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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날과 날이 더해진 날 - 클래식 레볼루션 2025 '페스티벌 체임버의 바흐 관현악 모음곡 제2번' (9.2) [공연]

바흐와 쇼스타코비치 사이에서 취향의 기원을 묻다

by 장유진 에디터
2025.09.03 20:38

 

 

1. “온 세상이 나를 공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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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요즘 자주 하는 생각 하나가 있다.

"온 세상이 나를 공부시킨다…!"


지난 7월, 마지막 줄라이로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오중주를 관람했는데, 9월에 또다시 이 작곡가 앞에 놓였다! 이 사람뿐이겠는가? 나를 시험에 빠뜨렸던 쉬니트케랑 스트라빈스키도 당분간은 안 만날 줄 알았는데, 하필 9월 15일에 예정된 바이올린 리사이틀의 메인 레퍼토리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프로코피예프는 말할 것도 없다. 9월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까지 더해지며, 나는 올해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레퍼토리 전체를 실연으로 들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바흐는 어떤가. 늘—연이 없겠거니 했는데, 이렇게 협주곡으로 내 앞에 둥—놓였다. 연주가들은 이 작곡가를 공연의 서두에 배치해 두는 경우가 많아서, 안 듣고 싶어도 안 들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상하리만큼 내가 스스로 ‘가고 싶다’고 지정한 공연들을 살펴보면, 늘—만나는 작곡가들이 이어졌다. (연주자 이름만 보고 고른 공연인데도.) 덕분에 듣는 범위가 꽤 편협해졌다. 바르톡, 야나체크 바이올린 소나타는 들어봤으면서도 베토벤 소나타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는 걸 지난달에서야 깨달았을 정도다.


우리는 왜 공연을 보러 가는가? 이미 좋아한다는 전제 아래 있는 뮤지션을 보기 위해서, 우연히 표가 생겨서, 아니면 시간이 비어서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해서 무대를 찾지 않던가. 그렇다면 나의 경우는 어떤가. 올해 초까지만 해도, 내게 공연은 늘—멀찍이 기다려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전에는 시간이 동—동 남으니까, 담아둔 공연 레퍼토리를 담은 플레이리스트를 옆에 두고 아무 생각 없이 듣는 맛이 있었다.


사실—말이 듣는 거지, 이어폰을 타고 들어오는 소리를 귀담아 듣다 보면 문득 의문이 든다. 내가 지금 뭘—듣고 있는 거지?


‘뭘’이라는 물음에 여러 의미를 담을 수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정말 순전한 궁금증이었다. 뭔가를 분명히 듣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듣고 있는 걸까. 더 아래로 내려가 보자. 그렇다면 나는 왜 ‘뭔가’를 들으려 했던 걸까. 아마도 우연히 받았던 질문 하나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 바이올리니스트가 왜 좋은데요? 뭐가 달라요?"


그러게, 그러게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글로 생각을 풀어내던 시절도 아니었기에, 그 질문 앞에서 멈칫했다. 이유는 분명했는데,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니 단어들이 다 유치해졌다. 갑작스레 던져진 물음에 능숙히 답하지 못했던 그 순간은, 내 생각 언저리에 길게 남았다. 결국 이렇게 키보드 앞에 앉게 한 것도, 아마 그 질문 덕일 것이다.


스스로에게도 납득을 시켜줘야 하지 않겠나. 정확한 이유를 나열하기는 어려웠다. 눈보다 귀로 먼저 첫인사를 했고, 내 마음이 거기에 있다는 걸 ‘시선’이 아니라 ‘소리’가 선행하여 알려줬기 때문이다.

 

 

 

2. 취향의 기원—멘델스존에서 쇼스타코비치까지


 


 

 

그날을 회상해보자. 아마 24년 3월과 6월 사이였던 것 같은데, 나는 그때도 뭔가를 하고 있었다. 막 글을 쓰고 있었던 것 같진 않은데, 오빠 방에 있는 듀얼 모니터를 켜놓은 상태로 집중해서 키보드를 타닥타닥 치고 있었다. 한참 라흐마니노프나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에 잔뜩 마음이 쏠려 있던 시기여서 왼편 모니터엔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영상을, 오른편에는 하얀색 문서를 띄워놓고 있었다.


협주곡의 3악장 마지막 부분이 지나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자동 재생 기능이 나에게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의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띄웠다. 얼마나 집중했던지 1악장은 그냥 흘려보냈는데, 2악장 도입부에서 문득 ‘어? 뭐지?’ 하며 고개를 돌렸다. 

 

바이올린 선율 하나가 나를 붙잡아 세웠다. 처음 듣는 악기처럼 낯설고, 이상하게 오래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멘바협(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이 3대 바이올린 명곡인지, 현악기가 내가 좋아하는 소리를 잔—뜩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을 때라 더—생생하게 들렸다.


‘바이올린이 이런 선율을 그릴 수가 있어?’ 

