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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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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은 작가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작가님의 글을 애정 깊게 읽어온 독자입니다. 최근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 플랫폼의 작가 중 당신을 가장 가깝게 느끼는 사람 중 하나가 되었죠.

 

이 편지는, 작가님의 글에서 제가 발견한 것들에 대한 작은 고백이자, 작가님께 질문을 건네고 싶은 마음을 담은 인터뷰 요청입니다.

 

작가님은 저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인터뷰를 진행할 것입니다. 저는 이 인터뷰가 작가님을 훼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제 눈으로 최대한 자세하게 당시 인터뷰를 재현하여 제 주관적인 언어로 정리할 것입니다. 저와 작가님의 방식은 매우 다르지만, 그 다름이 고통스럽지 않은 새로운 방향으로 당신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길 바랍니다. 이 인터뷰 요청에 해당하는 서론 역시 크게 내용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저는 작가님을 볼 때마다, 제가 포기해 버린 어떤 언어의 정밀함, 감정의 끝까지 걸어가 닿으려는 태도 앞에서 약간의 동경과 부끄러움, 묘한 애도의 마음을 느낍니다.

 

작가님의 글은 감정을 적절한 수준만큼 분해하고, 조각내고, 조립하여 타인의 손에 건넬 수 있을 만큼의 언어적 구조물로 승화되어 있습니다. 저는, 작가님의 글을 이렇게 묘사하고 싶습니다.


 

신성은 작가에게 감정은 동기이지만, 동시에 재조립과 환원의 대상이다. 그는 감정의 조각을 수집해 정돈된 구조로 건넨다. 파열과 진폭 대신 절제와 균형을 택하며, 사유의 깊이 속에서 감정을 안쪽에서 은은하게 떠오르게 한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그대로 내던지기보다는, 조각내고 다시 배열하여 건네는 방식을 택한다. 그래서 그의 글쓰기는 '사후(事後)'의 글쓰기다. 감정을 겪고 난 후, 그것을 충분히 숙성시키고 제련하여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저는 당신의 용기와 끈기에 한 명의 독자로서 깊은 애정을 갖습니다. 이 짧은 질문과 글 속에 담긴 제 감정과 단상 위에 당신의 응답을 요청합니다.

 

*

 

작가 신성은과 나의 인터뷰는 친밀한 관계에서 비롯된 편안한 톤으로 진행되었다. 관념과 현실의 거리감에 종종 기묘함을 겪는 나는, 보통 현실에서 사람들과 ‘지인’으로서만 대화할 수 있다. 인터뷰라는 상황에서 상당히 거북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최소한 ‘글을 쓰는 자아’를 어떤 방식으로든 수면 위로 올리는 것은 저항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 내게 이상한 말이지만, 어느 날 나는 ‘신성은’의 입에서 ‘작가 신성은’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건이 있었다. 한 사람에게 애정을 갖게 되는 과정이 작가로서의 한 사람에게 애정을 갖게 되는 과정과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자연스럽지만 나에게 기묘한 일이다. 나에게 그런 현상은 보통 판단력의 축을 잃어버린 상황으로 의심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애정과 작품에 대한 판단은 구분되어야 하지 않은가.

 

하지만 ‘신성은’은 ‘작가 신성은’의 이미지를 부드럽게 끌어들였다. 내가 아는 신성은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가진 한편, 날카로운 부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끝부분은 눈 앞의 대상을 찌르지 못한다. 못한다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능력 이전에 그런 방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그녀는 온 육체적, 정신적 노력을 다해 그것을 막는다. 그 행위는 거의 본능적이었다.

