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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뮤지컬 <멤피스(Memphis)>가 2025년 6월 17일부터 9월 21일까지 서울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을 바탕으로 한 주크박스 뮤지컬 <올 슉 업(All shook up)>의 대본을 맡기도 했던 조 디페트로(Joe Dipietro)의 극본을 기반으로 데이비드 브라이언(David Brayn)이 작곡을 맡은 뮤지컬 <멤피스>는 미국 메사추세츠 주와 캘리포니아 주에서 2003년 초연되었다. 그 이후 2009년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2010년 토니 어워즈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대본상을 포함한 4개의 상을 받고 그 이후 웨스트엔드를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공연되었다. 한국의 경우 제작사 쇼노트(shownote)에서 김태형 연출과 양주인 음악감독의 합작으로 2023년 라이선스 초연을 올렸으며, 현재 재연이 공연되고 있다.

 

사회 분위기가 보수적이었고 인종분리 정책이 극심했던 1950년대 남부 테네시 주의 도시, 멤피스는 뮤지컬 <멤피스>의 배경이다. 이 곳은 로큰롤이라는 장르의 전설적인 인물인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향이면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세상에 알린 라디오 DJ, 듀이 필립스가 활동했던 곳이다. <멤피스> 속 DJ 휴이 칼훈(Huey Calhoun)의 모티브가 된 인물인 백인 라디오 DJ 듀이 필립스(Dewey Phillips)는 WHBQ의 라디오 쇼의 진행자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데뷔 음반을 내내 틀어 ‘흑인 음악’을 대중화하는 것에 기여하고 전성기를 누렸지만 본인과 관련이 없는 페이올라(뇌물) 스캔들의 여파로 방송국 프로그램 편성 권한이 방송국 프로듀서로 옮겨가면서 해고된 뒤 10년간 작은 라디오 방송국에 일하다 1968년 42세의 나이로 이른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또한, <멤피스>의 또 다른 주인공 펠리샤 패럴(Felicia Farrell)을 비롯해 많은 흑인 캐릭터들이 거주했던 멤피스의 ‘빌 스트리트’(Beale street)는 흑인 민권 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연설 중 백인 우월주의자에게 암살당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뮤지컬 <멤피스>는 ‘로큰롤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테네시 주 멤피스에 깊이 각인된 로큰롤 음악의 역사와 극심한 인종주의의 흔적을 바탕으로 가상 인물인 흑인 가수 펠리샤와 백인 DJ 휴이의 사랑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어 낸다.

 

 