 

그동안 내가 들어왔던 클래식은 어떤 것이었나? 클래식계를 떠들썩하게 한 아이돌 피아니스트의 화려하거나 서사적이거나 달콤한 협주곡이 대부분이었다. 근데—이건 뭐지? 왜 이렇게 다정한데—마냥—다정하진 않아? 멍—하니 화면을 쳐다보다가 3악장까지 눈길이 이어졌다. 여긴 또 왜 이렇게 또 신이 나? 그렇게 나는 잠깐 동안 화면 안의 ‘음악’과 눈을 맞췄다.


눈길이 갔다고 금방 이건 내 ‘취향’이야, 라고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꽤 취향이 편협하고, 한 번 좋아한 것에는 시선을 외골수처럼 길게 주는 편이어서, 피아노의 건반이 보여내는 서사만이 나를 기쁘게 하고 울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꾸—문득, 문득—멘델스존 영상을 찾아보게 되었다. 뭐지—이 매력… 하면서 같은 연주가의 다른 연주를 찾아봤는데.


이엥—? 이상했다. 분명히 같은 사람인데 잘 안 들렸다.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당시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특히나 현대음악? 금시초문이다. 기다랗고 어려운 이름을 가진 작곡가들(비에니아프스키, 라벨, 생각해보니 멘델스존도 사람 이름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에 1차 낯가림을 하고, 3, 4개씩 있는 소나타 형식에도 익숙치 않아 협주곡과 달리 확실한 스토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들에 2차로 뒷걸음쳤다. 

 

그렇게 아—이 길이 아닌 건가? 싶은 찰나의 24년 7월에 줄라이 페스티벌 공연 공지를 보게 되었고, 그 슈만 현악 4중주가 여기까지 나를 이끌어왔다. (참, 인생 알다가도 모르겠죠?)


오, 내가 진짜—좋아하는 게 맞구나. 라는 걸 그날 확신을 얻고 다시 나를 어렵게 했던 영상 하나를 되짚어보았다. 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이었다. 이 곡을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악장이 총 4개로 구성되어 있다. 악장의 개수가 뭐가 중요한가 하시겠지만, 그 악장별로 그리는 풍경이나 감정선 자체가 다르다. 그러니 어떤 악장은 되게 고요하고 정적인데, 다음 악장은 막 칼춤을 추기도 한다. 전체로 보면 이게 한 곡인데, 기승전결이 가요보다 훨씬 긴—맥락 안에서 꾸려지니 곡마다 단편 소설이 되는 거다.

 

 

 

 

이 협주곡에, 저 연주자로 어떻게든 적응하고 싶었던 나는 어떻게든 들어보려 했는데, 하필 내가 본 영상이 냅다 1·2악장을 건너뛴 채 3악장으로 시작하는 버전이었다.

 

아래에서 시작해서 점진적으로 상승 곡선을 그리며 감정을 쌓아야 하는데 이미 마음이 꼭대기 근처로 가 있는 3악장부터 시작해서 바이올린이 혼자 서글프고 애처롭게 우는 카덴차부터 쇼스타코비치와 첫인사를 한 것이다. 다시 의문을 가졌다. 아, 나 이 연주가한테 관심 있는 게 아닌 건가? 아니면 이 작곡가가 이상한 건가. 하면서 10걸음 뒤로 물러나 다시 멘델스존 품으로 갔다.


나의 첫 의문이 무엇이었던가? 내가 이 연주가의 소리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였다. 그래서 나는 이 의문에 답을 주기 위해 다른 연주가의 멘델스존을 찾아 들었다. 조회수가 정말 많고, 누군지는 몰라도 되게 유명해 보이는 연주가의 영상을 몇 개나 재생했다.


아—근데 이상하게 마음이 안착이 안 되었다. 왜 이렇게 느끼해? 왜 그냥 이렇게 가버려? 너무 능숙해. 너무—애절하게 해. 너무 따뜻한데…? 장점들이 분명한데, 나한테는 그게 꽤 큰 단점이 되어버렸다. 뭐지—… 하면서 다시 원래의 영상으로 돌아갔는데… 그래, 내가 좋아하는 건 이 소리와 저 길이감이다. 거기서 나의 취향을 아주 얼핏 깨닫기 시작했던 것 같다.

 

 

 

3. ‘날(現代)’과 ‘규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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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저 소리가 내 취향이다는 건 알았지만, 그다음으로 해결해야 되는 산이 많았다. 쇼스타코비치 같은 현대 작곡가들의 곡은 왜 이렇게 삐그덕거리고 뒤뚱거려? 슈만은 듣기 좋았는데, 이 작곡가는 왜 이래? 핀잔을 길게도 늘어놓으면서 비에니아프스키나 라벨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친해지며 잊을 때면 한 번씩 쇼스타코비치를 만나러 갔다.


그렇게 듣다 보니—뭔가, 뭔가가 귀에 익혀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관련 도서를 읽고 지식을 쌓은 것도 아니고, 곡 하나 듣기 전에 어떤 배경으로 작곡된 건지, 살려야 할 포인트는 뭔지를 알고 들어간 것도 아닌데—뭔가 어떤 흐름이! 들리기 시작했다.


