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 후기 글의 테마와 구성에 대해 오래 번민하고 있을 때, 앞서 피드백 모임을 같이 했던 에디터 님으로부터 이런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모임을 여러 번 가지니까 후기 쓰기 점점 어려워지는 거 같아요.’ 동감이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경험은 그 새로움만으로 지면을 덥혀주니까. 새로운 경험을 묘사할 때면 단어들이 자기들끼리 짝지어 나와 기름칠한 톱니바퀴들처럼 매끄럽게 돌아가며 문장을 이뤘다. 그런데 새로움을 묘사할 단어들이 그렇게 잘 굴러간 데에는 좋음을 나타내는 표현들도 같이 섞여들어갔기 때문인 듯하다. 이전 후기들에서도 그 모임의 좋은 점을 진심으로 썼는데 생각보다 새로움을 설명할 때에도 좋음과 관련된 표현들이 쓰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좋음을 나타내는 재료의 수도 넉넉하지 않은 데다 골라낸 표현들의 참신함이나 적합함도 영 탐탁치 않았다. 불현듯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이 떠오른다. 역시 좋음은 세분하기 참 어려운 영역이로다.
돌파구는 의외의 요소로부터 왔다.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던 바가 예전 모임원과의 연락으로 차츰 정리되기 시작했다. 물. 이번 모임과 예전 모임의 공통된 이미지는 물이었다. 그러나 내가 닿아 있는 물의 성격도, 물을 대하는 나의 시점도 판이하게 달랐다. 불꽃 같은 두 번째 피드백 모임을 경험하고 나서 나는 첫 번째 피드백 모임을 물의 이미지로 정의했다. 거기서 나는 자유롭게 흘러가는 물 위를 떠다니는 오리였고 내 머리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나는 다만 수면 위에서 대화의 수심과 유속에 따라 달라지는 물의 빛깔과 ‘뜨고 흘러가는 감각’을 즐겼다. 이번 모임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내가 물속에 잠겼다가 나왔다는 점이다.
‘물속’은 11월부터 2월까지 달마다 만나던 세 명의 대화가 차분하게 깊어지고 속마음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때 생겨났다. 글쓰기 모임의 구성원은 이번에 처음 만난 분들로, 찬 님과 윤 님이었다. 아트인사이트 활동을 오래 한 찬 님은 직접 그림을 그리는 만큼 미술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고 최근 시를 배우는 중이었다. 음악을 공부 중인 윤 님은 케이팝을 다루는 글을 자주 쓰고 한류 분석에 공을 들인다. 나는 미술을 배웠고 그림을 열심히 그리던 예전의 모습을 되살리고 싶은 한편, 최근 들어 음악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싶은 욕심이 생긴 필자 한 명이다. 두 분이 현재 하고 있는 활동,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내게도 자극이 되었다.
우리는 글쓰기 모임 진행을 위해 여러 화제를 꺼내 놓았다. 특히 첫 번째 모임에서 다루고 싶은 안건이 어찌나 많이 나왔던지 메모를 복기하며 새삼 놀랐다. 두 번째 모임에서는 시국이 반영된 집회와 응원봉 이야기나 나왔고, 윤 님이 당시 쓰고 있던 글의 내용, 그리고 내가 읽었던 글쓰기 관련 책 두 권의 내용 전달이 이뤄졌다. 세 번째 모임에서는 힘겨웠던 연말연시에 대한 소회로 시작하여 글을 쓰는 이유와 회복이라는 주제에 대해 논했다. 마지막 모임에서는 음악과 글쓰기, 특정 감정 상태에서 자주 찾아 듣는 음악과 그 이유, 그리고 앞으로의 글쓰기 방향을 논의했다.
시간상으로도 가깝고 물속 공간이 만들어져 기억이 더 잘 나는 모임은 아무래도 후반의 두 회차다. 유독 다락방 같은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난 세 번째 모임, 나는 글을 쓰는 이유로 예전에는 살기 위해서였고 지금은 이제 글을 안 쓰면 사람이 이상해지는 걸 알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 글은 이미 내게 자기표현의 대표적인 수단이 되었고 자아표출을 안 하기 시작하면 나는 좀… 오랫동안 사람을 안 만난 사람처럼 될 수 있다.
