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비일상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기준은 알 수 없지만, 쉽게 분류할 때 여행은 아마 후자에 속할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에 변주를 주는 것, 새로운 땅의 축축한 공기를 코에 집어넣는 것이 여행이라면. 하지만 누군가는 여행지에서도 그곳의 일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하루의 목표가 ‘끝내주게 놀기’ 정도인 관광객의 하루도 무척 행복하지만, 어쩌면 지금-여기의 일상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0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시작은 사소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여행자의 리듬을 아직 온몸에 잔뜩 지니고 있었다. 10월 말이었고, 11월이 곧 다시 시작된다는 생각이 온 마음을 사로잡았다. 연말이 시작되면 곧 모든 게 닫힐 준비를, 또다시 새로운 한 해를 성대하게 열어낼 준비를 시작할 거다. 달력 속 숫자가 30을 향해 달려가는 것보다, 어쩌면 다시 1로 시작하는 것에 마음이 조급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작년 겨울 제주도에서 일일 책방지기를 했다던 친한 지인의 이야기가 반짝 떠올랐다. 제주도, 일일 책방지기. 어느 하나 혹하지 않을 요소가 없다. 여성 책방지기 신청자에 한해 총 비용 4만원을 내면 책방 옆 숙소를 제공한다는 것도. 호기롭게 들어간 이후북스 제주점의 11월의 책방지기 신청란은 거의 다 차 있었지만, 당장 이틀 뒤였던 10월의 마지막 책방지기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렇게 10월의 마지막 일일 책방지기가 되었다.
매달 책방지기 신청은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구글 폼을 통해 그 전 달 중순쯤부터 신청받는다. 참여자가 적지 않으니 신청 생각이 있다면 일정을 미리 확인해 두는 것이 좋다.
망원동에 1호점이 있는 독립 서점 이후북스는 제주에 그 2호점의 뿌리를 내렸다. 이 2호점에서 매달 일일 책방지기를 모집한다. 독립 서점이 대부분 그렇듯, 책방엔 스쳐 간 사람들의 독서 취향이 쌓이고 쌓여 그 자체가 축적의 공간이 된다. 이런 공간을 생판 모르는 남에게 내주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제주도에 몸 뉠 곳은커녕 지인 하나 없는 슬픈 육지 사람인 에디터에게는, '숙소 제공'이라는 조건과 함께 무척이나 매력적인 요소였다.

사흘간 출근 메이트가 돼주었던 어반브루잉의 롱블랙.
에디터는 책방 오픈 전 시간을 활용해 책방 근처 골목을 누볐다.
이후북스 제주점은 제주시 원도심 근처의 작은 골목길에 자리 잡고 있다. 제주 공항에서 버스로 이동할 수 있을 만큼 가깝다.
좋은 공간 옆에는 좋은 공간이 꼭 따른다는 말-방금 지어냈다-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이후북스가 위치한 골목길엔 요즘 말로 소위 ‘느낌 좋은’ 공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세계 각국의 문구를 판매하는 클래식 문구사, 제주도 특색 요리가 돋보이는 브런치 카페 음파와 향기로운 커피를 자랑하는 카페단단과 어반브루잉. 바(bar)타인의 취향과 감각 있는 제주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인 더 아일랜더는 이후북스와 함께 작은 골목길을 알차게 꾸민다.
이후북스 제주의 일일 책방지기는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세 권의 책을 읽게 된다. 바로 이전의 일일 책방지기들이 남기고 간 방명록이 그것이다. 근무를 위한 팁과 근무시간 앞뒤로 가볼 만한 맛집과 놀거리가 빼곡히 적힌 방명록은 밑줄 쳐가며 읽고 싶을 만큼 알차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들의 이야기지만 읽다 보면 어느새 그가 내가 되고, 내가 그가 되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몇 년 치 방명록엔 긴밀한 이야기가 잔뜩 쌓여있다.
책방의 하루는 꽤 단조롭게 시작한다. 오픈 시간인 12시보다 조금 더 일찍 도착해 사장님들이 준비해 주신 꼼꼼한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다 보면 책방은 어느새 손님을 맞이할 모양새를 갖춘다. 창밖에서 12시 정각을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오면, 그때부터 일일 책방지기의 하루가 시작된다.
‘책 좀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울 만큼 처음 보는 독립 출판물이 많지만, 손님들이 물어보기 전에 구석구석 꼼꼼히 둘러보며 익혀둬야 한다. 이전의 책방지기들이 남기고 간 추천사와 쪽지가 많으니 그것들을 꼼꼼히 읽어봐도 좋다. 에디터는 먼지털이를 들고 기웃대다 결국 몇 권을 집어 들어 결제하고서는 읽어버리기도 했다. 이후북스 사장님들이 운영하는 출판 브랜드 ‘이후진프레스’에서 출간한 책들도 한편에 가득하다.
오픈 준비를 마친 일일 책방지기는 오픈 페이퍼를 써 책방 문 앞에 붙여둔다. 이후북스 제주점의 영업시간과 함께 좋아하는 책 속 한 구절을 쓴다. 오픈 페이퍼가 이곳저곳을 방문하기 위해 골목을 누비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수록, 일일 책방지기의 뿌듯함은 배가 된다.