분명 시작엔 왜 이렇게 낄낄—거리면서 소리로 깰깰거려? 했는데, 어—이 사람, 울고 있었다. 소리로 길게도—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 문장이 떠오른 순간 오랜만에 또 길게 눈을 맞췄다. 쇼스타코비치라는 사람도 마음에 기억으로 남았다. 한 번 어, 괜찮네? 싶어지니까 이름도 외워지고 왜 빠른 흐름을 가지고 있는지도 이해가 안 되었던 4악장이 ‘흥미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연주가도 이상하지 않았고, 작곡가도 잘못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이제 남은 건 무엇인가? 저 사람들이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파고들어 살펴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이 소리가 좋았던 거지? 천천히 유명 작곡가들의 곡들을 듣다보면, 금방 해결될 궁금증이라고 생각했다.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뭐, 이런 사람들 있지 않은가? 

 

다만, 그때의 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현대 음악'으로 유명한 작곡가였고, 내가 좋아하는 연주가는 '난해한 현대 음악'만 거의 골라서 하는 도전가였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서늘한 기색을 가진 낭만적인 문체를 가진 작가인 줄 알았는데, 내밀히 살펴보니 그건 게릴라성 에세이 한 편이었고, 원래는 내부세계를 거칠게 탐구하는 인간이 가지는 거칠고 암울한 감정과 전쟁 SF를 담은 소설을 주로 써왔던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장르에 ‘현대’가 붙으면 보통 어떤 느낌인가? ‘현대 음악, 현대 미술, 현대 무용…’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흰 바닥 위에 어떤 예술인 한 명이 혼자 둥—서 있고, 그 몸체 뒤로 그림자 하나가 길—게 늘어져 있는 상태가 그려진다. 그 자리에서 나무 악기를 들고 곡예를 하거나, 실험적인 전시품을 꺼내 들거나, 깡마른 몸으로 팔을 드높일 것만 같다.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현대 음악 작곡가들은 적어도 내 상상에 정확히 들어맞거나, 그 이상으로 삐걱—삐각—요옹—! 거렸다. 그런 작곡가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 몰랐다. 멘델스존이나 슈만 같은 낭만적인 곡만 듣게 될 줄 알았지, 냅다—후기 낭만과 현대를 오가며 외젠 이자이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사리아호의 녹턴, 바르톡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듣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그렇다고 또—내 스타일의 소리인 걸 너무 명확하게 알아버려서 포기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가쁜 숨을 현 위에 띄워놓는지를 내가 알아야겠어서 플레이리스트에 이 요상한 곡들을 잔뜩 끼워 넣기 시작했다. 귀로 곡예를 타기 시작한 지도 벌써—1년이 다 되어 간다. 그 시간 동안 손에 날카로운 낫(바이올린)을 하나 들고, 날(현대음악)것을 옆구리에 끼고 산 것이다!


원초적인 음색과 위험한 춤을 오래 좇다 보면 단점이 있다. ‘바로 선’ 작곡가를 만났을 때, 그 규범적임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길을 잃고 헤매는 것에 익숙한 사람한테 갑자기 지름길로 이어지는 직선 도로를 내어주는 느낌..? 너무 질서정연해서 숨이 막힌다. 초원에서 막 되지도 않는 길을 우당탕탕! 흙탕물에 발도 담그다가, 물에도 꼬르륵—빠져보고, 이명에 ‘이게 뭔 소리냐’ 하면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갑자기—두둥! 귀족 연회장 한가운데에 꾀죄죄한 상태로 놓여, 하이든과 바흐의 곡을 듣는 것이다. 갑자기—발에 밧줄이 꽉—묶여 있는 것 같고, 양손이 막 답답해진다.


일전에 하이든 현악 4중주 곡을 한 번 들은 적 있는데 곡 배경 자체도 너—무 규율적인데, 그 콰르텟 자체의 음색도 매우 따뜻한 편이어서 진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그때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규범적인 곡일수록 힘겨워지고, 소리가 날카롭게 날아오르지 못할수록 빗장을 치는구나.


‘쇼스타코비치’와 요상한 '현대 음악'이 있었기에 내가 좋아하는 ‘소리’를 ‘응시’하는 법을 배웠고, ‘바흐와 하이든’ 그리고 낭만주의 작곡가들로 연주가들의 ‘해석’이 서로 다름을 인지할 수 있었다. 한 문장씩 쌓아가는 재미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시대와 상관없이 내 시선에는 누가 ‘기본’이었고 ‘시작’이었는지 판단 내릴 필요 없이 다 좋은 기초반 선생님이었다.

 

 

 

4. 클래식 레볼루션의 ‘대비’ 큐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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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연주가들에게는 어떻게 해도 어렵게 느껴지는 ‘바흐’가 기본의 시작점이겠지만, 내 앞엔 악기가 없지 않은가? 누가 나의 '바흐'일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현대와 고전을 오가며 내 취향을 찾아 헤매던 와중에 클래식 레볼루션 2025가 내 앞에 턱—하니 놓인 것이다.