 

어느 날,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나에게 보여주었고, 그 글에서 나는 그녀의 글이 베일이 나풀거리면서 삶의 어떤 부분을 가리는 방식으로 삶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언어로 만들어내는 베일은 위선이나 도피가 아니라, 삶의 장면을 제련하여 부드럽게 연결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때 나는 ‘신성은’이 ‘작가 신성은’을 소개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우리의 대화는 특정 질문이 정제되어 던져지기보다는 흐름 속에서 유기적으로 발화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정리된 인터뷰'라기보다는 '공명과 반응의 교환'에 가까웠다. 서로의 말을 비추며 자신을 고백하는 구간이 반복되었다. 내가 주제를 던지면 신성은이 그것을 받아 자신의 언어로 천천히 다듬어 풀어내고, 내가 다시 거기에 감응했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대화는 내가 감정적 강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질문하면, 신성은 작가가 이를 부드럽게 수용하고, 명료한 언어로 감정을 분해하거나 순화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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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님의 글 “무형의 취향을 잡아내는 일”에서, 저는 작가님이 말 이전의 끌림에 대해 말하는 글쓰기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즉, 언어 이전의 감각을 언어로 붙잡으려는 시도가 이 글 전반에서 느껴지는데요, 작가님의 ‘알 수 없음’이 결핍이 아닌 가능성, 의미를 생성하는 출발점으로 놓이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이 ‘알 수 없음’이 때로는 작가님의 글쓰기를 견인하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작가님에게 알 수 없는 것을 ‘닿을 수 있는 언어’로 전환하는 과정은 무엇인가요?

 

리뷰처럼 목적이 정해진 글을 제외하면 저는 글을 시작할 때 보통 글의 방향이나 주제를 정해두고쓰지 않아요. 좋아하지만 왜 그런지는 모르는 상태, 혹은 어떤 감정이나 인상이 반복적으로 머릿속에 맴도는데 그게 무엇인지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내가 여기에 끌리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파고드는 글을 쓰게 돼요.

 

그런데 오래 천착하는 것들이라도 그냥 두면 잊히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것을 닿을 수 있는 언어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도예로 치면, 여러 색감이나 성질의 흙 덩어리를 꺼내놓고 고민하다가 하나씩 얼기설기 붙여가는 거예요. 그러다가 이거다 싶은 그릇 모양이 떠올라서 그 형태에 도달할 때까지 하염없이 걷는 마음으로 글을 완성하는 거죠.

 

글을 쓰기 전에 보통 어떤 덩어리가 있고, 계속 생각하다 보면 그 덩어리를 쓸 때가 와요. 정확히는 “이제 쓸 수 있다는 느낌”이 와요. 보통 이게 시작점이 되어요. 그런 덩어리들은 손도 못 대는 큰 것이었다가, 실타래처럼 하나씩 풀게 되죠. 저는 그걸 너무 급하게 말로 붙잡지 않고, 만들어가면서 딱 맞을 때까지 다듬어요. 처음에는 내가 무엇을 쓰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쓰다가 점점 베를 짜듯이 형태를 갖춰가죠. 지면에 생각나는 말을 있는 대로 적다가 ‘이게 바로 이 글의 모습이야’하고 제 머릿속에 불현듯 스쳤던 바로 그 모양과 맞아들어갈 때. 이게 저한테 굉장한 기쁨을 줘요. 거의 쾌감에 가까워요. ‘사후’의 작가라고 하셨는데, 저는 거기에 속할지도 모르겠네요.

 

여기까지가 자기 표현, 자기 만족을 위한 조형과 다듬기 과정이었다면 글이 완성된 후에도 최소 두 번은 다시 다듬고 조율을 해요. 글을 읽거나 듣는 것 자체가 에너지 소비가 많이 되는 일이잖아요. 글이 매끄럽지 않아 독자의 주의력이 끊기는 데서 생기는 집중력 소모를 최대한 줄이고 싶은 편이에요.