낭만적인 음악과 현실적인 폭력의 공존, 1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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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멤피스>의 1막은 술에 취한 채 흑인 전용 클럽으로 ‘내려가는’ 백인 휴이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흑인과 백인의 ‘공간’을 분리하는 정책, 즉 ‘분리 평등 원칙’(Separate but equal)과 짐 크로 법(Jim Crow laws)*이 시행되고 인종차별의 근간이 되는 분리가 당연한 것이라는 인식이 상식으로 통하던 시기, 휴이의 행동은 금기를 건드린 것이었다. 펠리샤의 오빠 델레이의 솔로로 시작되는 <멤피스>의 첫 넘버,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는 그 당시 흑인들의 존재론적 지위를 은유한다. 휴이는 지하 흑인 전용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펠리샤를 보고 첫 눈에 반하고, 자신을 경계하는 델레이와 다른 흑인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펠리샤에게 라디오에서 펠리샤의 음악을 틀어주겠다고 약속한다. 라디오 방송국들의 문을 두드리다 거절만 당하던 휴이는 시몬스 사장이 운영하던 WHDZ에서 고전적이고 따분한 음악 위주로 진행하는 기존의 라디오 DJ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흑인 음악 레코드를 트는 ‘모험’을 한다. 이 무모한 시도가 청취자의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휴이는 정식 DJ가 되고 이는 휴이와 흑인 음악 장르의 급격한 유명세를 가져오지만, 동시에 개인에게는 위협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1막의 중반부를 넘어가며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은 휴이가 라디오를 통해 전파시킨 흑인 음악 열풍 속 발전하는 펠리샤와 휴이의 사랑과, 그에 수반되는 현실적인 방해물이다. 휴이의 엄마 글래디스는 펠리샤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휴이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펠리샤의 오빠 델레이는 휴이와 말다툼을 하기도 한다. 이때 델레이는 어린 시절 백인 전용 식수대에서 물을 마시다가 칼을 맞았던 과거를 이야기하며 펠리샤와 가까워지면 펠리샤가 위험해진다며 욕설(원어로는 ‘레드넥’Redneck**)을 섞어 경고하기도 한다(‘She’s my sister’). 굳건한 인종분리 정책이라는 비관적 현실 속 흑인 음악의 유행은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창작자들의 자의식이 반영된 비현실적인 극적 믿음에서 기인한 서사적 장치라면, 그 속에서 발생하는 생경한 폭력의 외상은 무엇보다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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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카두(Hakadoo)!를 입버릇처럼 외치며 인기를 얻은 휴이의 성공을 알리는 넘버 ‘Radio’에서 화면으로 제시되는 시 의회가 휴이의 콘서트를 금지하려고 한다는 맥락의 신문 기사의 대조에서 나타나는 대중적 인기와 공권력의 충돌 같은 부분에서부터, 실제 물리적인 폭력의 모습마저 무대 위에 등장한다. 휴이의 집을 향해 날아와 창문을 깬 ‘경고용’ 벽돌과 흑인 음악을 들었다고 아버지에게 뺨을 맞는 어린 백인 소녀의 모습은 극적 전개에 더욱 긴장감을 부여하고, 그러한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흑인 음악을 즐기는 휴이나 그 이후에 빌 스트리트 속 흑인 교회에 찾아오는 백인 소녀의 모습은 왜 사회의 거대한 진보 앞에 폭력은 무력화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상기시킨다.

라디오 데뷔에 성공한 펠리샤와 휴이가 서로를 향한 사랑을 확인하며 1막은 내적인 절정으로 향한다. 동시에 긴장을 통해 쌓아 온 폭력의 분위기도 터져버리는데, 비밀연애를 하던 펠리샤와 휴이가 백인 양아치 무리의 눈에 띄면서 린치를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친 상태로 클럽으로 들어온 펠리샤와 휴이를 보며 델레이는 휴이에게 했던 경고가 비극적인 방향으로 실현되자 분노하고, 그러한 델레이를 말리기 위해 실어증에 걸린 채 살아왔던 게이터***가 입을 열고 갈등이 연대의 분위기로 바뀌며 1막은 1막이 목표했던 결말로 향한다. 펠리샤는 클럽에서 구급차를 타기 위해 델레이의 부축을 받고 계단을 오르며 1막의 막이 내리는데, 음악이 이끄는 사회적 진보와 그에 수반되는 반동적인 힘, 일종의 ‘백래시’의 폭력 속에서 그 이후의 펠리샤는 솔로곡 ‘Colored woman’에서 언급되었던 어둠 속에서 나오겠다는 다짐을 역설적으로 실천하게 된다. 마치 흑인 민권 운동의 역사가 수많은 폭력 피해의 경험으로 발전했던 것처럼 말이다.

 

흥미로운 포인트는 1막 초반과 후반의 수미상관이다. 1막이 시작되고 지하의 흑인 클럽으로 ‘내려가던’ 휴이의 모습은 1막 후반부 테러를 당하고 병원에 가기 위해 부축을 받으며 지하 클럽 계단을 타고 땅 위로 ‘오르는’ 펠리샤의 모습과 이동성이라는 차원에서 겹치면서 동시에 방향적으로는 대조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비는 2막에 진행될 그들의 운명을 예감하는 것만 같다. 마치 펠리샤가 부르는 솔로곡 ‘단 한번의 키스’(Ain’t nothing but a kiss)와 ‘Someday’가 그들의 결말을 예고하듯이 말이다.