또 한 번의 바흐가 내게 찾아왔다. 그것도 쇼스타코비치와 함께! 늘 재밌게 보고 있던 인스타그램 ‘클래식 매거진’ 계정에서 열었던 이벤트에 참가했는데 9월 2일자 공연에 당첨된 것이다. (꺄~~)


당장 9월 이후로 12월까지 친해져야 하는 작곡가가 바흐였는데, 마침 타이밍이 적절했다. 더군다나 얼마 전에 광복 기념 음악회에서 협연자로 나오셨던 김태형 피아니스트도 나오신다니 너무 좋은 기회였다. 어쩜, 이 세상은 나를 이렇게 공부시키는가?


그래서 내가 쟁취한 그 공연은 도대체 어떤 것이던가?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클래식 레볼루션 2025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가 예술감독으로 참여하는 음악 축제였다.


공연 전, 예술감독 카바코스가 1분 클래식님과 인터뷰한 영상을 찾아보았다. 이번 축제의 핵심은 ‘대비의 큐레이션’에 있는 듯했다. 바흐의 질서와 정화, 쇼스타코비치의 불안과 아이러니를 나란히 배치해 두 사람의 음악을 ‘다르게’ 들어보게 만드는 것. 확실한 개성을 가진 이들이 서로 부딪히듯 맞서는 과정을 통해, 결국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 앞에 관객을 세우려고 하는 것 같았다. 


바흐와 쇼스타코비치. 솔직히 애호가나 전공자가 아니고서야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왜 중요한지 누가 알겠는가. 명작곡가라는 사실은 일반 관객에게 아무 소용 없다. 노래가 아무리 좋아도 자기소개가 불친절하면, 먼저 찾아 듣지 않는다. 다행히 나는 카바코스의 인터뷰에서 조금 더 긴—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바흐를 “종교와 세속을 아우르며 완벽한 음악을 만든 사람”, 쇼스타코비치를 “인간의 고통을 대변하는 음악을 만든 사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두 작곡가는 음악을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었다.


내가 관람했던 2일의 공연은 총 2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1부에서는 바흐의 피아노 협주곡 4번 A장조가 문을 열며 맑고 정제된 선율로 마음을 편안하게 풀어준다. 이어지는 쇼스타코비치의 현을 위한 챔버 심포니 A♭장조(Op.118a)에서는 20세기 러시아 특유의 격정적이고 아이러니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2부에서는 플루트가 중심이 되는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2번 B단조가 우아하고 경쾌한 춤곡으로 무대를 밝힌다. 마지막으로 쇼스타코비치의 현을 위한 챔버 심포니 C단조(Op.110a)가 무거운 울림을 남기며 공연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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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오랜만에 방문한 롯데콘서트홀은 여전하기도 했고, 낯설기도 했다. 잠실역과 연결된 롯데월드몰 입구로 들어가 쭉—직진하면 공연장으로 가는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어 위치 찾기는 생각 외로 간편하다. 사람 많은 2호선을 칙칙폭폭 타고 가니 대충 6시 35분쯤 되었다. 미리 도착해 있던 동행이 글레이즈드 도넛을 파는 가게에 미리 빵을 시켜놓고 기다려주어 금방 저녁을 먹고 이동할 수 있었다. 


표를 수령하고 뒤를 딱—돌아보니 클래식 레볼루션 프레임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 부스가 있었다. 말만 들었지 이렇게 공연장에 사진 찍을 수 있는 스폿이 있어서 동행과 신나하며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시작 시간으로부터 10분 전에 홀 안으로 입장했는데 이 공연장은 객석이 1층이어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야 하는 좌석이 있어서 늘—헷갈린다. 어째 매번 직원분들께 좌석 출입구를 물어보게 된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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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실내는 꽤 서늘한 편이었다. 약간 바람이 불지 않는 은은한 아이스박스 내부에 들어온 기분이랄까? 이 특유의 가라앉은 분위기가 참 좋다. 정말, 사람보다 소리를 우선시하겠다는 의지 자체가 느껴진달까… 탁 트인 시야 아래로 피아노 한 대와 현악 연주가들의 보면대가 눈에 들어왔다. 저 가운데 놓여 있는 황색의 무대 위로 어떤 예민한 웅덩이가 그려질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7시 30분이 찾아오고 오늘의 협연자인 김태형 피아니스트와 페스티벌 체임버 단원들이 무대 위로 등장했다. 멀리서 봤는데도 더하우스콘서트나 무대 영상으로 봤던 연주가들이 몇몇 분 눈에 띄었다. 그새 멀리서 (나만) 아는 사람을 발견하다니, 역시 내 알고리즘은 열일하고 있다.


무대에 차분히 조명이 떠오르고, 관객석은 어두워지는 시점이다. 바흐의 협주곡은 어떤 느낌일까?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다만 내가 누울 자리는 제대로 보고 왔다는 건 알고 있었다. 늘—몇 문장씩 쟁여가는 욕심쟁이 보부상이 아니던가? 2일의 공연을 돌이켜 봤을 때 판단이나 평가가 개입될 포인트는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감상할 명화들이 가득 늘어져 있었다. 바흐라는 숙제와 쇼스타코비치라는 난관은 길게—향유할수록 그 매력이 배가 되지 않던가? 결국 이 모든 길은 질서의 수직선과 불안의 수평선을 교차시키는 재미난 실험이겠다. 어디 한 번 천천히 떠올려보자. 

