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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가장 조용한 절망이 흐르는 곳 [도서/문학]

이혁진 [광인]이 보여준 균열의 풍경

by 손가은 에디터
2025.11.15 12:11

 

 

세상이 무너지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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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아주 천천히 금이 가고, 누군가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이혁진 작가의 『광인』은 그 금이 가는 과정 전체를 하나하나 정면으로 응시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거대한 폭력이나 비극적인 사건과 다르게 더 조용하고, 더 잔인한 방식으로 인간이 얼마나 부서질 수 있는지에 관한 현실을 다룬다. 그리고 작가는 그 현실 속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사람의 내면을 위스키처럼 차갑고도 그 무엇보다 깊고 정확한 문장으로 그려낸다.

 

작품 속 음악 하는 남자 준연, 위스키 만드는 여자 하진, 그리고 사랑에 빠진 남자 해원. 이렇게 그들은 누구나처럼 자신의 소소한 삶을 버티며 살아가는 인물들이지만, 아주 작고 사소한 균열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지점에 닿는다. 이 소설은 바로 그 무너지기 직전의 순간과 인물들이 무너지는 과정 전체를 세밀하게 기록한 일대기이자 붕괴의 연대기다.

 

책을 읽다 보면, 작가가 말하는 ‘광기’는 미친 사람의 분노나 폭주가 아니라, 정말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보려 했던 사람이 끝내 세상에게 외면당할 때 밀려오는 조용한 절망에 가깝다. 그 절망은 화려한 장면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서히 나타나고, 주인공은 그것을 피하지 못한 채 계속 부딪힌다. 이때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에 미친 걸까? 사랑이 미친 걸까?”
 

 

어느 날 갑자기 미친 사람이 되는 이는 없다. 광기란 마치 멀쩡하던 모든 것을 서서히 썩히는 곰팡이처럼 처음엔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존재에 지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에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퍼져 있다. 이 소설은 이런 광기의 형성과 그 사이를 방황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각자의 가장 두려운 사실을 마주하게 한다.광기는 타인의 몫이 아니라, 누구나 품고 살아가는 그림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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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멈추는 대목이 있었다. 작가가 이 이야기를 위스키에 빗대어 설명하는 부분이다. 나는 그 표현이 이상하리만큼 마음에 오래 남았다.  위스키는 처음 잔에 따르면 알코올 냄새가 강하게 올라오지만,  잔을 손에 쥐고 잠시 두면 서서히 향이 바뀐다. 거칠게만 느껴지던 냄새가 부드러워지고, 숨겨졌던 달큰한 향기가 뒤늦게 올라오듯이.  나는 그 묘사가 『광인』의 인물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겉으로는 휘청거리고 날카롭게민 보이지만,  그 안쪽에는 말로 꺼내지 못한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숙성이라는 말이 정확히 어울릴만큼, 오래 표현되지 못한 감정들이 그의 내면에 천천히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책 속의 ‘광기’는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오래된 나무통처럼 조용히 흡수하고, 버티고, 스스로를 깎아내며 만들어진 맛에 가까웠다. 목을 타고 내려갈 때 잠깐 뜨겁다가도 곧 사라지는 위스키의 잔여감처럼, 그 인물의 고통 또한 읽는 내내 은근하게 번져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그 비유를 통해 한 사람이 무너지는 과정이 나의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이 아니라, 천천히 삭아오던 감정이 오래된 술처럼 어느 순간 향으로 드러나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관점으로 바라보니, 그의 행동과 선택들이 이전보다 더 명확하게 다가왔다. 어떤 사람은 한순간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조금씩 향을 바꾸며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광인』에서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작가가 주인공을 그저 불쌍한 사람으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상처뿐 아니라 저항까지도 함께 지닌 인물이다. 그를 나락으로 빠뜨린 건 어쩌면 원래 자리 잡고 있던 그의 어두운 내면이 사랑에 의해 고개를 든 순간부터가 아닐까? 하지만 그 어두운 내면조차 주인공이 원한 것이 아니었기에 주인공의 광기는 버텨내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에 가깝다는 것을 느낀다. 이 소설을 읽으며 계속 떠오른 문장들이 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거니까. 정확히 그렇게.“

 

“우리를 시작하게 만드는 것, 그게 사랑의 일이고 사랑만이 늘 시작다운 시작을 만드니까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구원받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스려지는 그 모든 순간이 아름다워 페이지 한장 한장을 넘기면서도 왜인지 멈칫하게 만드는 소설이라 자부한다.

 

작가는 광기와 정상의 경계는 생각보다 얇고, 우리가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내는 행위 자체가 이미 광기에 가까운 치열한 싸움이라는 사실을 작품은 말없이 전한다. 책 후반으로 갈수록 주인공이 마주하는 현실은 더 어둡고 가혹해진다. 그러나 인물들의 감정은 반대로 점점 더 투명해진다. 서로를 향한 시선이 마침내 맞닿아 서로를 응시할 때 그 응시 자체가 이 소설의 가장 강렬한 저항이 된다.

 

책이 끝날 때 독자는 묘한 감정에 남겨진다. 비극이지만 패배만은 아니고, 절망이지만 완전한 붕괴만도 아니다. 작가는 강요된 희망을 제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마무리하지도 않는다. 책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비유 요소인 위스키와 같은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달콤함이 스쳐 간 뒤 씁쓸한 감정에 허우적거리다 결국 남아있는 향에 매달리는 것.『광인』은 세상에 짓눌리더라도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려던 인물들의 의지가 담긴 기록이다. 비록 결말의 해석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읽고 난 후 마음 한구석이 오래도록 아려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속도로 시련을 겪고, 때로는 세상을 향해 침묵 속에서 광인이 되기도 하며, 그 어떤 존재보다 아슬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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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영혼, 사랑과 열정, 비극과 고뇌 속을 헤엄치던 인물들의 마지막은 과연 어떤 향으로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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