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는 할리우드 식민지로 불리던 한국 영화 시장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조직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영화제는 발전을 거듭해 왔고, 우리는 더 이상 타국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독자적으로 예술성을 갖춘 영화를 여럿 선보일 수 있었다. 즉,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많은 신인 감독이 상영 기회를 얻고 역량을 키울 수 있는 무대의 장을 얻게 된 것이다.
이는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불러일으키는 촉진제 역할을 했고, 부산국제영화제를 모티브로 한 다양한 국내 영화제 탄생의 초석이 되었다. 국내를 넘어 아시아 최대 영화제로 발돋움한 부산국제영화제가 올해로 30회를 맞았다. 태동부터 현재까지, 부산국제영화제가 한국 영화산업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지금, 영화제와는 별개로 영화산업은 밀려오는 변화의 흐름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심한 멀미를 겪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본경제시장에서 나눠 가질 수 있는 총 파이는 한정되어 있다. 가지고 있는 파이를 뺏기지 않은 채 새로운 시장을 확보하는 것을 이 사회에서는 ‘성장’이라 일컫는다. 이런 측면에서 현재 영화산업은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기는커녕 가지고 있는 몫마저 실시간으로 빼앗기는 중인 듯하다.
유튜브, OTT를 필두로 한 뉴미디어 영상 플랫폼의 등장과 트랜디한 마케팅과 합리적인 가격을 앞세운 프로 스포츠. 이 외에도 다양해진 취미 생활로 인해 영화는 우리의 삶과 점점 멀어지는 중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영화산업의 파이는 점점 앙상해지고 있다.
[오징어 게임],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예시로 들며, 국내 영화산업의 희망을 보는 이들도 있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오징어 게임]의 경우 제작비를 거대 자본 해외 OTT에서 지원 받는 대신 부가 수입을 전부 넘겨야 했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해외 제작사 제작으로 애초에 우리나라의 콘텐츠라 볼 수 없다. -관광산업에 도움이 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침체된 영화 산업을 살리려는 움직임은 펜데믹 시절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러나 유의미한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프로야구 단체 관람, 싱어롱 상영, 애니메이션 굿즈 증정 상영 등 다양한 탈출구를 모색하는 듯했지만 이는 영화관의 수익과 연관되는 움직임일 뿐, 영화를 사람들 품에 다시 안겼는지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오랜 위기의 상황에서 30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는 획기적인 두 가지 변화를 예고하며 한국 영화산업과 영화제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변화는 낯선 거리감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산국제영화제의 새로운 시도는 화려한 레드카펫과 무대 행사, 심층적인 GV라는 영화제의 근본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진행되었기에 관객들과 종사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는 점에서 꽤 긍정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30회 부산국제영화제의 두 가지 변화가 무엇인지, 이를 통해 영화산업과 영화제가 안고 있는 고민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경쟁 대신 조화를 택하다 – OTT 영화와의 공존
앞서 잠깐 설명했듯, OTT 영화를 기존 영화와 동일 선상에 놓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이는 영화관 상영과 홈시어터 상영이라는 상영 공간의 차이만을 산정한 주장이 아니다. 근본적인 차이는 유통 구조에서 비롯된 수익 배분에 있다. 기존 영화의 경우 제작사가 자체적으로 투자를 받아 영화를 만들고 협업 배급사가 극장 상영, 해외 판권 업무를 담당하는 등 분업화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제작 방식에서 영화의 판권은 제작사에 있기에 관련 굿즈나 새로운 시리즈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부가 수입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OTT 플랫폼이 주도하는 영화 제작 환경에서는 제작사의 부가 수입을 기대할 수 없다. 거대 자본을 보유한 OTT 플랫폼이 제작비 전부를 투자하는 대신 콘텐츠의 저작권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즉, OTT 영화는 콘텐츠 제작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플랫폼이 권리를 챙긴다. 프로모션 이벤트, 마케팅, 굿즈 판매 등 부가 수입은 온전히 OTT의 몫이 된다. OTT 서비스의 근간이 유통, 배급인 만큼 이 역시 플랫폼의 관할이 된다.
그러나 제작사, 영화인들은 협업을 제안 해오는 OTT 플랫폼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다. 영화 제작에 들어가는 금액과 시간은 소설, 만화와 비교할 수 없이 천문학적이기에 필연적으로 투자가 요구되고, OTT 플랫폼은 입김이 센 기존의 투자자 대신 자유로운 창작 환경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즉, OTT 플랫폼의 자체 제작 영화는 기존의 영화 제작 산업의 특징이던 하이 리크스 – 하이 리턴의 형식을 뒤흔들었다.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음에도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고 한 감독의 인터뷰는 이러한 제작 환경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다.
