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 통조림 속에 머릿속의 기억이 들어있다면 어떨까? 평생 썩지 않고 보존이 가능할까?
물론 통조림은 장기간 보관할 수 있게 가공되어 있지만, 다른 식품들과 마찬가지로 유통기한이 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상하는 것이다. 기억도 음식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변질된다. 그래서인지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있다면 유통기한이 없기를 바란다.”는 「중경삼림」의 대사는 낭만적으로 들린다. 기억에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불가능한 소원을 비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낭만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된 「중경삼림」은 특이하게도 각각의 내용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1부는 곧 실연당한 지 한 달째이자 생일이 되는 ‘경찰 223/하지무(금성무 扮)’와 마약과 함께 도망친 인도인들을 쫓는 마약 밀매업자 ‘금발 가발의 여인(임청하 扮)’의 이야기이다. 2부는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경찰 663(양조위 扮)’과 그를 짝사랑해 몰래 그의 집을 드나드는 ‘페이(왕페이 扮)’의 이야기이다.
네 명은 각기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이지만, 서로 마주치거나 배경에 등장하는 등 찾아볼수록 흥미로운 요소가 많다. 조금 더 나아가면 당시 홍콩의 상황과 관련된 메타포까지 살펴볼 수 있다. 그 예로, 작중 하지무는 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통조림에 집착한다. 이러한 집착을 1997년 7월 1일에 중국에 반환되는 홍콩에 불안감을 느끼는 홍콩인들에 대한 은유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 만큼, 파고들수록 알아볼 거리가 많은 영화다.
왕가위 특유의 감성을 살려내는 스텝 프린팅
왕가위 감독의 촬영 기법도 주목할 만하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경찰 663이 블랙커피를 천천히 마시는 장면’은 ‘스텝 프린팅’이라는 기법이 사용되었다.
스텝 프린팅은 기본적으로 저속 촬영 후 필름의 특정 부분을 복사해 붙이는 기법으로 마치 뚝뚝 끊기는 슬로우 모션과도 같은 느낌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왕가위 감독은 일반적인 방법과는 조금 다르게, 고속 촬영 후 프레임 수를 줄였다가 다시 늘리는 방식을 사용했다.
스텝 프린팅은 감독의 다른 작품인 「타락천사」, 「화양연화」 등에서도 보일 만큼 그가 애용하는 기법이다. 「중경삼림」에서도 어딘지 급박하고 혼란스러운 느낌, 인물과 배경 사이의 해리, 꿈과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 등 여러 모습으로 그의 영화 곳곳에 숨어있다. 이러한 기법으로 인해 영화를 여러 번 봐도 한 장면 한 장면이 새롭게 느껴지며, 영상에 대한 집중도를 확 끌어올릴 수 있었다.
1:00부터, 스텝 프린팅 기법을 사용한 중경삼림의 오프닝.
중경삼림에 대한 악평
「중경삼림」은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로도 유명하다. 영화 올드보이, 헤어질 결심 등으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은 영화잡지 『키노』에서 과대평가된 영화 10편 중 1편으로 이 영화 언급했다. “고독한 게 뭐 자랑인가? 고독하다고 막 우기고 알아달라고 떼쓰는 태도가 싫다. 특히 타월이나 비누 붙들고 말 거는 장면은 기가 막힐 따름이다.”라는 평가는 해당 작품을 좋아하는 나로서도 일정 부분 이해가 간다.
금발 여인은 언제 해가 뜨고 언제 비가 올지 모르니 선글라스와 레인코트를 벗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무는 여자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파인애플 통조림을 헤어진 지 한 달이 되는 날짜인 5월 1일까지 하루에 하나씩 산 다음 30개를 한 번에 먹는다. 경찰 663은 페이가 집안 물건을 죄다 바꾸어 놓았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작품 속의 인물들에게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런 왕가위 감독 특유의 연출과 표현을 ‘고독하다고 막 우기고 알아달라고 떼쓰는 태도’라고 하기에는 다소 과격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울고 있는 너덜너덜한 타월, 잔뜩 홀쭉해진 비누가 있는 집은 겉으로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경찰 663의 억눌린 속마음을 대변하는 공간이다. 이후 페이가 들어와 타월과 비누, 인형 등을 교체해줌으로써 전 여자친구를 서서히 잊음과 동시에 페이에게 ‘스며든다’고 할 수 있는 장소다. 이 관계는 우리가 서서히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닮아 있다. 2부의 경찰 663과 페이는 그런 사랑을 떠올리게 되는 관계이다.
영화에는 유통기한이 없으니까
은유적이지만 공감이 가는 독백과 대사, 왕가위 감독 특유의 연출과 분위기는 「중경삼림」을 몇 번이고 봐도 질리지 않게 해준다. 스토리보다 장면과 대사에 더 집중하게 되는 영화라 그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