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개인의 상처가 사회적 폭력 구조와 맞닿아 있을 때, 그 치유는 과연 가능한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가장 절실하면서도 복잡한 문제 중 하나다. 특히 성폭력과 같은 젠더 폭력이 단순히 개인적 차원을 넘어 종교적 권력, 근대적 의료 시스템, 그리고 식민주의적 시각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할 때, 그 해결책은 더욱 요원해 보인다.
연극 ‘맆소녀’는 바로 이러한 복합적 폭력 구조 속에서 상처받은 존재들이 어떻게 진정한 치유에 이를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한국에서 인도로 파견된 소아과 의사 연영과 성폭력 트라우마를 겊고 있는 인도 소녀 까이의 만남을 중심으로, 이 작품은 '몸'과 '침묵'이라는 독특한 언어를 통해 언어로는 형언할 수 없는 폭력의 경험을 무대 위에 현현시킨다.
이 연극이 특별한 이유는 트라우마를 단순히 개인적 상처로 국한하지 않고, 그것이 사회적 권력 구조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예리하게 포착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권력과 근대적 의료 권력이라는 두 체계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정작 당사자인 피해자의 주체성은 어떻게 배제되는지를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은 기존 권력 체계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급진적 대안을 모색한다.

몸과 침묵의 언어: 트라우마가 말하는 방식
연영의 ‘환각’과 까이의 ‘실어증’은 모두 성폭력 트라우마로부터 출발한다. 성폭력 트라우마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어떻게 내 존재를 규정하는지와 깊이 연관되기 때문이다. 폭력은 단순히 몸에 상처를 입히는 행위를 넘어, 가해자의 시선이 피해자의 주체성을 꿰뚫고 대상화하는 과정이다. 이 시선 속에서 피해자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적 대상'이라는 정해진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
이렇게 타인의 시선에 의해 정해진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경험은 극심한 실존적 불안을 야기한다. 그 사람은 더 이상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낸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 갇히게 된다. 이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려 하기도 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혹은 그 일은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며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다.
연극에서 둘이 겪는 비정상적인 인지는 이러한 부정이 한계에 다다른 결과다. 억눌렀던 트라우마가 언어화되지 못하고 감각적으로 파고드는 셈이다. 이는 둘이 아직 과거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무대위에서 ‘몸짓’으로 반영된다. 까이가 언어를 잃었기 때문에 연영과 까이는 오직 몸짓으로만 소통한다. 둘이 긴밀하게 소통하는 과정에서 연영은 까이가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진범을 찾기 위해 분투하게 된다.
흔히 몸은 마음의 지시를 따르는 도구로 생각되지만, 무대에서는 다르다. 몸이란 그 자체로 세계를 느끼고 경험하며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진실을 기억하고 표현해내는 ‘살아있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까이의 몸짓 하나하나는 폭력의 기억이 새겨진 존재의 기록이며 그의 몸은 언어가 실패한 영역에서 폭력에 대해 쉼 없이 증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연영이 아이의 몸짓을 통해 자신이 외면하고 기만했던 과거의 고통을 직시하게 되고,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된다.
‘전통과 근대’ 두 권력 구조의 은폐된 폭력
이때, '연영'과 '까이'를 억압하는 것은 개인적인 트라우마로 국한되지 않는다. 종교와 제도라는 사회적 폭력 또한 이들의 부담을 가중시킨다.
전통적으로 종교는 개인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르치며, 고백과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감시하고 규율하도록 만들어왔다. 근대에 들어서는 국가가 과학과 의학의 이름으로 새로운 방식의 통제를 시작했다. 무엇이 건강하고 정상적인지를 정의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이들을 체계적으로 치료하거나 격리하며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관리한다.
이러한 두 권력 체계의 충돌은 작품 속에서 구체적인 갈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갈등은 연영이 까이의 거인증을 발견하고 "수술이 필요하다"고 진단하는 순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연영에게 까이의 몸은 의학적으로 "정상화"되어야 할 대상이다. 거인증은 통계적 평균에서 벗어난 "이상"이며, 과학적 수술을 통해 교정 가능한 "문제"로 규정된다. NGO 역시 처음엔 이 제안에 호응한다. 측정 가능한 의료 성과를 통해 조직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권력 체계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지점에서 정면충돌한다. 까이의 엄마인 '시마'가 수술을 거부하자 상황은 급변한다. 그녀에게는 종교적 운명과 카스트 제도 내에서의 순응이 서구 의학보다 우선한다. 브라만 계급의 승인 없는 몸의 변화는 신성모독이자 사회 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이때 NGO는 "더 쉬운 선택"을 제안한다. 복잡한 문화적 저항에 부딪히는 사업보다는 가시적 성과를 낼 수 있는 다른 프로젝트로 선회하자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 권력보다 근대적 권력이 더 ‘선’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연극은 이 질문에 ‘그렇지 않다’라고 답한다. 권력 관계의 균형이 깨지면서 극은 스릴러의 문법으로 변경된다. 본격적으로 '연영'은 '까이'를 성폭행한 범인 찾기를 시작하게 된다.
