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가장 내밀한 사랑의 텍스트들을 보여드릴게요 [도서/문학]

이유운 시인의 변방의 언어로 사랑하며
글 입력 2024.07.07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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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뭐길래


 

작년 가을, 폴란드로 떠날 무렵 마지막으로 들른 교보문고에는 유독 새하얀 책이 하나 있었다. 제목은 [변방의 언어로 사랑하며]. 시와 산문을 문학 중 가장 사랑하는 나로서는 이 책을 안 살 이유가 없었으나 비행기에서 가볍게 읽어버리겠다는 다짐은 금세 구겨졌다. 나는 폴란드에 있던 1년 동안, 이 책을 몇 번인지 셀 수 없을 만큼 돌려봤기 때문이다. 감히 이십 대 초반에 읽은 책 중 나의 사랑관에 있어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자부한다.

 

 

색도, 향도, 사랑도 성공적으로 이해하거나 설명할 순 없었다. 사랑은 언제나 나를 초월하는 일이라고들 하니까, 나를 초월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대체 사랑이 뭔데? 라고 물어보면 정확히 답할 수가 없다. 내가 내린 정의로 사랑이 뭔지 알게 된다면 그게 정말 사랑일 리가 없다.

 

p. 40

 

 

무작위로 한 페이지를 골라 읽어보는 건 책을 고를 때의 내 습관이다. 그리고 내가 [변방의 언어로 사랑하며]에서 제일 처음 마주한 문단은 바로 맨 처음의 것이었다. 나는 사랑에 교만하다. 고작 사랑 몇 번 쥐어보고 남들과 하는 사랑의 모양은 모든 다 아는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폴란드로 떠나기 직전, 생각보다 내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많았으며 그중에는 내가 차마 알지 못하던 모양의 사랑들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어지러운 마음을 단번에 정리해 줄 우주로부터의 메시지가, 내가 이 책을 들어 올려 천천히 종이의 단면을 느끼며 186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골랐을 때, 그때 드디어 나에게 도달한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그 끝없는 질문에 단면을 가진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사랑은 '어떨 때는'으로 시작되는 구절들과 너무 닮아있다. 사랑해서 이상하고, 사랑해서 슬퍼지고, 사랑에 온몸이 감전되다가도 다음 날에는 사랑 때문에 그 모든 걸 기껍다고 인식하고야 마는. 사랑은 이상한 것. 어쩌면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몸소 체득할 수 있는 마음의 양자역학이 아닐지 생각한다. 여러 가지의 상태가 중첩된 마음. 죽음을 선포하고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는 절대 어떤 모양일지 알 수 없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설령 모양을 알고 있다고 해도 어떤 언어로도 완벽하게 묘사할 수는 없는 것. 그래서 내가 살면서 입에 굴렸던 가장 익숙한 언어와 가장 동떨어져 있는 언어로 말하는 것이, 어쩌면 사랑을 주고받는 것과 가장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속이 단단한 나무로 만든 상자에 나를 넣고 사랑을 주입하면, 변방의 언어들로 '사랑'과 유사한 단어들을 반복하는 내 모습이 중첩되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유운 시인은 그런 사랑의 모습에 주목하여, 가장 내밀한 사랑의 텍스트들을 적어 내려간다.

 

 

 

사랑이 미치는 범위


 

 

나는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했고 무언가를 사랑했다. 쉽게 사랑하고 자주 사랑했지만, 어떤 사랑의 형태에도 능숙해 본 적은 없다. 그래서 내가 받아온 사랑의 연원을 떠올릴 때마다, 이토록 희고 단단한 사랑을 받아왔는데 왜 지금의 나는 그런 사랑의 모양을 가지지 못했는지 스스로를 탓하고는 한다. 어린 눈 위로 손차양을 만들어주는, 거짓말 대신 모나카를 주는, 등에서 햇빛 냄새가 나는 그런 사랑과 내 마음의 모양이 달라서 가끔 놀란다.