골목길에 가게들이 사이좋게 붙어있는 덕에, 책방을 방문한 후 다른 곳을 구경하러 향하는 손님들과 다른 곳을 구경하러 왔다가 책방에 들른 손님들 모두가 이곳을 붐비게 만든다. 모든 손님의 여정을 전부 헤아릴 순 없겠지만, 어쩌다 이후북스에 다다른 사람들이 저마다의 시선으로 책을 즐긴다.
사람들은 책방 이곳저곳에 붙은 일일 책방지기들의 쪽지와 추천사를 훑고, 책을 들춰보며 읽는다. 그 모든 시간을 함께 누리고 있자면, 마치 반려 고양이의 잠을 깨우지 않도록 살금살금 걷는 마음으로 플레이리스트 속 음악을 고르게 된다. 살금살금, 조심조심. 책방 속 모든 '읽는 사람'의 리듬을 절대 깨고 싶지 않다.

책장 앞에서 기웃거리던 에디터도 슬쩍 흔적을 남겨두었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은 천천히 책을 꼭꼭 씹어 소화한다. 처음엔 이리저리 헤맸던 에디터도 그 차분한 공기 속에서 마음을 다잡았다.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 비일상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책장 넘기는 소리를 그저 듣기만 해도 마음이 정리되는 것도 같다.
책방지기 자리에 앉아 반나절을 보내다 보면, 특별한 경험을 할 때도 있다. 열려있는 문에 고개를 빼꼼 내밀어, 여기 식당이에요? 묻는 손님-이후북스의 바깥 간판에는 식당의 간판이 그대로 남아있다-, 영어책을 찾는 외국인 손님과 가게의 향이 궁금하다며 사용하는 제품명을 묻는 손님. 마지막 근무일에 퇴근을 5분 남기고 운명적으로 마주한, 책방지기의 추천 도서를 찾는 여행객 손님까지. 하루하루가 이런 날이라면 이후북스의 일상이 조금 부러워진다.

에디터는 방명록에 이렇게 적었다. “그냥 정말 잘 ‘지내다’ 가는 것 같아요. 그 ‘지냄’이 저에겐 꼭 필요한 것이었나 봐요. 지금 행복해요!”
제주의 이후북스는 일상을 지내는 사람들과 비일상을 보내러 온 사람들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누구라도 비일상의 책방을 경험하고 싶다면, 다음 달의 책방지기로 참여해 보아도 좋겠다. 사흘짜리 일일 책방지기가 삶을 180도 바뀌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겠지만… 낯선 곳, 낯선 책방에서, 일상의 고점高點을 똑똑히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다. 상상해 보자. 푸른 제주 하늘 아래, ‘너와 너의’가 흘러나오는 책방, 책을 꼭꼭 소화하는 손님들의 옆태를 지켜보는 그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