 

글쓰기를 할 때에는 정신 상태를 맑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일상생활에서는 좋은 생각, 나쁜 생각을 번갈아가며 하는 그저 일반적인 사람이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내 안에서 가장 맑아지려고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가끔 저는 글을 쓸 때 저 자신이 사금 채취하는 사람 같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사금을 채취하기 위해 사금 채취용 접시를 계속 흔드는 거죠. 겉보기엔 흙탕물과 씨름하는 사람 같지만 흔들고 개어내다 보면 접시 안에 뭔가가 보일 수 있으니까요.

 

 

인터뷰를 하다보니, 작가님이 글을 쓰는 과정은 청주를 빚는 과정 같기도 하네요. 탁주와 청주의 차이를 들어보신 적 있나요? 탁주는 쌀 등의 곡류로 빚은 술을 걸러내지 않고 만드는 술이고, 청주는 발효된 술덧에서 맑은 부분만 떠내어 만든 술이예요. 작가님 글은 그런 청주 중에서도 가장 윗부분을 뜨거나, 청주를 또 한번 끓여서 만든 맑은 술 같아요. 계속해서 끓이고 끓여서 하늘을 향해 접근하는 방식이라고 해야하냐, 지상의 것을 하늘로 보낸다고 해야하나….. 이 인상이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네요.

 

탁주와 청주의 제조법 차이를 어렴풋이만 알고 있었는데 청주는 정말 손이 많이 가네요. 거기서 또 한 번 끓여 만든 술이라면 그건 정말 호사스러운 술일 것 같아요. 제 글을 그렇게 비유해 주시니 좋으면서도 뭔가 부끄러운 기분이 듭니다. 저는 사실 제 글쓰기를 침전물이 가라 앉은 액체에서 윗물을 떠 오는 정도로만 생각해 왔는데 뭔가 더 호의 넘치고 정교한 표현이 예상치 못한 엽서처럼 도착한 기분이에요.

 

사실 말씀 듣다가 잊고 있던 글쓰기 감각 중 하나가 떠올랐어요. 글을 쓸 때 매번 느끼는 감각은 아니지만 한번 시작되면 글 시작 전부터 글을 마무리할 때까지 걸쳐 있는 감각이에요. 제 나름대로 ‘발효와 증류’라는 이름까지 붙여놓고 요즘은 잘 느끼지 않아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무형의 취향을 잡는 일>에서 제가 집필의 동기 중 하나로 ‘자꾸 생각나는 대상’에 끌리는 원인을 파악하는 것을 언급했어요. 그런데 자꾸 떠오르는 것 중에는 좋은 것도 있지만 괴로우면서도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 그리움, 외로움, 불안과 껴안은 상념들도 있거든요. 이 내면의 문제들을 섣불리 건드려 덧나게 하거나, 당장 해결되지 않는다고 없는 문제인 양 모르쇠해도 부작용은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시인 릴케의 말처럼 ‘언젠가는 읽을 수 있게 될 외국어로 쓰인 책’이라 생각하며 마음 한 구석에 두고 엄두가 날 때면 열어 보고 아직 아니다 싶으면 다시 책장에 꽂아두며 기다리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러다 마침내 그 문제로 글을 쓸 때, 그 글은 내 안의 어떤 생각이 충분히 발효가 되어 쓸 수 있는 것이라 느꼈습니다.

 

증류는 글을 쓰는 중, 타인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발견할 때부터 이뤄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슬픔을 지면 위에 언어화하는 것으로도 글쓰기의 치유 효과를 느끼는데, 적절히 발효가 이뤄진 생각으로 글을 짓다가 모종의 깨달음을 얻으면 치유를 넘어 제 일부가 고양되는 것을 느껴요. 이게 창작이 주는 승화 작용인 것 같아요. 제 글을 읽고 ‘하늘로 접근하는 방식, 지상의 것을 하늘로 보내는 방식’이 있다는 인상을 받으셨다면 그 상승의 감각은 이런 증류의 과정에서 오지 않았을까 싶어요.