 

p.71

 

 

이유운 시인의 사랑은 연인과 주고받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여러 종류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다. 언젠가 내가 가족들로부터 받았던 사랑과 나 자신으로부터 받았던 것, 연인에게 받았던 것과 친구들에게 받았던 사랑. 그리고 내가 그들 모두에게 돌려주었던 사랑에 대해서까지도. 아주 넓은 범위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다.

 

대부분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산문이라면 연인 간의 그것을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걸 넓게 사용한다. 우리가 살아가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내가 사랑을 전반적으로 어떻게 써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나의 사랑은 어떤 모양인지, 내 사랑의 원형은 어디서 흘러왔는지, 어떤 태도로 그 사랑을 평생 다 써버리고 싶은지.

 

난 사랑에 긍정적이었던 적이 별로 없다. 대부분의 기억에서는 나를 필요 이상으로 괴롭히는 것, 나를 나답지 않게 만드는 것이 내가 가진 사랑에 대한 감상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나를 많이 괴롭혔다. 사랑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 그건 사실 그리 멋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 덕분에 그런 생각을 하는 나도, 내 사랑이 가지는 모습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랑을 의심하던 모습이 있었으니, 내 사랑은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거겠고, 더 찬란해질 수 있을 테다.

 

 

 

사랑이 나열된 편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가 여전히 매력적인 이유는, 수많은 글들 사이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내용으로 가장 앞서 있기 때문이다. 한 명의 독자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내밀해질 수 있는 마음, 그런 마음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언어 바깥으로 끊임없이 밀려나는 그 능력, 그 마음이 타인을 직관한다. 직관한 타인이 나를 다시 들여다본다. 검은 유리 같은 눈에 비친 내가 어떤 모습인지 바라본다. 내 실존의 장벽이 그 시선을 통해 무너진다. 무너진 나는 타인을 위해 열렸다고 말할 수 있다. 내 세계 속에 누군가 발을 들인다. 그에게 나는 한없이 열린 세계가 된다. 나의 열려 있는 세계의 경계에 새로 만들어진 우체통에 편지를 밀어 넣는다. 촌스러운 사랑 고백과, 나의 비겁한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 삶의 성찰 그 가운데를 헤매는 글이다.

 

p.85

 

 

함부로 내밀해지는 마음을 헤매는 글. 그게 바로 편지라고 이유운 시인은 말한다. '내밀하다'라는 말과 '헤매다', '함부로'라는 말들은 사랑은 온전히 담고 있지는 못하겠으나 그 일부를 담고 있는 듯하다.

 

내게는 편지를 쓰는 마음이 곧 사랑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쓸 에너지의 총량이 큰 타입이 못 되어서,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편지를 적을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적었던 편지들을 보면 여러 크기를 가진 사랑들이 나열되어 있다.

 

[변방의 언어로 사랑하며] 중 가장 사랑하는 글이 위 구절이 담긴 <내밀한 사랑의 텍스트>인 이유도 나에게는 가장 큰 사랑 표현이 편지를 적는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유운 시인이 담담하게 내뱉는 사랑의 텍스트들이, 내가 가진 사랑의 텍스트들과 비슷해서 이 책에 더욱 애정이 간다는 것을 글로 쓰며 깨닫는다.

 

 

 

사랑이 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어떤 장면은 현실일 때 더 아름다운 편이다. 구체적일수록 아름다워지는 그런 장면이 있다. 장면 속에 사랑이 있었다. 장면이 이어지는 그 짧은 찰나마다 그 사랑을 위한 꾸준한 인내와 그다지 멋지지 않은 슬픈 순간들도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이 서로 이어지며 나는 소리가 좋아서 그 소리를 듣고 일기로 쓰고 편지를 쓰고, 또 시를 쓴다. 나의 사랑을 세계로 그려준 자에게 나는 내 원칙을 어기고 사적인 일기를 공적으로 발표한다.

 

p.121

 


사랑에 대해 아무리 토론해도, 사랑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애초에 사랑에 대해 개인이 가지는 정의부터가 획일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사랑은 계속 되길. 사랑을 넓게 펑펑 써버리는 우리가 되기를.

 

 

[황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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