 

* 남부의 여러 주에서 흑인과 백인의 분리를 규정한 법으로, ‘평등’이라는 명목 아래 ‘분리’를 규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흑인에 대한 차별을 낳았다. 결국 1960년대 중반 행정부와 연방 의회에 의해 여성과 인종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 금지가 명시되어 있는 일종의 포괄적 차별 금지 법안이라고 할 수 있는 ‘민권법(The Civil Rights Act)’이 제정되면서 폐지되었다.

 

** 레드넥은 도시가 아닌 지역(특히 남부 시골)에서 흔히 사는, 교육수준이 낮고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는 백인을 비하하는 멸칭이다. 한국 라이선스 공연에서는 단순히 욕설로 번역되면서 그 뜻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휴이가 난독증이 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제법 ‘뼈 있는’ 호칭인 셈이다.

 

*** 게이터가 실어증에 걸린 이유는 어렸을 때 게이터의 아버지가 교수형당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라고 펠리샤의 대사에서 언급된다. 미국 내 흑인 민권 담론의 주요 의제 중 하나는 사법적 영역에서의 불평등이다.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흑인이 백인보다 더 처벌받고, 특히 사형 선고와 집행에서 그 차이가 극심하다. 특히 흑인 남성은 오판의 가능성이나 (BLM 운동을 촉발한 사건에서 알 수 있듯) 공권력 남용의 차원에서도 불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게이터의 이러한 설정은 미국 사법체계 속 인종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씁쓸하지만 아름다운 드라마와 그 음악의 결말, 2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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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멤피스>의 특이한 점은 1막과 2막이 각자의 기-승-전-결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1막이 라디오를 통해 전파된 흑인 음악이 분리된 공간을 흐려지게 하는 과정과 그 속에서 펠리샤와 휴이가 점차 가까워지는 모습을 그려냈다면, 2막에서는 라디오를 넘어 TV 방송국에서 TV 쇼를 진행하게 된 휴이와 멤피스에서는 유명한 가수가 된 펠리샤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1막이 인종차별이 극심한 상황 속 실제로 물리적인 폭력의 조각들을 보여주었다면, 2막에서는 뉴욕에 갈 것인지, 멤피스에 남을 것인지에 대한 휴이와 펠리샤의 의견 대립과 함께 ‘흑인 음악’으로 대표되는 소수자성이 주류 미디어에 수용되기 시작하면서 어떠한 난관과 딜레마를 마주하게 되는지가 묘사된다. 흥미롭게도 이는 흑인 민권 운동을 포함한 여러 민권 운동(소위 정체성 정치라고 불리는)이 미국 사회에서 점차 정상성과 주류 규범과 타협하면서 주류 사회로 편입되는 20세기 후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보편적인 매체가 라디오에서 tv로 점차 옮겨가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사회가 점차 바뀌어 가는 과도기의 혼란은 기회와 위기가 공존하는 모순적인 시대상으로 나타난다. 1막에서 펠리샤에게 거리감을 느끼던 휴이의 어머니 글래디스가 휴이가 소개한 흑인 교회에 가게 되며 마음을 열고, 휴이가 멤피스 라디오 DJ이자 TV 쇼의 진행자로 이름을 날리며 펠리샤 역시 멤피스의 유명한 가수가 된다. 이처럼 휴이와 펠리샤의 사랑을 막던 외적인 방해물들은 2막에서 점점 제거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사회와 법적 변화를 기다리면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제 문제는 휴이와 펠리샤, 그리고 흑인 음악 장르가 유명세를 얻으며 그 유명세를 자본화하려는 흐름 속에서 나타나고, 위기는 견고한 것처럼 보이던 펠리샤와 휴이의 관계로 향한다. 뉴욕에서 온 프로듀서는 펠리샤와 휴이를 스카우트하려고 하지만, 그들의 팀 전체가 아니라 둘만 스카우트해 스타일링을 바꾸고, 팀 내부의 흑인 댄서들을 교체하길 원한다. 장르가 거대 자본 속으로 포섭되면서 겪는 흔한 딜레마는 댄서를 교체하는 조건이 있더라도 뉴욕에 가려는 펠리샤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휴이의 차이로 분화된다.

