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 물방울을 띄우는
ⓒ 장유진
14일 오후엔 꽤 많은 비가 내렸다. 이럴 줄도 모르고 긴 바지에 낮은 운동화를 신었더니 촉촉한 바닥에 밑단이 야금야금 적셔졌다.
그날, 줄라이 페스티벌의 14번째 공연을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코프스키가 장식했다. 7월 한 달 동안 매일 공연이 진행되는 이 여름의 제전에서, 매주 월요일은 하콘이 주목하는 아티스트들의 무대로 꾸며진다. 지난 7일에는 러시아 작곡가들을 소개하는 렉처 콘서트가 있었으니, 이번 무대가 'Artist in Focus' 시리즈의 첫 번째 공연으로 보면 되겠다.
일리야 라쉬코프스키가 누구인가? 일반 관객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일 수 있겠지만, 피아노나 실내악, 클래식 공연을 조금이라도 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연주자들의 연주자’다. 왜 이런 칭호가 붙는가? 그의 이력을 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다.
그 까다롭기로 유명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세 곡을 단 한 무대에서 모두 연주하며, 실내악 무대에서는 피아노 듀오로 정말 자주 등장한다. 성악, 바이올린, 첼로 등 다양한 파트너와 호흡을 맞추며, 한국에서 특히 활발하게 활동 중인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다.
그렇기에 어떤 무대를 올리든 ‘안정된 기량’이 기본적으로 보장된 연주자다. 그의 인스타그램만 들어가 봐도 수많은 연주 영상이 게시되어 있는데, 피아노라는 악기를 얼마나 일상 곁에 두고 살아가는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내가 이분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건, 서울시민예술학교 서초에서 열렸던 마스터 클래스에서였다. 피아노 전공생도 아닌 내가 그 자리에 간 건, ‘마스터 클래스’라는 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고, 무엇보다 피아니스트가 실제로 음악을 구현해 내는 과정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이런 가르침을 전해 받았다.
나는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는 것이 피아노라고 생각했다.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코프스키가 시연할 때마다, 소리의 음향이나 톤과 상관없이 개별 건반에서 조그맣고 동그란 구슬들이 튀어 오른다. 장중한 라흐마니노프의 ‘종’을 묘사할 때는 어땠는가?
물방울이 상향하기도 전에 손가락이 그것을 짓이겨버린다. 그런데도 울림은 터지지 않는다. 오히려 탄력 있게 내려앉으며 더 깊은 저음부를 형성해 버린다. 그 끝에는 꼭 여운이 남는다.
그렇다면, 개별의 것들이 어떻게 ‘음악’이 될 수 있는가? 대지와 하늘 그 사이에서 음표를 동동— 띄워내야 한다. 너무 아래여서도 안 되고, 너무 위여서도 안 되는 그 상태에서 고저를 유영하며 타고 놀아야 한다.
그 언저리에서 추락하지 않을 정도의 몰입 단계에 도달하면, 슬라임 하나를 가지고 놀 줄 알아야 한다. 꿈결처럼 치려면 구름 같은 터치감으로 물방울을 띄워야 하고, 속도감도 아주 자잘하고 빠르며, 구간마다 서로 다르게 쳐야 한다.
안개를 불러오려면 내가 가진 악력보다 더 큰 힘을 손끝에 모아야 한다. 짙은 회색이 아니라 아주 새카만 검정에서 소리를 끌어내야 한다. 멀리서부터 이쪽까지 다가오는 소리를 귀로 느끼게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어제 알았다.
조금만 소리 조절이 가까워도 ‘다가온다’는 느낌이 없다. 아주 새카매지든지, 혹은 셈여림 조절을 더 미세하게 하든지, 뭔가를 택해야 한다. 그런데 이걸 하나하나 계산하다가는 곧 팔순이 될 것 같다.
— 2025년 6월 18일
2. 기대와 빗방울 사이에서
ⓒ 장유진
건반 위로 물방울을 띄워내어 양손 안에 음을 그려내는 것. 그게 바로 ‘피아니스트’라는 것을 알려준 연주가였다. 그가 다이내믹을 시범 보일 때마다, 건반 아래로 장중한 종이 둥— 하고 떨어지는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러니 자연히 궁금해졌다. 실제 공연에서는 어떤 모습일까?
친구와 미리 만나 오늘의 공연을 미리 톺아보기 시작했다. 14일의 레퍼토리는 공연 한참 전에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두었었는데, 12일에 프로그램이 변경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어떤 곡으로 바뀌었는지 슬쩍 살펴보자.
슈만
– 어린이의 정경, 작품 15
쇼팽
- 마주르카, 작품 33
- 녹턴 20번
차이콥스키
- 6월: 뱃노래 (사계 중)
라흐마니노프
- 전주곡, 작품 32 중 (5,10,12)
스크랴빈
- 연습곡 C♯단조, 작품 2-1
- 왼손을 위한 전주곡, 작품 9-1
- 연습곡, 작품 8 중 (5,8,11,12)
드뷔시
- 달빛 (Clair de Lune)
기존에 예정되어 있던 스크랴빈의 크고 강렬한 곡들(피아노 소나타 4번, 「불꽃을 향하여」)이 제외되고, 대신 라흐마니노프의 서정적인 전주곡들, 차이콥스키의 「뱃노래」, 드뷔시의 「달빛」, 그리고 내면적인 초기 소품들로 구성되었다.
