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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뜨거운 날이면 바깥에는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급격하게 상승하는 공기를 따라, 빛은 나아가지 못하고 굴절한다. 아지랑이 뒤에 붙은 ‘좌’는 앉다, 무리의 의미로 통용된다. 하지만 ‘좌’의 의미는 일본에서 극장 혹은 연극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본의 전통 예술 집단들은 자신의 이름에 ‘좌’를 붙였으며, 길거리에서 간이 무대를 만든 후 연극을 하는 것도 ‘좌’의 명칭으로 통용된다.

 

<아지랑이좌>는 아지랑이의 무대 혹은 아지랑이와 같은 연극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극의 중심인물이 마쓰자카는 극단에서 일했던 작가로 나오며, 연극은 <아지랑이좌>에서 한 부분이 할애되어 있다. 특히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서양 문화와 전통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연극과 영화라는 결합은 이질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경계의 파괴는 <지고이네르바이젠>에서는 전형적 장르 기법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나타났다면, <아지랑이좌>에서는 영화 내부를 파괴한다. 전위영화처럼 무의식을 표현한다거나, 혹은 다큐멘터리처럼 현실을 그대로 담아 놓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골자가 되는 서사 구조는 충분하다. 남작이라고 불리는 타마와키에는 두 명의 여자가 있으며, 한 명의 여자는 서양을 대표한다. 독일에서 온 여성은 카마와키에 의하여, 일본식 전통을 따른다. 다른 여성은 죽음과 삶의 경계 속에서 존재하는 여성이다. 이 여성들은 모두 마쓰자카와 관계를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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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구조만 본다면, 삼각관계가 등장하는 치정극의 영역과 가깝다. 마쓰자카는 타마와키의 아내들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타마와키는 마쓰자카와 아내와의 사랑을 오히려 지켜본다. 마치 관음하는 듯, 타마와키는 남녀의 동반 자살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마쓰자카로부터 해결하려고 한다. <지고이네르바이젠>에서 이뤄낸 장르의 파괴가 <아지랑이좌>에서도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이준은 성애 장면을 비롯하여,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까지 오로지 시각적 이미지와 기호성으로 풀이한다. 이미지들은 한데 엉켜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영화 내에서 ‘꽈리’는 영혼과 맞닿아 있는 기호이다. 타마와키의 아내 중 한 명인 시나코가 마쓰자카에게 키스하는 순간, 시나코의 입에서 꽈리가 튀어나온다. 꽈리는 마쓰자카의 입으로 넘어간다.

 

나아가 극의 후반부 쇼트에는 물에 잠긴 시나코는 카메라를 꼿꼿이 바라본다. 주황빛 꽈리를 입에서 뱉어냈을 때, 몸에서 꽈리들이 쏟아진다. 이처럼 <아지랑이좌>에서 죽음은 비유적인 설명을 동반할 뿐, 살아있음과 구분되지 않는다. 특히 마쓰자카의 죽음 이후 이뤄지는 지옥의 장면도 마찬가지다. 온통 외설스러운 그림으로 장식된 병풍들은 마쓰자카의 현실이 아닌 죽음 이후의 세계를 보여준다.

 

죽음은 일종의 금기이다. 죽음을 논하기 위해서는 삶을 보여주어야 하며, 기존 멜로드라마 장르는 삶의 목적을 추구한다. 하지만 세이준은 오히려 죽음의 무게를 무겁게 만든다. 이를 위해서 현실은 몽환에 의해 모호해진 결과를 낳는다. 극의 초반부붙터 공간은 시간의 비례 관계에서 벗어난다. 시나코와 마쓰자카의 조우는 전혀 매끄럽지 않다. 공간은 시시각각 변하지만, 인물들의 대화는 하나의 시간 선상에 놓여있다. 나아가 시간 또한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독립적이다.

 

타마와키와 마쓰자카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간다. 동반자살을 강요하는 타마와키는 곧 이네에게 자살을 종용한다. 죽음이 명확히 설명되지 않지만, 마쓰자카는 실의에 빠져있다. 이는 이네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쇼트지만, 이후 이네는 연극이 이뤄지는 도시에서 나타난다. 이네의 죽음은 쇼트 사이에 공허한 부분에 존재하지만, 이네의 삶은 쇼트 내에 존재한다.

 

즉 이네의 시간 축은 곧 쇼트가 보여주는 시간과 대응되지 않으며, 이미지에 지배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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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세이준은 연극을 통해서, 마쓰자카와 타마와키, 그리고 여성들의 관계를 정립하여 보여준다. 어린아이들이 진행하는 연극은 <아지랑이좌> 서사 구조를 그대로 차용한다. 관객들은 파괴된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한 채, 연극을 보기 위해 앉아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영화 내의 현실조차 모호해진 순간, 마쓰자카는 삶의 경계를 넘어서서 이네와 등을 맞대고 앉는다. 서로 바라보지 않는 남녀는 곧 삼각관계의 비극을 일컫는다. 치정극의 말로는 마쓰자카와 이네의 동반자살이라는 욕망으로 마무리된다. 즉 세이준은 멜로드라마의 장르를 파괴함과 동시에 현실과 몽상을 나누는 경계조차 무너뜨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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