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적하지만은 않은 글쓰기

글 입력 2022.01.3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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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재가 된 방


2020년 여름, 나의 방은 서재가 되었다. 내 방에 갑자기 새 책이 불어나거나 멋들어진 서재 인테리어를 한 게 아니다. 내 방은 그냥 그대로 있었다. 다만 내 마음이 바뀐 것이다. 내 방이 글 쓰는 서재가 된 순간을 기억한다. 더운 여름, 여느 날과 같이 창문을 열어놓고 글을 쓰고 있었을 때였다.

 

집에 단 한 대 있는 에어컨은 거실에 있었고, TV 소리가 큰 거실은 생각을 하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당시 글쓰기에서 삶의 낙을 봤던 나는 사색이 필요할 때면 더워도 내 방으로 돌아갔다. 내가 그해의 더위를 아담한 크기의 방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작은 키의 선풍기 한 대 덕분. 그리고 창문 덕분.

 

내 책상은 창문과 맞붙어 있다. 겨울에는 까딱하면 몸에 한기가 들어서 멀쩡한 책상을 두고 식탁에 가서 글을 쓰지만 그 외의 계절에는 다르다. 창문을 열면 새소리와 함께 바람이 불어온다. 내가 좋아하는 순간이다. 단지 내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소리도 제법 흘러들어온다. 가끔 시끄럽지만 퍽 평온한 분위기다.

 

여름은 끈끈하고 더운 계절이지만, 간간이 청량한 바람 몇 점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기도 한다. 햇빛과 바람이 내 방에 알맞게 들어올 적이면 책상 옆에 소중한 글귀를 적어 붙여 둔 포스트잇 여러 장과 노트나 자료집의 낱장이 팔락거렸다. 낱장의 메모들이 날아갈 정도는 아닌,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그걸 보는데 갑자기, ‘아, 이 방은 서재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랬다.

 

 

 

 

2. 서재에 대한, 잊고 있던 낭만


자연의 숨결과도 같은 바람, 미소 같은 햇빛. 자연이 주는 노래인 새소리와 바람에 나뭇잎이 스스스 부딪히며 내는 작은 파도 같은 소리. 자주 잊고 살지만 역시 자연의 일부인 아이들의 소리가 내 방 안에 알맞게 들어왔을 때. 그리고 그 순간 안에서 글을 쓰고 있을 때, 나는 바로 이것이 내가 원하던 서재의 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하거나 장중한 분위기의 가구로 각 잡혀 꾸며진 서재보다는, 내가 자연에 어느 정도 열려 있는 서재를 선호한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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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의 ‘서재로서의 모습’이 마음에 든 후로 가끔 작가들의 서재는 어떠한지 궁금해 서재에 대한 글이나 이미지를 검색했다. 그 과정에서 한 애니메이션 영화의 이미지가 스쳐갔다. 어릴 적 극장에서 봤던 <이웃집 토토로>였다. 주인공 자매인 사츠키와 메이의 아버지는 대학에서 일을 하고 집에서도 계속 글을 쓰는 캐릭터였다. 그 아버지 캐릭터의 서재가 나도 잊고 살았던 로망의 일부였다. 부인이 입원해 있는 병원과 가까운 시골 마을로 이사 온 그들의 집은 당연히 자연 속에 있었고, 그 집의 서재도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창을 열어두면 바람에 자료들과 원고지, 얇은 커튼이 팔락거릴만한 곳이다. 낮이면 바람 소리와 어린 딸 메이가 근처에서 노는 소리가 들리고, 밤이면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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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서재 겸 작업실이 내가 좋아하지만 잊고 있었던 ‘이상적인 서재’의 원형이었던 셈이다. 태엽을 감아 과거로 갈 수 있는 시계가 있다면, 이제 내 나이에서 한참을 되감아야 돌아갈 수 있는 시절에 봤던 애니메이션 영화 속 서재 이미지가 참 한적하고 포근하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 취향은 참 안 변하나 보다. 지금 좋아하는 게 결국 어릴 적에도 좋아했던 것이라니. 무의식 속에 있던 이미지와 그에 대한 호감을 이끌어낸 것은 적당히 한적한 바람과 햇빛과 소음이었다. 그러나 이런 외부적 환경만이 추억을 데려온 것은 아니다. 바로 그 순간 안에서 글을 쓰고 있던 내가 있었다. 그 시기 한적하지만은 않던 글쓰기가 내 생활공간의 서재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한적하지만은 않은 글쓰기