본래 OTT 플랫폼은 자체 제작 콘텐츠를 영화관에서 상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년, 부산국제영화제는 넷플릭스 영화인 [전,란]을 개막작으로 선정한 데 이어 올해는 무려 5편의 OTT 제작 영화를 상영하기로 했다. 그동안 극장 개봉 영화와 OTT 제작 영화는 서로 간섭하지 않는 불가침의 영역이라 여겨졌으나, 부산국제영화제는 이러한 벽을 허무는 참신한 시도를 하였다. 이는 영화제를 찾는 관객들에게 충분히 신선하게 여겨졌다.
부산국제영화제 초청 OTT 작품
- 탁류
- 로맨틱 어나니머스
- 친애하는 X
- 당신이 죽였다
- 대홍수
이러한 시도가 가능했던 이유는, OTT와 영화제는 분리된 영역이라는, 기존의 관념을 잠시 거두고 서로의 필요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OTT 입장에서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영화제에서의 홍보는 자체 영화 홍보에도 큰 도움이 되고, 영화제로서는 제작 방식만 다를 뿐 훌륭한 영화의 정수는 동일하다고 판단한 덕이다.
이처럼 OTT 영화의 영화제 진입은 변화하는 영화산업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직은 각자의 문간에 조심히 발을 들이는 수준이지만, 향후 깊은 협업을 통해 더욱 다채로운 OTT 영화를 유명 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을 듯하다. 더 나아가 OTT 플랫폼에서도 영화제 출품, 수상작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한다.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구분, 영화제와 OTT의 괴리. 뉴미디어와 기존 미디어의 간극.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는 이러한 영화계의 이분법적 갈래를 극복하기 위해 OTT 영화를 품에 안았다. 이 시도가 향후 영화산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귀추가 주목된다.
권위로의 도약 – 경쟁 영화제로의 전환
영화 포스터를 볼 때면, 칸 영화제 무슨상 수상. 베를린 영화제 이런저런 상 수상 등의 홍보문구가 흔하게 적혀있다. 이처럼 영화제 수상 경력은 시놉시스나 출연진과 함께 영화를 대표한다는 특성을 보인다.
부산국제영화제는 30회를 맞이해 비경쟁 영화제에서 경쟁 영화제로의 변신을 꾀했다. 경쟁과 비경쟁. 한 글자의 유무만 달리하여 정의할 수 있지만, 권위의 측면에서는 하늘과 땅만큼의 간극이 발생한다.
영화제는 전시회와 공모전의 중간쯤의 성격을 지닌다. 누구나 돈을 내고 관람할 수 있다는 점은 전시, 수상작을 선정한다는 점은 공모전과 비슷하다. 이 중, 비경쟁 영화제는 전시. 경쟁 영화제는 공모전의 특성이 강하게 작용한다.
전시회와 공모전은 권위에 기댄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권위의 주체는 상이하다. 창작자가 권위의 주체가 되는 전시회와 달리, 공모전은 공모를 여는 단체에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외 유명 영화제를 논할 때 비경쟁 영화제인 뉴욕 영화제 대신, 베니스, 베를린, 칸 영화제를 언급하는 것을 이러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아시아 최대 규모를 목표로 시작한 부산국제영화제는 이를 현실로 이뤄냈다. 유명 배우와 감독, 취재진이 가을이 다가오면 자연스레 부산으로 향하는 그림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부산국제영화제는 이미 일궈낸 발전에 안주하지 않은 듯하다. 단순한 전시를 넘어, 권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노력을 영화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콘텐츠 산업은 해외의 권위와 목소리에 평가와 흥행을 기대는 경향이 있다. 언론은 해외 유명 영화제에서 상을 탄 감독과 영화를 연일 대서특필하고, 한국 콘텐츠를 사랑하는 외국인을 보며 성공한 자식을 둔 마냥 큰 뿌듯함을 느끼곤 한다.
이런 국민, 민족적 성향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국가와 민족을 넘어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다 보면, 본연의 모습을 쉽게 잃어가기 때문이다. 돌아와서, 우리 스스로 권위를 갖추기 위해서는 외국이 사랑하는 한국의 모습이 아닌, 한국인이 사랑한 무언가를 직접 발굴하고 마음껏 즐기는 교류장이 필요하다.
‘한국 관객의 시선을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권위.’ 이 한 문장으로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의 경쟁 영화제 전환을 설명할 수 있다.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부산국제영화제가 대상으로 선정하고, 한국인들이 사랑한 특별한 영화가 세상을 휩쓰는 날을 기대한다.
영화인의 축제, 3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관객들은 소중하게 본 영화를 마음 한켠에 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며 다음 영화를 찾아 나선다. 어떤 영화제, 무슨 영화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