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하는 일과 기다려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과 감수해야 하는 일. 버리는 일과 선택해야 하는 일. 도통 마음이 소란스럽고 불안해서 좀처럼 글이 써지지 않는 시기이다. 시시때때로 판단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마음에 용기가 깃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진다.
이토록 나약해질 때마다 문득 떠올리게 되는 이름이 있다. 지난달 이맘때에는 그가 1907년에 완성한 미발표 소설 『바이올렛의 삶』이 세상에 나왔다. 저번 주에는 그의 ‘고통의 언어’가 수잰 스캔런의 ‘의미의 언어’가 되어 『의미들』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그가 썼던 「함께 그리고 따로」가 세계 문학 단편선 『가을빛 속으로』에 실려 출간되었다.
버지니아 울프, 그를 경유하는 이 영화를 다시 꺼내어 보게 된 건 어떤 갈급함 때문이다. 삶의 우울함과 권태로움, 그리고 위태로움을 견디며 다시 살아가는 법을 복기하고 싶었다. 수없이 흔들리더라도 그 속에 강인함을 품고 있는 이들의 느슨한 연대에 잠시 머물고 싶었다. 그리고 이 글은 지금 그런 위치에 놓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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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서 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저게 아닌 이것을 택하면 내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것만 같은 순간에,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던 무수히 많은 ‘점’들에. 정체성의 경계, 관계의 경계, 업의 경계, 가치관의 경계, 윤리적 판단의 경계,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경계, 혹자는 생사가 걸린 경계까지. 경계는 나의 ‘하고 싶음’이 현재 놓인 상태와 부닥칠 때마다 자각된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진 일련의 상황들로부터 실밥이 느껴지니 한없이 불편하다. 암묵적인 봉합으로 가려진 속내를 의식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파고들게 된다. 경계를 넘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입을 열 것인가, 말 것인가. 평온할 것인가, 불편할 것인가.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아마 당신과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그런 괴로운 지점들을 지나왔을 것이고 지금도 당연하게 그런 시간들을 지나가고 있는지 모른다. 나의 바람과 세상의 조류는 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도 있지만, 동시에 맞부딪히며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속에서 공포와 권태를, 희열과 분노를, 불안과 갈망을, 그리고 부담과 전의를 느낀다. 제 삶을 영위해나간다는 건, 다시 말해 그 무게를 견디며 나를 위치시킨다는 건 그토록 만만치가 않은 일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세 명의 여성, 곧 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의 로라 브라운, 2001년의 클라리사 본은 이런 우리를 대변이라도 하듯이 저마다의 벼랑 끝에 내몰린다.
버지니아는 의사들이 말하는 병적 전적에 의해 영국의 리치먼드 교외로 이사 와 갇힌 것과 다름없는 날들을 보낸다. 글을 쓰는 것으로 연명하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아 하던 남편의 배려를 무릅쓰고 런던행 기차가 출발할 역으로 뛰어간다. 로라는 미국 LA에서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연약한 그녀와 결혼할 ‘행복한’ 상상을 실현시킨 남자와 산다. 연신 입을 다물던 그는 남편의 케이크를 준비한 그날, 이 위태로운 삶을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한다. 클라리사는 에이즈에 걸린 전 남자친구 리처드를 수년간 간호하며 현 동거인 샐리와 함께 뉴욕에서 살고 있다. “좋은 아침, 댈러웨이 부인”, 이 한마디에 정말 그런 운명을 짓고 살아오던 그는 리처드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한 성대한 파티를 여는 당일, 불현듯 크게 다가온 버거움을 직면하게 된다.
모두가 이번 장의 막바지에 도달해 있다.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던 사람이 자신들 뒤에 있다. 모든 일은 그날, 단 하루 동안에 벌어진다. 그때도 지금도 흘러갈 평범한 ‘그’ 하루 동안에 말이다. 한순간에 밀려오듯 일렁이는 변화는 ‘경계 넘기’가 시간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그것은 오랜 시간이 주어진다 해서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경계를 넘게 하는 것은 행동이다. 세 사람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기로 한다.
“You cannot find peace by avoiding life.”
“삶을 회피하면 평화를 못 얻어요.”
이 결단들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알 수 없는 벅차오름을 소화시키느라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의 습관이나 그 사람과의 신뢰를 붕괴하는 시도는 당연히 몸이 떨리는 일이다. 정(情)과 사랑을 뿌리쳐야 할 때면 기한도 없이 괴로울 수 있다. 무엇보다 기억과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이를 극복하기란, 정말이지 쉽지 않다. 이를 매번 도돌이표처럼 경험하지 않는가. 사고와 정서가 마비되는 지점은 살면서 누구나 몇 번씩이고 겪어왔으니까.
그러나 영화는 그 점을 견지한 채, 그저 함께 숨을 쉬며 나아가자 한다. 세 명의 ‘댈러웨이 부인’들이 수렴하고 흩어지는 맥락 속에서 무엇인가 목도하기를 바란다. 이들이 어떻게 침전하지 않는지를. 이 모든 것을 딛고 어떻게 감내하는지를. 그것은 묘한 동질감과 기시감, 그리고 다시 경계를 맞닥뜨릴 작은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연이은 가부장제 아래 동성애자이자 여성으로 사는 삶을 조명할 때 느껴지는 이 사회 내 고질적인 ‘벽’ 때문인지 모른다. 혹은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에 대해 세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어딘가 존재했고 존재할 타자에게 위로를 원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제까지의 몸에 밴 경직된 긴장이 서서히 풀리며, 또다시 경계선을 마주칠 순간들을 애도하고 스스로를 챙기다 나온 눈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디 아워스〉가 개봉되고 22년이 흐른 지금도, 영화가 주는 울림은 분명하다.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 세 사람의 도망과 결정, 돌아옴과 거듭남이 삶의 중단이 아니라 살아내기 위한 흐름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말을 하라고, 몸을 움직이고, 바로 여기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으라고 다독인다. 그때를 직시하고, 충분히 마음을 쓰며, 그렇게 사랑하라고.
그저 또 다른 시간에(hour) 살고 있는 지금의 당신과, 현재의 우리에게.
부디 오롯하게 삶을 마주하기를 바라면서.
“To look life in the face, always, to look life in the face and to know it for what it is. At last to know it, to love it for what it is, and then, to put it away. Leonard, always the years between us, always the years. Always, love. Always, the hours.”
“삶을 정면으로 보고, 언제나 삶을 정면으로 보고, 그리고 삶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되며, 마침내 그것을 깨달으며,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그런 후에야, 접는 거예요. 레너드, 우리가 영원히 함께한 시간을요. 영원히 함께한 시간을요. 영원한, 그 사랑을요. 영원한, 그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