 

 

 

5. 7시 30분



바흐: 피아노 협주곡 A장조 BWV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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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I. Allegro — 빠르고 밝게

첫 음으로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세상이 내 아래에 놓여 있다. 시작점이 이렇게 분명하게 통일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확 시작해버리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당장,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바흐’가 하늘 위로 올려지고 있다. 소리가 그렇다. 당장 어딘가로 퍼져나가려는 것이 아니라 되게—체계적으로 펼쳐지고 있는데 제자리에 있다. 뭔가—앞질러 나간다는 판단 자체도 들지 않고, 곧게 서 있을 뿐인데 사방으로 음표들이 춤을 춘다.


지나치게 조화로워서 이상하다. 딱 필요한 만큼의 고저와 파도가 저 건반 아래와 활 옆으로 그려진다. 소리는 오케스트라 전체를 압도할 정도가 되는데, 현악기의 움직임이 되게 절제되어 있다. 근데 저게 몇 대가 하나가 되어 웅장함을 그려내버린다. 합이 정확히 일치되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임을 알면서도, 어떻게 하는 건지 마냥 신기하게 여기게 되는 1악장이다.


II. Larghetto — 느리고 부드럽게

장중하게 뭔가를 밀고 들어오는데, 이마저도 품위를 잃지 않는 2악장이다. 사람보다 음이, 저 연주가보다 바흐가 위에 있다. 저 소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소리의 방향성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데 바흐는 늘—위로 보내게 만든다. 약간 후대의 제자들과 애호가들이 내가 들을 수 있는 방향으로 보내길 바라는 사람처럼, 하늘 위로 높게—높게 흐르도록 작곡한 것 같았다.


나와 거리감 자체를 좁힐 필요도 없다. 이미 소리가 나한테 안 오고 내 앞에서, 아래에서 위로 향하고 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길게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정언명령이 내려지는 현장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고, ‘연주가란 이래야 한다’ 첫 기본기를 다져가고 있는 광경을 멀찍이 박스석에서 구경하고 있는 기분도 든다. 왜 이렇게 써내려갔는가에 대한 판단 자체가 들지 않는 영역이다. 바흐가 그리하였으니—그게 맞는 것이다.


더 나아갈 수 있음을 버리고,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는 의도에 따라 어린아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바흐의 시선에서 보면 그날의 모든 연주가들은 한낱 꼬마아이에 다름없지 않은가. 참으로 고분고분, 작곡가의 길을 따라가는 발자취가 보였다. 어떻게 현이 강이 되고, 활이 파도가 될 수 있는 걸까? 퀄리티가 수준 이상의 공연을 보면 그 흐름 자체가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흥을 띄워내는 순간이다. 강이 햇빛을 그 안에 섞기 시작한 것 같다. 가뜩이나 차가운 기색이 가득한 공간에 있으니 저 물자락들이 너무 예민하고 섬세하게 귓가에 담긴다. 바흐는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기에 이런 둥둥—평화와 조화의 곡조가 머릿속에 그려질 수 있는가? 어쩜 이래? 그걸 그대로 종이 위에 인출한 것도 신기하지만, 이걸 여태까지 보존한 사람들도, 일찍이 그 가치를 알아본 사람도 신기하다.


약간 고전 명화를 그리는 과정 자체를 내가 지켜보고 있는 기분도 들었다. 결국—뭔가를 완성하는 길인데, 너무 완성도가 높은 붓들이 가득해 붓선이 뭘 그리고 있는지 전체적으로 응시가 어려웠다가 3악장쯤 되니까, 아—긴 빛 아래의 풍경을 그리고 있음이 그제서야 인식되었다. 때로는 애잔하게 내려앉아 바닥선으로 향했다가, 피아노의 인도에 따라 서서히 움직임을 이어간다.


III. Allegro ma non tanto —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3악장이 시작되며 조금 더 자연을 닮아져 있다. 내가 예습했던 음원보다 피아노와 현악기가 조화롭게 흘러갔다. 김태형 피아니스트는 진짜 가볍고—실크 깃털처럼 저 위를 오간다. 피아니스트마다 다 똑같이 물방울을 튀어오르게 하는 것은 분명한데, 보이는 힘이나 모양새가 서로 제각각인지 너무—신기하다.


누구는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거나, 꾹—꾹—마음을 담아내던데, 여기는 하나하나 얇디얇은 것이 건반 위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버린다. 화려한 기교가 아니더라도, 예쁜 소리를 막 그리려 하지 않아도 표현되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그게 이 악장에 가득했다. 과시할 필요 없이 저 소리와 이 소리가 함께이기만 하면 된다. 어디가 끝인지 굳이 목격하지 않더라도 괜찮겠다—싶을 때쯤, 되게 가볍게 내려앉아 일순에 이별한다.