 

쇼를 위한 스펙타클과 시대를 관통하는 역동적 드라마가 공존하는 2막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바로 대기실에서 휴이와 펠리샤가 의견 차이로 인해 현실적으로 대립하는 대화 장면이다. 뉴욕에서 온 투자자와 프로듀서 앞에서 그들이 요구한 단정한 옷(‘장의사 옷’)을 풀어버리고 댄서들과 함께하겠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밝히는 휴이의 무대 뒤에 이어지는 언쟁 장면은, ‘현실적인 커플’의 감정으로 거대한 시대가 낳은 모순을 다루고 있다. 펠리샤가 뉴욕에 가려는 이유는 단순히 더 크게 성공하려는 물질적 욕망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191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많은 흑인들이 자유와 안전을 위해 남부에서 북부로 이동했던 ‘흑인 대이동’ 사건에서 참고할 수 있듯, 멤피스 역시 흑인들에게 위험한 공간이었다.

 

댄서들을 교체하라는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려는 펠리샤에게 휴이는 ‘너보다 내가 더 빌 스트리트 사람 같’다고 언급하지만, 휴이에게 ‘너는 절대로 빌 스트리트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대답한 펠리샤는 휴이가 백인이기에 가능했던 특권들을 상기시킨다. 흑인이자 여성인 펠리샤의 계획과 ‘선택’은 그렇지 않으면 다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것이었기에 펠리샤가 느껴 왔던 자신을 향한 제약과 제한된 기회 구조는 도전이 얼마든지 가능했던 백인인 휴이가 감각하는 ‘환경’과 다를 수밖에 없다. 휴이의 낙관성 속에는 오만함이 있고, 이는 지속적으로 델레이가 휴이에게 경고해왔던 것의 연장선에 있다. ‘흑인 음악’을 유행시켰다는 휴이의 자신감과 오만함은 냉정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펠리샤의 말에 변곡점을 맞이한다. 당장 휴이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듀이 필립스가 전파시켰던 ‘엘비스 프레슬리’마저도 흑인 음악을 ‘훔쳤다’는 혐의, 즉 문화 전유 이슈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처럼 자의식이 넘치던 휴이가 펠리샤와의 대화를 통해 조급함과 불안함이라는 정서를 가지게 되는데, 동시에 ‘쇼’라는 급박한 현실 속 결여된 성찰성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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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2막 전체의 드라마를 이끄는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휴이와 펠리샤의 갈등이 불완전하게 봉합된 채로 TV 쇼가 진행되고, 휴이가 펠리샤에게 갑자기 키스하면서 방송이 중단되며 그들의 운명은 갈라지게 된다.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이 있던 시절, 공개적인 장소, 심지어 방송 중에 둘의 관계가 알려지는 것은 그 둘을 포함해 방송에 참여하는 출연진과 스태프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휴이는 멤피스에 있으면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하고, 흑인 음악을 전파시킨 ‘혁명’의 주체였지만 흑인 음악이 보편화된 이 순간 그는 아무리 인기 있는 진행자여도 한 순간의 ‘물의’만으로 빠르게 대체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펠리샤는 휴이에게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대도시이자 더 ‘안전한’ 뉴욕으로 가자고 제안하지만, 휴이는 멤피스에 남겠다고 하며 펠리샤를 보내준다. 4년 뒤, 펠리샤는 미국 투어를 갈 정도로 유명한 가수가 되어 있고 휴이는 여전히 시몬스가 운영하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다이얼을 끝까지 돌려야 나오는, 청취자가 별로 없는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멤피스의 모두가 휴이에게 환호하던 과거를 생각한다면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은 마치 (앞서 언급했던) 펠리샤의 히트곡, ‘Someday’와 ‘단 한번의 키스’의 가사를 생각나게 한다.

