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와 밈이 정책이 되는 시대, 그 불편한 미래가 이미 무대 위에 도착했다. 2025년 8월 29일부터 31일까지 안산 소극장 보노마루에서 초연된 블랙코미디 ‘맵핑 히틀러’는 유튜브 천만 구독자를 등에 업은 청년이 대통령에 오르는 과정을 통해, ‘좋아요’가 여론이 되고 댓글이 진심이 되는 순간을 냉정하게 비춘다. 예술창작공장 콤마앤드의 신작으로 ‘오픈 더 보노마루’ 초청작인 이 공연은 프로젝션 맵핑을 전면에 내세워, 1930년대 선전술이 2030년대 알고리즘으로 어떻게 재가공되는지 생생히 증명한다. 당신이 무심코 누른 한 번의 클릭이, 어떤 권력을 소환하는지 이 작품이 집요하게 묻는다.

21세기 미디어 속의 '파놉티콘'과 '규율 권력'
배경은 2035년. 유튜브 천만 구독자를 기반으로 대통령이 된 청년 ‘한들호’가 중심에 선다. 이름부터 히틀러와의 음운적 유사성을 품은 그는, 과거의 선동 기술과 현재의 추천 로직이 결합할 때 무엇이 탄생하는지 몸으로 증명한다. 주변 인물들 또한 괴벨스, 괴링, 룀의 역할이 현대적으로 ‘맵핑’되어 등장하며, 과거의 권력 언어가 오늘의 플랫폼 문법으로 번역되는 과정을 입체화한다.
무대는 처음엔 누군가의 방처럼 소박하다. 그러나 방송 버튼이 켜지는 순간, 그 방은 ‘유튜브 라이브’라는 거대한 감시 장치로 확장된다. 화면 밖 익명 시선이 들이닥치고, 실시간 댓글과 ‘좋아요’는 박수이자 채찍이 되어 주인공의 언행을 즉각 조정한다. 겉으로는 대중을 휘두르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 시선에 복종하며 더 자극적인 언어로 자신을 최적화한다. 이것이 디지털 파놉티콘의 얼굴이다.
파놉티콘은 18세기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 감옥 설계로, 중앙 감시탑의 ‘보일 수 있음’만으로 스스로를 규율하게 만드는 장치다. 미셸 푸코는 이 메커니즘을 근대 사회 전반의 규율 권력으로 확장했다. 학교, 병원, 직장 등에서 개인은 미시적 통제와 감시에 노출되고, 이를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규율한다.
오늘의 디지털 환경에서 파놉티콘은 SNS와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새로운 형태로 진화했다. ‘좋아요’와 실시간 댓글은 즉각적 규율의 신호가 되고, 감시자는 소수에서 익명의 다수로 바뀌었다. 권력은 분산된 듯 보이지만, 그 영향력은 오히려 강화된다.
유튜브 공간이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변모하는 순간, 질문은 바뀐다. 우리는 정말 자유롭게 보고 누른 것인가, 아니면 이미 설계된 선택지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복종을 택했을 뿐인가. 이 지점에서 푸코가 말한 ‘주체화’와 ‘자발적 복종’의 메커니즘이 분명해진다.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가장 강력한 복종
이러한 파놉티콘의 권력은 디지털에서 더 교묘해질 수밖에 없다. 디지털 세상에서 자발적 복종은 다음과 같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먼저 플랫폼은 계정과 대시보드, 크리에이터 스튜디오를 통해 “너는 성과를 관리하는 발화의 주체”라는 정체성을 부여한다. 주체는 자신의 행위를 숫자로 관찰하고, 데이터로 ‘고백’하며 발화를 조정한다. 이어 즉각적인 보상 신호가 습관을 길들이고, 제목과 제스처, 편집 리듬은 스스로 최적화된다. 이때 규칙은 “하지 마라”가 아니라 “그렇게 하면 성과가 떨어진다”는 메시지로 은밀하게 작동한다.
라이브 채팅의 상주하는 시선은 카메라가 꺼진 뒤에도 ‘보일 가능성’을 자기검열로 남기고, 플랫폼이 제시하는 ‘좋은 실천’은 효율의 이름으로 선택지를 미리 좁힌다. 마지막으로 알고리즘은 가시성을, 커뮤니티는 정당성을 문지기처럼 통제하여, 발화를 점점 ‘플랫폼 친화적 어법’으로 수렴시킨다. 자유를 행사한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 복종은 가장 효율적인 형식으로 완성된다.
이러한 과정이 일상화되는 순간, 무엇이 참인지 구분하는 진리 체계 자체가 바뀐다. 한들호의 유튜브 세상에서 ‘검증’은 더 이상 사실 확인의 과정이 아니라, 지표의 합의로 대체된다. 높은 조회수와 빠른 확산, 빈번한 재노출이 진실성의 표식처럼 기능하고, 알고리즘은 취사선택의 도구를 넘어 ‘가시성 = 정당성’이라는 규칙을 생산하는 보이지 않는 심판이 된다. 한들호의 발화는 팩트 체크를 통과하지 않아도, 수치의 승인과 반복 노출을 통해 ‘공유된 사실감’을 획득하며 진리의 자리를 점유한다.