 

 

쇼스타코비치: 현을 위한 체임버 심포니 A♭장조 Op.11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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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바흐 다음의 쇼스타코비치는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사실 이 곡은 예습했던 4곡 중에 제일 흥미도가 떨어졌던 파트였다. 내 귓가에는 다른 곡들에 비해 생동감이 떨어지게 들렸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연주가에게 의탁하는 편이 좋다. 저 사람들이라면 나를 필히—설득시켜 놓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I. Andante — 느리게

저봐—어떻게 첫 음에서 이런 '세계관'이 그려지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바흐가 윗전의 빛이면 쇼스타코비치는 아랫목의 그늘이다. 고개를 그렇다고 내릴 필요도 없고 시선을 낮췄을 때 보여지는 시야의 그림자겠다. 스멀스멀—까만 저음의 것이 불러와지는 기색이 있다. 근데 저 송진 묻은 것에 정말 뭐가 있는 건지 막—파형을 다 같이 그려내니까 광경 자체가 너무도 낯설다.


생각해봐라. 저들이 손에 지금 얹고 있는 건 결국 다 나무다. 나무가 기둥을 내리고 서 있는 것이다. 자연을 든 인간이 저 아래에서 자연을 그리고 있다. 너무나도 이상하다. 내가 나보다 몇천 배는, 아니 말로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자연의 일면을 발끝에 놓고 눈을 맞춰도 되나 싶었다. 


내 뒤에 있다가, 옆으로도 왔다가, 때로는 앞으로 나와버리는 ‘까만 마음’을 타인의 손 안에서 목도할 수 있겠는가? 이래서 클래식이 교양인가 싶다. 평소에 아무것도 아니라 무시해버리는 것을 스스로 떠올리게 하고, 눈을 기어코 마주하게 한다. 일상을 살아가며 언제 우리가 ‘미묘한 긴장과 암시된 불안’을 ‘편안하게’ ‘남의 일처럼’ 볼 수 있나? 굳이 뭐 그런 걸 봐야 되나 싶겠지만, 그걸 굳이 또 보는 색다름이 있다. 작곡가들이 꽤 예쁘게도 담아놨기 때문에.


II. Allegretto furioso — 빠르고 격렬하게

저봐라, 갑자기—거인의 발자국을 쾅—쾅—눌러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대략 17명 안팎의 편성으로 어떻게 대형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툭—하고 가져와 버리는지 모르겠다. 프로들은 원래 이게 기본인 건지, 연습을 미리 다 각자 해오신 건지, 타이밍 계산을 기가 막히게 하신 건지 궁금하다. 그렇다고 막 한 명이 이끌어가 버린다는 느낌보다는 세 팀으로 철저히 역할을 나눠 가진 채 ‘추상화’를 공중에 흩뿌린다.


어찌 저래요? 고혹적임을 전제로 한 박진감을 느껴보신 적 있는가? 이제 보니 오늘의 연주가들은 대놓고 막—날아다니진 않는 것 같다. 내가 아는 그 날것보다 조금 더 정제되어 있고 하나의 흐름으로 폭풍을 충분히 불러오는 것 같다. 다수의 숨이 호흡을 맞춰야 하는 시간이 아니던가? 개인의 개성은 한 수 접어두고 쇼스타코비치의 마음의 그늘을 사방으로 뻗어내고 있었다.


탄압 속에서도 끝끝내 펼쳐내야 하는 것이 도대체 뭐길래 끊임없이 손을 움직이는가? 그림의 영감이나 글감의 이끌림은 느껴봤어도 음악적 아이디어는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내 머릿속에선 그의 기다란 생각 골짜기를 이해하긴 여간 쉽지 않을 것 같다.


III. Adagio — 아주 느리게

모든 판단이 가라앉는 시간이다. 사람이 바닥에 뉘어 있는데 뭐라 잔소리할 것인가? 아까 세로선으로 길게도 삐걱거렸으면, 이제 죽—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물을 흘려보낼 시간이다. 꼭 이 사람은 포효하고 나서 다독이거나, 울부짖는 시간을 마련해주는 것 같다. 다정한 사람이려나? 자기 연민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원래 스스로에게 가장 큰 애처로움을 가지지 않던가—. 그 기분을 그대로 가져간 채로 길게 노래하면 충분하다. 굳이 기분을 드높일 필요도 없다. 자기가 써낸 곡조가 스스로에게 더없는 위로이지 않았을까? 우리의 글이 미래의 나를 되살리는 것처럼. 


IV. Allegretto – Andante — 경쾌하게 → 느리게

참—알다가도 모를 장난꾸러기 같다. 절대 위로는 안 올라온다. 멀찍이서만 꼬물거리며 소리를 모아대다 서서히, 또 함께 요란하게 쫑알대더니 앞으로 막 뒤뚱거리며 발걸음 친다.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 같기도 하고… 울고 있는데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가만보면 이 악장에서 어디까지 가라앉았는지 알 수가 없다. 난 완전히 가버리는 줄 알았는데 시끄럽게 발걸음하다가 서서히 사라져 버린다. 진짜 어디 가세요…?

