 관심, 특정 분야에 대한 호기심, 영감을 얻고자 하는 욕구 등 다양한 목적을 지닌 이들이 누구나 소장품을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하는 방문 서비스는 제법 과감한 시도로 보인다. 런던 동부의 지역 정체성과 관련이 깊은 소장품을 전면에 내세워 앞으로의 East Storehouse의 운영 방향성을 드러내는 점도 인상 깊었다. 이밖에도 수장고는 방문객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설문조사 구역을 마련해 두었다. 수장고 특성상 대규모의 특별전을 기획하기 어려운 제약 조건을 토크, 퍼포먼스, 워크숍 등의 프로그램으로 보완하기위해 이용자들의 수요를 조사하려는 의도로 보이는데, 어떤 의견들이 반영될지 궁금하다.

V&A의 설문조사 종이. 구체적인 건의 사항이 떠오르지 않으면 설문지 하단의 선택지를 고를 수 있다. 요즘 미술 시장과 기관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약탈 문화재 반환 이슈를 다뤄달라고 적으면 반영해 줄지 궁금하다. 출처: 직접 촬영.
코로나19 시기에 전 세계의 많은 문화기관들이 대중들과의 단절을 경험했다. 이 시기 이후로 박물관들은 방문객들에게 더욱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East Storehouse는 포스트 코로나 시기에 설립된 문화기관으로서 박물관이 대중들과 소통하는 새로운 방식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V&A는 올해 East Storehouse 개관 후 다가오는 2026년 4월 V&A East Museum을 추가로 개관한다. 역사성을 지닌 본관의 소장품과 달리 런던 동부에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동시대의 젊은 아티스트들의 작업이 주를 이룰 계획이다. 내년에 런던에 방문할 계획이라면 V&A East Museum을 추천한다. 더불어 East Storehouse도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 사전에 소장품 관람을 예약한다면 더욱 이색적인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