글 쓰는 모습은 얼핏 보면 -특히 책상과 주변이 깔끔할수록- 한적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글 쓰는 마음은 대개 한적하지 않다. 의문스럽거나, 슬프거나, 불안정하거나, 고통과 치열하게 싸우는 중일 때의 글쓰기가 즐겁고 기쁜 날의 글쓰기보다 많지 않을까.

 

남들에게 좋은 작품을 알리는 글, 취미생활과 관련된 글은 기분 좋은 상태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조각 난 마음을 녹여 새로운 형태로 붙여주는 글, 그래서 인생에 대해 보다 유연한 시각을 갖게 하는 글은 납득할 수 없었던 일을 굳이 돌이키며 써냈을 때 나오는 것 같다. 남들은 그저 잊어버리고 앞만 보라고 할 일을 꾸역꾸역 기억해내며 의미를 찾으려는, 혹은 다른 차원에서라도 이해해 보려는 몸부림은 쇠락한 금광 근처의 하천에서 나 혼자 사금을 채취하려고 계속 채를 들고 흔드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내 방이 여름의 ‘서재’가 될 때까지 그곳에서 읽고 쓴 글은 바로 그런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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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뾰족하던 기억과 감정들을 돌아보며 글을 썼다.

 

 

좋은 글은 독자에게 언어를 주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아픈 마음에는 그것을 세상에 표출할 수 있는 말을, 혼란스러운 감정에는 그것을 뚜렷하게 구분해 줄 ‘감정의 명칭’을 찾으면 고통이 잦아든다. 상황에 적합한 언어가 고통을 ‘다룰 수 있는 문제’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타인의 글에서 내가 할 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결국 글의 저자와 독자 사이에 공감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우울이 내 심신을 움켜쥐었을 때 나는 책 읽기를 힘들어했다. 그나마 쉽게 읽을 수 있고, 다시 독서에의 길을 터준 것이 나와 같은 시간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작가들의 진솔한 에세이였다. 이 넓은 세상에 나만 이 문제로 속앓이를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 자체가 하루, 한 달, 한 해 더 살아볼 엄두를 내게 했다. 그래서 글을 다시 쓸 수 있을 만큼 집중력과 지성,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긴다면 나도 그런 글을 써서 내가 도움받은 만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마음에 맞는 문장을 주고 싶었다. ‘할 말’을 나누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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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구겨져서 뭉쳐 있는 우울의 시간을 다림질하고, 다시 해상도를 높여 과거를 기억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울증의 흔한 증상 중 하나는 기억력과 집중력 저하이기 때문이다. 애써 기억해낸 개인사를 글의 의도에 맞게 어디까지 써야 하는지 글과 나의 밀고 당기기도 으레 있는 일이었다. 우울에 너무 취해서 글을 쓰면 자기 연민으로 가득 한 푸념이 될 것이고, 내 얘기를 너무 가리면 누군가와 공감하기에 너무 밋밋해서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글이 될 게 뻔했다. 더군다나 에세이는 내가 처음 쓰는 장르의 글이었다. 내 의도가 전달되기에 적절한 나와 글의 거리, 나와 독자의 거리, 나와 세상의 거리를 새롭게 익히느라 많은 시간을 들였다.