 

 

바흐: 관현악 모음곡 2번 b단조 BWV 1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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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장이 꽤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길래 이걸 파악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역시나 못했다! 그럴 땐 쭉—한 줄의 길로 들으면 되지 뭐가 문제겠나. 인터미션 때 잠깐 나가서 야외 테라스에서 사진도 찍고 깔깔—거리며 웃고 들어오는 바람에 금방 집중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전혀 문제 없었다.


사실 무조건적으로 연주가들을 뚫어져라 응시하지 않더라도 볼 게 꽤 많다. 롯데콘서트홀 중앙 벽 멀리 있는 파이프 오르간을 본 적 있으신가?


기다란 은색 파이프들이 일렬로 죽—놓여져 있는데, 중간 정도에선 천장 조명이 V자 형태로 비스듬히 내려와 그 파이프들을 받아낸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익숙한 바흐의 선율을 듣는 재미가 있다.


익숙하다고? 이상하게 이 곡의 1악장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하는 기분이 들었던 곡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다음에 앵콜로 나왔던 바흐  바이올린 파르티타 No.1 나단조 BWV1002 - I. Allemanda 때문이었다. 이미 들어본 선율이 비슷하게 느껴지니, 괜히 더 반가웠다.


거기다 이번 곡에서는 하프시코드(바로크 시대에 주로 쓰인 건반 악기)와 플루트가 중앙에서 연주의 화음을 더해주니, 소리 자체가 따라갈 길이 훨씬 넓어졌다. 진짜 조화롭게도 쌓아 올린다. 하늘로—높이, 높이—얼마나 길게 닿고 싶어하는 걸까?


파이프 오르간을 길게도 보다가, 문득 연주가들을 구경했는데 정말 조그마한 반원의 세 조각 케이크 모양의 대형 같다는 생각을 했다. 크게 악기별로 세 갈래로 나뉜 사람들이 긴 촛불을 우아하게 그려내니 봐도—봐도 신기하다. 풍경 한 번, 사람 한 번에 시선을 주고는 곧장 더 높은 천장 위를 응시했다.


롯데콘서트홀의 천장 위에는 하얀색 단풍잎 모양의 지지대 같은 게 달려 있는데, 그 아래로 조명 장치가 복잡하게 매달려 있다. 지지대 너머는 아주 새까맸다(그림자). 바흐의 소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내려다보는 위치가 아니던가? 너 시선에선 머리만 보일 텐데,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가?


요상한 상상력이 나를 뒤덮을 즈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음들이 평화의 곡선 안에서 이별할 듯 오래도록 머무르다가, 부드러운 춤을 추며 차분히 가라앉았다.

 

 

쇼스타코비치: 현을 위한 체임버 심포니 c단조 Op.11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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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Largo — 느리고 엄숙하게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보고 3일 만에 쓴 곡이라고 했다. 1악장에서 묘사하고자 하는 풍경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방을 둘러보며 좌절하는 마음 자체를 담고 있는 걸까?


II. Allegro molto — 매우 빠르게

잊었던 살상과 총성이 누군가의 기억에서 리플레이된다. 격변과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뭐 하나 진정할 수 없는 뜀박질이 귀족적으로 그려진다. 웬 귀족? 그냥—그들이 걷는 모양새가 마냥 날뛰는 난쟁이 같지 않았다. 체계적으로, 바흐처럼 정직하되 핏빛 어린 호숫가로 뛰어드는 소리다. 어린아이도, 노인도 피해 갈 수 없는 총구 앞에서 모두가 죽음에서 도망친다. 팔 한쪽이 뜯긴 상태로. 다리에 총알이 박힌 채로.


III. Allegretto — 상당히 빠르게(경쾌하게)

이 난장판과 상관없는 자가 검포도주를 한 손에 얹은 채 장난감들이 팔다리를 잃어가는 광경을 흥미롭게 응시하는 모양새다. 남 일 아니던가? 저 뒹구는 핏기 어린 눈알도, 뜯겨진 머리카락도, 댕강 떨어져 있는 왼손도, 입안의 감칠맛을 망치진 않는다. 그 정도의 맷집도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사람도 아니었겠다. 피가 흐르든지 말든지… 맛만 좋으면 되고, 듣기 좋은 음악이 끊기지만 않으면 더 잃을 목숨도 없겠다. 지긋지긋하고 더러운 인간. 욕심에 끝이 없어 인간의 피로 대양을 이뤄내야만 만족을 알겠구나.


IV. Largo — 느리게

세 번씩 반복되는 생사의 갈림길을 지나와 머릿속이 하얘져버린 사람의 희멀건 시야가 눈앞에 드리운다. 사고 자체가 정지된 순간이다. 육신이 숨과 완전히 이별한 후, 대지로 되돌아가는 길을 가련하게 여기는 누군가의 손길이 바이올린을 타고 영혼을 위로한다. 그 사이에도 어떤 이는 목이 잘리고, 숨통이 끊긴다. 어깨가 축—내려앉아 있다. 이제서야 평화로워진 것이다.