같은 날, 회복에 대한 대화도 이어졌다. 분명히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드라마틱하게 자신이 달라지거나, 웅크렸던 시간과 몸의 구깃한 정도를 반비례해 반영해주는 강한 추진력 같은 것은 생기지 않는다고. 쉰 만큼, 웅크린 만큼 힘이 응축되었다가 탄성 있게 튀어오르면 좋으련만 그조차 우리가 숱하게 봐 온 콘텐츠들의 영향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도 닿았다. 무슨 매체의 콘텐츠건 간에 그에 담긴 이야기는 기승전결 구조를 가진 편집의 결과물이니까. 회복 후에도 예전과 똑같을 수는 없는 다리, 혹은 지금도 회복 중인 다리로 앞길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궁금해지고 겸허해지는 시간이었다. 회복의 성질에 대한 정의는 그날의 대화로 똑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답답하거나 불안하기 보다는 오히려 솔직함에서 오는 온후함이 나를 감쌌던 것을 기억한다.
이처럼 솔직한 이야기가 무리없이 부드럽게 나올 때면 미지의 수중 공간이 생겼다. 아담하지만 협소한 느낌까지는 아니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지만 아예 어항이나 수조 같은 인공의 공간은 아니다. 물은 탁하지 않고 투명한데 물 아래 있는 것들은 그림으로 치면 파랑에 가까운 하늘색, 혹은 너무 진하지 않은 청록색 색연필로 형체가 그려졌다. 유속은 거의 느껴지지 않고 수온은 미지근하거나 내 체온보다 조금 더 따뜻하다. 수면 아래로 빛이 들어올 때면 음표도 함께 실려온다.
마지막 모임은 글 얘기를 하다 자주 음악으로 빠졌던 우리 대화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다. 간단히 요즘 듣는 음악으로부터 시작해 추천하는 가수, 곡을 거쳐 특정 감정에 휩싸였을 때 어떤 노래를 찾아듣는지를 이야기했다. 힘들 때 위로가 되는 노래, 그리고 노래를 들을 수 없는 때에 대해서도.
정해진 식순이 따로 없는 모임이지만 대화 주제 구분으로 따진다면 모임의 2부에 들어서는 소소하고 단조로운 일상을 바탕으로 글을 쓸 때 글쓰기를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고 논의했다. 자기 방을 여행하는 여행기를 쓴 작가도 있었으니 작아 보이는 주제 또한 긴 글을 낳을 수 있는 걸 알지만 앎이 곧 만족은 아닌 관계로, 그리고 크고 활달한 소재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으로 이런 얘기는 내게 제법 귀중했다. 윤 님은 일상과 창작활동 모두를 지속하는 직업인을 다룬 의미에서 찬 님에게 영화 <패터슨>을 추천했고, 찬 님은 윤 님이 현재 공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글을 써도 재밌을 것 같다며 글 주제를 제안했다. 나는 전에 쓰다 멈춘 음악 에세이 연재를 완결지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대화를 통해 한시적으로 생겨나는 이 물 아래는 세 명 고유의 인상과 성격, 그리고 감정을 반영해 만들어졌다고 느낀다. 찬 님과 윤 님의 글을 읽으면 아마 이 느낌이 다시 올라올 수 있겠지만 이 공간은 아마 세 명이 직접 모인 대화에서만 나타날 거라 생각한다. 마음속 물에 빠질 때면 장소는 우울의 심해 속이었고 나는 늘 막막하고 춥고 어디까지 가라앉을지 깊이를 알 수 없었다. 투명하고 차갑지 않은 수중, 몸이 굳을 만큼 깊지 않은 이 공간에 초대된 경험은 두 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모임의 이미지를 잡는 데에는 예전 모임들 간의 특징을 비교한 것이 도움되었다. 이 공간에 내가 들어왔었고 나왔다는 사실도 실은 모든 모임이 끝난 다음에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상이 자기에 맞는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은 늘 신기하다. 나는 앞으로 이 아늑하고 한시적인 수중 공간의 바닥면에 있던 물풀 사이에서 건져 올린 오래된 글감으로 푸른 수색의 차를 끓이거나 해초 국을 만들 것이다. 결과물이 무엇일지는 역시 나와봐야 알겠지만 완결을 볼 때면 나는 이 모임의 영향도 다시금 기쁘게 되새길 수 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