 

내게 위로를 주던 바로 그런 글들을, 누군가에게 닿았으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직접 써 보기까지 오랜 독서의 시간이 있었으며, 또 오랜 필사(筆寫)의 시간도 있었다. 주로 새벽과 아침, 나는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내게 피와 살이 될 문장들을 필사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내가 생활하는 방에 새로운 의미가 덧씌워지진 않았을 것이다.


노트북을 여는 것만으로 서재로 변하는 나의 방은 조금 더 애틋한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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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마음


‘내 얘기가 담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릴 때 죽음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처럼 막연히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는 게 무서워졌다가 회복해나가던 뒤로 처음 든 생각이라 의미가 남달랐다.

 

글을 몇 편 올리고 나서 앞으로 쓰고 싶은 글의 제목과 키워드들을 노트에 써봤다. 임시로 붙이는 제목이긴 했지만 연필 흑심이 종이 위를 빠르게 춤추듯이 돌아다녔다. 앞으로 쓰고 싶은 글 몇 편 정도가 생각나는 게 아니라 카테고리별로 아이디어가 계속 떠올랐다. 그 메모를 보면서 ‘나 오래 살아야겠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는 글 쓰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인데 내가 이렇게 많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줄은 몰랐으니까.

 

대학원 논문을 접기로 하고 나왔을 때, 나는 내 안에 굉장히 큰 무언가를 잃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몸도 대학원을 계속 다녀야 하나 고민하던 때보다 그만둔 이후로 더 아팠다. 대학원에 들인 모든 시간이 다 무가치해진 것 같았고 내 20대가 아까웠다. 내가 정말 논문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루는 정호승 시인의 <산산조각>이라는 시를 읽게 되었다. ‘룸비니에서 사 온 /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상황이 시의 맨 처음 세 줄이다. 화자는 얼른 순간접착제를 꺼내 조각조각 깨진 불상을 붙여보려 하지만, 그렇게 애쓰는 화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처님이 하시는 말씀은 다음과 같다. ‘산산조각이 나면 /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 산산조각이 나면 /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위로가 될 듯 말 듯했다. 마음이 부서졌을 때도, 그래서 무언가를 포기했을 때도 제로나 마이너스는 아니라는 말 같은데 막상 나는 산산조각으로 살기는 싫었다. 그렇지만 인상 깊은 시라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참고자료를 필요로 하는 학술적인 글이 아니라, 글의 모든 소스가 나 자신 혹은 내가 일상에서 경험한 것이 되는 에세이를 쓴 지 두 해도 넘자 이 시가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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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가 내 정신을 ‘기워준’* 덕분이다. 글쓰기를 ‘정신의 바느질’*이라는 수단에 대입하는 이 표현은 얼마 전 읽은, 이윤주 작가 본인의 ‘글쓰기’에 대한 에세이집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위즈덤하우스, 2021)라는 책에서 온 것이다. 이 책 초반에서 작가는 출산 이후 키친 테이블 라이팅(kitchen table writing)을 하며 출판사에 글을 투고하는 여성들을 두고 ‘극심한 변화의 한복판에서 해진 마음을 잇고 깁듯이 글을 썼다’고 말한다.(p. 30)

 

나 또한 내가 그려왔던 인생의 그림이 크게 변한 후로 쓴 글들이 내 정신을 바느질하듯 기워주는 것을 느꼈다. 내 공간에 대한 애정은 결국 삶에 대한 애정이 다시금 고개를 들며 나온 초기 징후 같은 것이었다.


내 경험상 좋은 글을 쓰는 데에 필요한 요소는 자기만의 사유를 할 수 있는 공간과 마감, 그리고 피드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다. 그리고 그 전에 기본적으로 문법과 맞춤법, 주제에 맞는 문체 등 글의 형식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대학원에서의 글쓰기와 발표가 글과 독자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을 몸에 익게 해주었다. 그것을 에세이는 물론이고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하는 글을 쓸 때도 실감하게 되었다.