 

무모했기에 혁명적이었던 과거의 영웅, 휴이가 멤피스뿐만 아니라 온 미국이 환호하는 스타가 된 펠리샤를 마주했을 때 희망적이다 못해 자만했던 과거 그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어 있다. 전성기 시절의 자신감 넘치던 휴이의 모습은 빛이 바랜 사진처럼 과거에 머물러 있고, 현재의 초라해진 휴이는 약혼자가 생긴 펠리샤에게 미련이 있어도 표현하지 못한 채 물러설 뿐이다. 그런 휴이에게 펠리샤는 현재의 성공한 자신을 만든 그의 과거에 대한 경의를 담아 자신의 콘서트에 스페셜 게스트로 참여해 줄 것을 제안하고, 펠리샤의 ‘콘서트’라는 형식을 통해 <멤피스>의 ‘킬링 넘버’인 ‘Steal your rock ‘n’ roll’이 이어진다. 펠리샤가 살아온 삶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 휴이와의 갈등이 씨앗이 되었지만, 동시에 펠리샤의 제약 조건이 붙은 환경을 넓게 확장하도록 가능성을 열어 주고 한계를 극복하는 것에 도움을 준 이가 휴이였기 때문에 결말에 펠리샤가 휴이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이다. 펠리샤의 콘서트에 스페셜 게스트로 참석한 휴이는 펠리샤를 통해 실패로 기억될 자신의 과거를 다시 재의미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며, 펠리샤의 콘서트 속 흑인 댄서들의 모습은 펠리샤의 음악의 방향과 그의 선택이 가지는 가치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한국 라이선스 공연에서는 의역되었지만, ‘누구도 너의 음악(로큰롤)을 훔치게 두지 말라’는 원어의 가사에 녹아든 ‘자긍심’의 의미 속에서 이 텍스트는 단순한 해피엔딩 대신 현실적이고 여운이 남는 열린 결말을 택하며, <멤피스>는 달콤함과 씁쓸함 그 사이에서 막을 내린다.




한국 뮤지컬 장(場) 속 라이선스 뮤지컬 <멤피스>의 (불)가능성


 

뮤지컬 <멤피스>가 한국에서 라이선스 초연을 올렸을 당시부터 외적 위험 요소로 꼽히던 것은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에서 ‘다문화 담론’으로 이제서야 겨우 이행하고 있는 현재 한국에서, ‘인종’ 이슈를 주요 주제로 하는 뮤지컬 작품이 과연 흥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였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다소 대립과 갈등이라는 키워드로 쉽게 보편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20세기 미국 역사의 특수성을 기반으로 한다. 푸에르토리코인으로 구성된 ‘샤크파’와 폴란드계 백인으로 구성된 ‘제트파’의 갈등이라는 <멤피스>와 유사한 주제를 가졌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의 보편성을 차용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달리 <멤피스>는 뮤지컬계의 고전도 아니었고, 한국 시장에서는 낯선 작품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작품의 홍보와 마케팅을 텍스트 그 자체가 아니라 배우와 일부 넘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멤피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50년대가 미국의 인종주의를 논함에 있어 역사화된 맥락을 시대적 배경지식에 대한 사전 설명 없이 한국 관객들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끔 재현할 수 있는 것인지 역시 우려되는 지점이었기에 한국 라이선스 공연에서 연출의 방향이 인종적 갈등이라는 작품의 뼈대보다 음악과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고 프로그램북에서 밝히고 있다. 시공간적 배경이 다른 한국에는 영미권의 인종 정치에 대한 누적된 담론이 대중적 상식으로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인종차별을 낳는 인종주의의 구체적인 형상들이 정확히 어떤 모습이고 어떠한 맥락에서 나왔는지를 알기 어렵다. 단순히 ‘흑백갈등’, ‘인종 갈등’으로 요약되어 제시되는 주제나, 작품 속 인물들에게 투영된 음악을 통해 통합을 이룬다는 ‘극적 설정’이 작품에 생략된 치열한 성찰을 대체한 채 존재하게 된 것이다. 샤크파와 제트파의 대립 구도만 알아도 이해할 수 있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달리 <멤피스>는 관련된 추가적인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작품의 내적 맥락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노래와 춤이 함께하는 뮤지컬이라는 극적 형식 덕분에 몰입이라는 측면에서 상쇄될 뿐이다.