‘연영’이 ‘까이’를 다치게 한 범인으로 처음 의심하는 것은 ‘명무’다. '명무'는 NGO를 돕는 현지 어시스턴트다. 한국어와 영어, 인도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으며 아이들과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근대의 '합리성'에 의거했을 때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추론 과정 자체가 근대적 오만의 전형을 보여준다. 연영의 "과학적" 수사는 접근성, 기회, 능력이라는 서구식 범죄학 논리에 기반하고 있지만, 정작 인도 사회의 진짜 권력 구조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창녀촌 출신의 하층민 명무는 연영에게 "당연히 의심스러운" 존재로 보이지만, 실제 가해자는 사회적으로 불가침의 영역에 있는 브라만 계급이었던 것이다.
연영의 오판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식민주의적 시각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다. 그녀는 자신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믿는 추론을 통해 가장 무력한 자를 범인으로 지목하면서, 진짜 권력자들은 처음부터 의심의 영역에서 배제시킨다. 근대적 합리성이라는 도구 자체가 기존의 권력 구조를 은폐하고 약자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는 또 다른 폭력이 되고 있었던 셈이다.
재 위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희망
그런데 여기서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두 권력 체계의 공통된 맹점이다. 종교적 권력과 근대적 권력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까이라는 당사자의 주체성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근본적 한계를 공유한다. 종교적 권력은 "카스트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까이를 수동적 객체로 만들고, 근대적 권력은 "의학적 치료"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교정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두 권력 모두 까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느끼는지는 전혀 묻지 않는다.
더 치명적인 것은, 두 권력 모두 정작 진짜 폭력인 성폭력 자체는 건드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종교적 권력은 브라만 계급을 보호하려 하고, 근대적 권력은 "과학적 합리성" 때문에 진짜 가해자를 놓친다. 결국 까이가 겪은 근본적 폭력은 해결되지 않은 채 오히려 더욱 은폐된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 앞에서 연극이 제시하는 해답은 기존 체계의 완전한 파괴다. 브라만이 결국 감옥에 들어가지만, 그곳에서 진정한 처벌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카스트 권력은 감옥 안에서도 여전히 작동할 것이고, 근대적 사법 시스템 역시 기존 권력 구조를 보호할 뿐이다. 이를 직시한 사마는 감옥에 불을 지르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이 방화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다. 그것은 두 권력 체계 모두에 대한 완전한 거부이자 전복이다. 개혁이나 개선이 아니라, 아예 그 시스템 자체를 태워버리겠다는 절망적이면서도 희망적인 선언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재 위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피어난다. 쉘터는 처음부터 다시 지어지고, 그 위에서 까이와 연영은 비로소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받아들인다. 이는 기존 체계 안에서는 결코 불가능했던 일이다. 종교적 권력도, 근대적 권력도 아닌, 진정한 관계적 치유의 공간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연극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트라우마의 치유가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인간적 연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연영-까이-까이 엄마 사이에 형성된 유대는 그 어떤 권력 체계도 제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서로의 고통을 진정으로 증언하고, 함께 나누며, 상처받은 주체성을 회복시키는 관계였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비로소 '몸'과 '침묵'은 폭력의 기록에서 치유의 언어로 전환된다. 까이의 몸짓은 더 이상 상처의 증거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한 의지의 표현이 된다. 연영의 환각 역시 과거에 갇힌 증상이 아니라, 현재를 직시할 수 있는 용기로 바뀐다.
결국 이 연극은 폭력의 진정한 극복은 개별적 치료나 제도적 개선이 아니라, 기존 권력 구조의 근본적 전복과 새로운 관계적 토대의 구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급진적 메시지를 전한다. 그 메시지는 무대 위의 '재' 위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희망의 형태로 우리에게 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