 

독자에게 의도를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해 예리하고 진솔한 문장을 쓰는 것. 너무 긴 문장은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끊어주는 것. 발제문 및 소논문의 분량은 한정되어 있는데 다뤄야 할 내용은 많고 깊으니 적확한 단어를 찾아 쓰게 된 것도 요즘의 글쓰기에 톡톡하게 도움이 되고 있다. 약간의 구토감이 들 때까지 글을 읽고 수정하는 ‘퇴고용 체력’은 누가 뭐래도 대학원에서 얻은 값진 능력 중 하나다. 요즘은 토할 것 같을 때까지 글을 퇴고하진 않지만 과거 그 과정에서 생긴 교정, 교열 지식이 지금도 많은 도움이 된다.


과거의 도움을 받고 나니 논문을 포기한 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시간만 쓰고 결말을 맺지 못했다며 자책했던 날들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대학원에서 배운 것은 사라지지 않고 내 글의 지반을 단단히 다져주고 있었다. 이제는 그곳에서 얻은 지식을 다시 꺼내보는 것이 덜 괴롭고, 덜 아프다. 앞서 언급한 시에서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다 했던가. 한동안 나는 사금파리 같은 유리 조각들을 웅크린 마음에 둔 채로 계속 베이고 상처 입었는데, 적어도 해가 바뀐 지금은 그렇지 않다. 시간에 날카로운 파편의 끝이 닳아 둥그레졌는지, 아니면 내 마음의 외연이 넓어져 조각에 계속 찔릴 일이 없는 것인지…. 둘 다 이유가 되겠으나 기왕이면 내 마음이 넓고 유연해져서 그런 것이면 좋겠다. 옛 시간의 상처라는 유리 조각들이 유영해도, 마음이라는 공간 자체가 넓어져서 생살 같은 마음의 벽에 조각이 닿아 베일 일이 없는 것으로 말이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다는 구절은 이제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산산조각으로 사는 경지까진 이해 못 하겠다. 이건 중년 너머의 시간에서부터 이해할 수 있는 삶의 태도인 걸까? 사실은 미래에서라도 마음 다치는 일은 기껍지 않고, 덜 다치며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될까.

 

그래서 조각 난 감정이나 기억, 지식들을 ‘잇고 기워내면서’ 살아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깨진 조각들로 반짝이는 모자이크를 만드는 일이다. 미움이나 절망감 같이 강렬했던 감정 조각들이 흐물흐물해져 색이 살짝 바랜 천 조각 같아졌을 때 그것들을 모아다 기워 보는 일이다. 그 안에 연민이나 공감, 안도감 같은 조각도 모아 같이 기워본다. 색도 다르고 모양도 크기도 다른 낱장의 천들은 모여서 천천히 한 장의 조각보가 된다. 주로 글을 쓰는 과정에서, 이 낱개 조각들이 모여 새로운 작품이 된다. 그것은 글에서 얻은 새로운 가치관이나 인생에 대한 혜안이다. 내가 잘 살려면 계속해야 되는 일이 글쓰기라고 느낀다. 오래 살려면, 내 안에 든 것이 독이 아니고 다른 작품이 되는 쪽이 훨씬 유리하니까.


내 방이 서재로 느껴질 때까지 글쓰기가 단순한 감정의 배출이 아닌, 한 편의 완결성 있는 글을 ‘짓는’ 일이 된 그 순간 이후로 천천히 쌓아 올렸던 삶에 대한 애정을 되새겨본다. 또 한 편 새로운 글을 써내며 감정을 갈무리하고 생각을 정리해본다. 내가 쓰는 글로 희망을 만들어본다. 다음에 다른 글을 쓰면 나는 내 마음을 지켜낼 힘을, 현명함을 조금 더 일굴 수 있을 거라고.

 

 

(* 글쓰기에 대해 쓴 정신을 ‘깁다’, ‘정신의 바느질’이라는 표현은 본문에 같이 소개된 이윤주 작가님의 책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신성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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