V. Largo — 느리게

내 호흡이 어째서 너에게 고난이었는가? 이유 따윈 존재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닿지도 않을 곳에 눈으로라도 울음을 토해낸다. 말할 입을 잃었기 때문이다. 뻗어낼 팔이 도려내졌기 때문이다. 뒤쫓아갈 두 다리가 흙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원망마저 사라질 이 다음이 오기까지, 끝없이 다 털어내려는 오기 어린 먼지들이다. 사람이라면 그럴 자유 정도는 있지 않던가. 네가 사람인 것처럼. 나도 사람이니까.

 

 

 

6. 10시가 다 될 무렵에—책 한 권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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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래서 좋아했었지

공연이 끝나고, 연주가들이 무대에서 저들끼리 뉴스데스크의 앵커들처럼 포옹을 하며 무대 밖으로 빠져나가는 사이 우리도 곧장 로비 밖으로 향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오늘 공연 자체가 참 ‘깔끔’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잔향이 막—마음속에 길게 박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는 게 없다는 말도 아니다. 아주 개운하게 바흐—쇼스타코비치—바흐—쇼스타코비치를 번갈아 음미한 것 같았다. 연주가들이 작곡가들의 이미지를 확실히 대비시켜 캐릭터성을 강조하기보다, 차분히 그들의 생각을 감미롭게 ‘음미해보는 시간’을 제안하는 이미지가 더 강했다.


까만 음표들의 화음을 잘 듣고 온 기분이랄까. 내가 이런 수준의 소리를 늘상—기대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에는 도대체 어떤 게 정말 좋은 공연일까? 화음일까? 확신을 가지기엔 경험치가 꽤나 많이 부족하지 않았던가. 내가 지금 집중이 안 되는 건 그냥—사실 내가 뭘 잘 모르기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안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좋은 소리’와 ‘제대로 된 연주’가 어떤 시작음을 통해 발현되는지, 얼핏—보이는 것 같다.


나는 늘 확인이 필요했다. 내가 제대로 듣고 있는 게 맞나. 사람들이 말하는 그 어리지 않고, 제대로 된 음의 형태는 도대체 뭘까? 분명한 선명도를 가지고 하나가 되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충분히 저 안에서 노니는 사람들 안에서 이 의문의 힌트를 살짝이나마 얻을 수 있었다.


—어딜까, 그 엄지가 자리할 곳

같이 공연을 관람한 동행에게 어느 부분이 가장 좋았냐고 물었더니, 인터미션이 끝난 후 쿵—쿵—거리는 어떤 악장에서 꽤 괜찮은 부분이 있어 내 쪽으로 ‘엄지’를 날리고 싶었지만 방해가 될까 봐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아, 하지!” 하면서 못내 아쉬워했다.


만족스러운 부분을 찾아 오래—기억하는 재미를 안고 있는 요즘이 아니던가. 내 예상으로는 쇼스타코비치의 마지막 곡일 것 같았는데, 그렇게 끝쪽은 아니라고 하니 일단 열린 결말로 두는 수밖에 없겠다.


—어우, 일단 쉬니트케부터

아—좋은 책을 딱, 길지도 짧지도 않게 읽고 나온 기분이었다. 마침 동네로 돌아오니 날씨가 미묘하게 선선했다. 이제 9월이라 그런가, 가을 바람을 살짝 불러오는 것 같았다. 얇팍한 기대감이 스르르 따라왔다.


그래서 오늘 공연으로 바흐와 쇼스타코비치 사이에서 무엇을 느꼈냐고? 뭐—큰 깨달음 같은 건 없고, 그냥 충분히 바라보다 왔다. 내가 이래서 클래식을 길게도 봤었지. 나 같은 사람도 저 사람들의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구나. 음의 합과 시작은 공간 자체를 새롭게 탄생시키는구나. 매번 마주쳐도 적응되지 않는 이 생경함 때문에, 결국 나는 이 공간들에 마음을 빼앗겼구나… 하는 정도였다.


결국 별거 없지 않은가? 이 세상이 나에게도 조금씩 옆틈을 내어주는 것 같다. 무엇보다 아직 내가 두 작곡가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레벨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그저, 살짝 창문틈을 열고 오늘은 또 무슨 곡이 있으신지 스리슬쩍 구경하는 정도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내 앞에 음료수 한 잔쯤 놓아줄지 누가 알겠는가. 오늘 내일은 그렇게 지내다가 바흐와 쇼스타코비치는 서랍장 맨 위칸에 잠깐 눕혀두고, 아랫칸을 살짝 열어보자. 뭐가 있나? 어머, 쉬니트케가 있네. (호호…) 프로코피예프도 아직 남았다. 클래식의 세계란, 정말 끝이 없는 것 같다.


날것들 사이에서도 나만의 ‘날’을 들고 있으니 (번쩍) 길을 잃진 않겠지. 걱정해서 무엇하나. 이렇게 열심히 공연을 보러 다니며 수련하는데! 내 귀가 잘 협조해 준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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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랑 서서히 친해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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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블마
피아니스트 김태형님 기사가 많아져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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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31 15:22:1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