 

 

[2] 에세이 ‘한적하지만은 않은 글쓰기’는 작가님의 글쓰기의 방향성을 잘 보여주는 글입니다. 이 글에서는 읽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글쓰기 속에서 자기 노출에 대한 내적 긴장, ‘기워내는 글쓰기’에 대한 묘사가 드러나서 사적이고 내밀한 자기 서사가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글쓰기란,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조각’을 직조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성인이 된 후 자기표현의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것은 솔직히 힘든 시간을 지나기 위해서였어요. 우울증에서 생존하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다른 사람들의 에세이나 심리학 도서들을 읽기 시작했고 특히 전자를 읽으면서 이 모든 게 나아지면 나도 내 경험을 글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먼저 자기 경험을 글로 남겨 공유해 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세상에 갚고 싶은 마음과 고통 가득한 시간이더라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공존했어요.

 

고통을 글이나 말로 풀어낼 수 있다면 버틸 만한 것이 된다는 말을 믿으며 매달렸고, 그 당시에는가족 구성원과 마찰이 많았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는 카페 등 외부 공간을 찾아 그곳에서 일기를 열심히 썼던 것 같아요. 글을 쓰며 감정을 토하고, 지면으로 이동한 마음 조각은 돌아보기가 더 쉽고, 아픈 곳은 왜 이렇게까지 아픈지를 알아보고 인정할 수 있게 되니까…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아주 아주 조금씩 감정의 파고가 낮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러다 제 딴에는 큰맘 먹고 글쓰기 수업을 신청했어요.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분들은 각자 글에서 크고 작은 자기 상처를 내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글쓰기 수업이 어느 면에서는 살짝 자조 모임 같다고 느꼈어요. 그 수업에서 만난 강사님의 눈빛은 제가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저를 마냥 불쌍히 여기는 것도 분석하는 것도 아닌 공감과 연민의 눈빛이었어요. 수업에서 몇 번 얼굴을 마주 했을 뿐이지만 제 글을 읽고 그저 같이 아파해주는 눈빛이요. 몇 해가 지난 지금은 이렇게 얘기를 하다가 기억나는 장면이지만, 당시에는 큰 울림이었고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먹먹해져요.

 

그 수업에서 알게 된 친구와 수업이 끝난 후에도 종종 글을 교환하며 서로 피드백을 해주었습니다. 친구의 글은 자신의 아픔이나 고민 면에서 정말 솔직하고 이 글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지에 대해 미리 걱정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것이 없어서 저도 용기를 많이 받았어요.

 

우울증이 심할 때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하고 상태를 숨기려고 애를 썼었는데 내가 약점이라 생각했던 것을 글로 쓰면서 오히려 그 부분이 재건되고 강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내가 나라고 인정한 부분들은 줏대가 되더군요.

 

부서져 생겨 난 파편들을 다시 원래 형태로 붙이는 게 아니라 다른 시간대의 경험과 반응들 사이에서 연관성과 심리적 인과 관계를 찾으며 아귀가 맞는 부분을 붙이고 이어 나가는 글쓰기가 ‘기워내는 글쓰기’가 아닐까요. 압박감과 자괴감에 납작하게 눌려 있던 저 자신의 부피를 다시 만들어가는 글쓰기였다고 봐요.

 

<한적하지만은 않은 글쓰기>는 아트인사이트 활동을 시작한지 1년 가까이 될 즈음에 쓴 글이에요. 그때도 늘상 밝고 진취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회복을 경험한 후에 쓴 것이라 자기 공간과 부서진 삶에 대한 긍정이 드러납니다. 글을 씀으로써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 새로운 경험들이 나를 설레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확실히 저는 요 몇 년 간 에세이를 많이 써 왔고, 인터뷰어 님 말씀대로 제게 에세이는 ‘존재의 조각을 직조하는 글쓰기’가 이뤄지는 장르예요. 다만 제게도 완성하고픈 픽션 스토리들이 있거든요. 언젠가 꼭 그 서사들에게 걸맞는 결말을 줘서 작품을 내고 싶네요.