구독자들은 알고리즘이 선별해 준 세계를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으며, 확증 편향은 이 선택을 공고히 한다. 이렇게 구성된 진리 체계는 반증 가능성을 줄이고 논쟁의 규칙을 바꾼다. 반대 논거는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처리되고, 반박은 ‘알고리즘이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사라진다. 진리를 가르는 기준이 검증에서 분배로, 증거의 내용에서 가시성의 배치로 이동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무대 밖의 현실에서도 같은 문법으로 생각하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가짜’를 ‘가짜’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우리는 ‘파레시아’라는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파레시아(parrhesia)는 위험과 개인적 비용을 감수하며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드러내는 발화로,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실천이다. 호응을 잃을 위험, 관계가 깨질 위험, 심지어 생계가 흔들릴 위험까지—그 위험을 인지한 채 말하는 행위만이 성과 지표가 만든 ‘공유된 사실감’을 뚫고 나온다.
무대 안에서 파레시아는 최래민의 기자회견 장면에서 처음 호출된다. 한들호의 참모로, 유튜버에서 정치인으로 전향하는 과정의 법적 절차를 검토하던 그는 정당한 요구조차 말살되는 조직의 문법에 이의를 제기하다 추방된다. 이후 야당으로 옮겨 청년위원장을 맡아 한들호의 대선 질주를 막으려 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결국 한들호에 의해 살해된다.
이는 언뜻 보면, 연극이 ‘진실 말하기’가 독재의 폭력 앞에서는 보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견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대가 암전되는 순간, 파레시아는 객석에서 다시 호출된다. 관객은 질문의 방향을 바꿔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진정한 파레시아의 출발점이다. 즉, 가시성의 규칙을 따라 말하는 대신, 가시성에 맞서 책임을 지고 말하는 것. 그때 관객은 소비자가 아니라 비판적 주체로 이동한다.
이 연극이 요구하는 결론은 단호하다. 성과의 문법에 맞춘 효율적 복종을 멈추고, 불리한 사실을 말하며, 말한 바를 삶으로 감당할 것. 파레시아의 윤리는 미학적 감동을 윤리적 결단으로 번역하라고 요청한다. 그것만이 진리의 자리를 다시 쓰고, ‘가장’의 체제를 깨뜨리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아쉬운 점 역시 존재한다. 연극은 1930년대의 선전술을 2030년대의 알고리즘에 대응시키는 데 일부 성공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을 더 정확히 경고하려면, 밈과 조회수의 급류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법적 절차의 오용, 언론 집중, 자본의 후원, 치안 장치의 선택적 집행과 맞물릴 때 체제화되는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
먼저, 히틀러의 독재 체제가 완성된 과정은 연극에서 묘사된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나치 정권 당시 선동은 권력을 ‘생산’하기도 했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권력을 정당화하고 가속하는 장치였다. 당대 상황을 더 자세히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도적 취약성, 경제 공황이 낳은 대중의 불안, 보수 엘리트와 대기업의 기회주의적 협력, 사법·관료 기구의 묵인과 편파, 돌격대(SA)와 친위대(SS)의 조직적 폭력, 그리고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과 전권위임법으로 이어지는 법적 쿠데타까지 망라해야 한다.
또한 2035년의 근미래에는 위험의 양상이 한층 거칠고 교묘해질 것이다. 선동의 주체는 더 이상 인간 인플루언서에 한정되지 않는다. 합성 음성, 딥페이크, 생성형 영상이 ‘사실’을 실시간으로 생산하고, 군집화된 에이전트가 노출과 참여를 자동 증폭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맵핑 히틀러’가 포착한 좋아요의 규율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2035년의 위험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진리의 생산·인증·유통 체계 자체의 변형에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경고가 철지난 우화로 머물지 않으려면, ‘맵핑’을 인간 선동가에서 벗어나 더 큰 담론으로 확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맵핑 히틀러’가 남기는 핵심은 분명하다. 이 작품은 선동의 기원이나 미래의 양상보다 먼저, 우리 각자가 클릭과 시선을 통해 권력의 문법을 어떻게 공동 제작하는지 직면하게 만든다. 진리는 더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책임을 감수해 말하는 것이라는 기준을 되살리라는 요청, 그것이 이 연극의 가장 단단한 교훈이다. 결국 ‘맵핑 히틀러’는 과거의 유령을 소환해 현재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로 기능하며, 시스템의 속도를 탓하기 전에 스스로의 발화와 침묵을 재조정하라는 윤리적 과제를 관객 각자에게 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