 

또한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서 공연될 당시 백인 배우는 백인 캐릭터, 흑인 배우는 흑인 캐릭터를 맡았기 때문에 배우의 ‘인종’과 캐릭터의 ‘인종’ 사이의 관계의 문제는 생략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동아시아(일본, 한국) 시장에 수입되었고, 실질적으로 비-동양인 배우, 특히 흑인 배우가 몇몇 예외 사례(‘혼혈’로 알려진 소냐, <레미제라블>로 데뷔한 루미나 배우)를 제외하면 부재한 한국 뮤지컬 시장 속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인 배우가 주연을 맡게 되었다. 한국보다 앞서 <멤피스>의 라이선스 공연을 올렸던 일본의 사례를 고려한다면, 타인종 캐릭터를 연기할 때 피부색 표현을 위해 과한 분장을 하는 ‘블랙 페이스’는 인종주의를 답습하는 재현 방식으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 한국에서는 2010년대 후반 이후 ‘블랙페이스’가 문제화되면서, 관습적인 인종 재현에 무비판적이었던 공연예술 시장 전체가 변화를 맞이하게 된 상황이다. 그렇기에 ‘인종’이 주요 주제이면서 동시에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흑인 역할과 백인 역할을 관객들이 명시적으로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 <멤피스>는 일본 공연의 ‘분장’이 아니라 초연부터 ‘인종’을 스타일링이나 머리색, 조명으로 구분하고 있다. 흑인 캐릭터의 분장을 부각시키기보다 백인 캐릭터를 맡은 배우에게 톤 업 메이크업을 하고 금발의 가발을 활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논란이 될 여지와 비판을 피했지만, 무대 연출에 있어 인종을 외양의 차이로 재현한다는 것 자체가 인종이라는 사회문화적 가치를 생득적인 외적 차이로 물신화하는 것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고민을 남긴다.

 

이러한 선택이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추어 인종다양성이 부족한 한국의 뮤지컬 시장의 한계에 대한 고민 끝에 나온 결정이라는 것에는 딱히 이견이 없겠지만, 블랙페이스 이슈 같은 논란만 피했을 뿐 여전히 인종이라는 변수가 삭제되다시피 한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 인종 이슈는 '논란 거리'만 되지 않았을 뿐 여전히 잔존한다. 이는 <어쩌면 해피엔딩> 브로드웨이 버전의 백인 배우 캐스팅 이슈에서도 알 수 있듯 ‘화이트워싱’의 위험성 때문에 특정 배역을 소수 인종에게 ‘할당’한 영미권의 캐스팅 관습과 인종다양성이 부족한 한국의 차이이며, 동시에 전지구적 공연예술 담론 생산의 중심지인 서구권의 시장과 라이선스 공연을 주로 수입해야 하는 위치인 공연예술이라는 장르의 비종주국인 한국 시장의 특성의 차이이다. 상업 제작사들은 단순히 인종이라는 주제뿐만 아니라 소수자성에 대한 관습적인 재현이 더 이상 용인되기 어려울때, 관련된 담론의 복잡한 낙차와 다양한 맥락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 항상 '차선책'이나 우회로를 택하는 경향이 있다.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 공연예술 시장의 제작사들은 그동안 비평의 본질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불러올 결과만을 의식해 비판점이 제기되면 이를 회피하는 식으로 연출과 재현의 방향을 가다듬어 왔고, <멤피스>의 인종 재현 역시 이러한 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 ‘최악’은 피했지만 더욱 생산적인 담론을 이끌기에는 어려운 그 중간의 '안전한' 선택, 이것이 현재 한국의 대중적 인종 감수성에서 나올 수 있었던 최선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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