 

 

갑자기, 작가님이 ‘말 없는 사람’이 되기 싫다고 선언했던 부분이 생각나네요. 새삼 당시의 작가님에게 ‘말’이 어떤 의미인지 다가와요. 저는 사실 다른 사람에게 오독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해요. 나라는 실체가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에 의해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에요. 이런 피곤한 ‘타인의 시선’ 속에서 당신은 어떻게 글을 쓰나요?

 

갑자기 어릴 때 본 만화의 한 장면이 생각나네요. 이야기 속 이야기이긴 한데요. 상반된 과거와 성격을 가진 두 왕녀가 주인공이었어요. 그 중 심성이 착한 왕녀를 두고 혹자는 곱게 자라 그저 머릿속이 꽃밭일 뿐이라고 비아냥대기도 합니다. 어느 날은 나라를 대표할 공주는 화친을 하려면 먼저 신뢰를 보여줘야 한다면서 자신이 가겠다고 말해요. 요점은, 순진해 보일지라도 내가 믿어주길 바라면 믿어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쓰면 전달될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남도 잘 읽어줄 수 있다는 거죠.

 

사실 저도 글을 쓰면서 자주 ‘이걸 써도 될까?’하고 고민해요. 왜냐하면 소중한 알맹이를 꺼내놓는 것은 굉장히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오독되는 것도 무섭고, 반대로 제가 꺼낸 생각이 혹시나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봐 걱정이 되기도 하고요. 그런데도 쓰게 되는 건 제 경험들이 혼자만의 감각으로 완전히 고립되지 않고 누군가에게 도달하기를 바라기 때문이에요. 읽히는 건 어쩌면 내가 여기에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잖아요. 제 글이 누군가에게 닿았을 때 그 사람의 삶과 공명할 수 있다면 더 소중하고요. 공명 사실을 제 쪽에서는 알 수 없어도, 가능성만으로도 소중해요. 간혹 제 글을 읽고 어떤 것을 느꼈는지 직접 코멘트를 남겨주시는 경우도 있는데 그 분들의 소감은 제가 힘들 때마다 마음의 연료가 됩니다.

 

하지만 결국 글이 세상에 나간 이상, 그 해석은 독자의 몫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해요. 사실 저도 종종 잊어버리곤 하는데, 내가 붙잡아둘 수 없는 것까지 걱정하다 보면 아예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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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은 작가와의 대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자신의 글쓰기 과정을 설명할 때였다. 도예처럼 "흙, 성질, 여러 요소를 꺼내놓고 고민하다가, 하나씩 얼기설기 붙여가는" 과정, 사금을 채취하듯 "채취 도구를 계속 흔드는" 감각, 청주를 만들 때처럼 "투명한 술의 가장 깨끗한 부분을 한번 더 끓여서 증류수를 만드는" 방식.

 

이런 비유들을 들으면서 나는 왜 그의 글이 그토록 맑고 정제된 느낌을 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여러 번 걸러내고, 다듬고, 가장 순수한 부분만을 건네주고 있었다.

 

"두루뭉술하고 섞여있는 것을 적합해질 때까지 깎는 감각"이라는 그의 말은, 내가 날것 그대로 쏟아내는 글쓰기와는 정반대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 차이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대화는 내게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신성은 작가의 글은 어떤 이들에게는 조용한 치유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조용한 해체로 다가간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감정을 견디는 법은 다양하지만, 작가 신성은이 건네는 언어는 늘 신성은이라는 사람의 시간을 통과한 후에야 도달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지나온 이의 언어는, 우리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모양을 가진다. 이것이 내가 찾고, 아마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독자들도 알고싶었던 그녀의 모습일 것이다.

 

 

[인터뷰어가 언급한 글]

[Opinion] 무형의 취향을 잡아내는 일 [사람]

[에세이] 한적하지만은 않은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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