추측하건대, 화려하고 격렬한 분위기보다는 하콘의 마룻바닥을 차분히 도닥여 줄 프로그램으로 변경한 것 같았다. 관람객의 시선에서 보자면, 이 선택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여름비가 내린 그날은 하늘이 좀 이르게 어두워졌다. 먹구름이 자욱한 날엔 어떤 곡을 들으면 좋은가?
비가 바닥을 타닥이는 소리에 맞춰 스크랴빈의 불꽃으로 화염의 길을 타오르게 해도 좋았겠지만 그보다 더 낮은 길을 거닐며 부드럽고, 때로는 활기차고, 강인하게 은은한 드뷔시의 달무리와 눈 맞춤 하는 시간이라니—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친구와 나는 일찍이 예술가의 집에 발을 들였다. 피아니스트의 공연이니까 중앙에서 살짝 왼편 자리에 앉아 연주자와 건반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 내 키 반만 한 입간판 옆에서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 스토리도 올리며 계단식 복도에 줄을 서 있는데—갑자기 피아니스트가 1층에서 나타났다. (!!!당황)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연주자를 마주하니 놀라 애써 못 본 척했지만, 막간의 깜짝 이벤트에 신이나 친구와 키득거렸다.
ⓒ 장유진
입장 후 적당히 폭신한 방석 위에 풀썩 주저앉아 포슬포슬한 담요를 무릎 위에 얹은 뒤, 가방에서 꼬깃거리는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오늘의 길잡이가 되어줄 이정표다. 클래식 공연의 진면목을 마주하려면 예습이 필요하지 않은가? 다만, 오늘 곡들은 내가 익숙했던 대형 레퍼토리와 달리, 대부분 소품곡(작은 규모의 곡)이나 길이가 짧은 곡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코스트코에서 파는 그 커다란 곰 인형 하나가 아니라, 여러 작곡가가 보낸 서로 다른 선물 상자인 셈이다. 개수만 해도 20개는 훌쩍 넘는다. 이쯤 되면 일리야 라쉬코프스키는 여름밤의 산타클로스 아닐까.
하콘 공연장은 꽤 시원하다. 그렇다고 외투가 필요할 만큼 서늘하진 않다. 다만, 이럴 때 사치스럽게 카디건이나 담요를 어깨에 걸치면 그보다 포근한 것도 없다. 오늘 그 역할을 피아니스트가 해주었다. 모닥불 같기도 했다. 우리가 수학여행을 가면, 꼭 둘러앉아 타닥이는 불꽃 속에서 감성 타임을 가지곤 하지 않는가? 딱 그 시간이 떠오르게 하는 무대였다.
빗줄기가 꽤 굵었던 날, 친구 한 명을 옆에 두고, 피아니스트라는 모닥불을 앞에 둔 채 멍하니 앞을 응시한다. 안온한 조명 한 가운데에는 연주자가 있고, 수많은 이의 손을 거쳐 온 피아노 한 대가 있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슈만의 「어린이 정경」이 시작되었다. 나도 내 앞의 이정표 위에 손가락 하나를 얹었다. 첫번째, '미지의 나라'다.
3. 한 곡씩, 천천히
로베르트 슈만 - 어린이 정경, 작품번호 15
미지의 나라
그냥 첫 음부터, 다른 세계에 퐁당 들어온 것 같은 기분 좋음을 선사한다. 듣기만 해도 어린 날의 기쁨이 돋아난다. 잊고 있던 하교 종소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친구들과 막 헤어진 뒤 들뜬 기분으로 신발주머니를 돌리며 발을 동동 구르며 집으로 가는 길목 같다. 차분하고 또 깊게 건반을 누르지만, 소리가 무겁지 않아서 좋다.
이상한 이야기
아이가 집에 도착했나 보다. 엄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신나게 이야기한다. 잠깐 가라앉는 기색은 어머니의 부드러운 음색을 닮았다. "그랬구나. 내일은 또 무슨 재미가 있을까?" 오며 가며 나누는 사랑의 대화다. 꺄르륵—거리는 아이의 미소,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따뜻한 시선.
술래잡기
누가 가족이랑만 노는가? 친구와 함께 날뛰는 시간이다! 이 아이, 분명 남자아이다. 이토록 다이내믹하게 뛰어다닐 수는 없다. 정글짐을 순식간에 올랐다 또 내려온다. 미끄럼틀도 타고, 그네로 꽈배기도 만든다.
졸라대는 어린이
친구들이 자랑한 장난감이 눈에 아른거렸나 보다. 어머니께 살살 애교를 부리며 그것을 꼭 가져야만 하는 이유를 조곤조곤 설명하는 입 모양이 귀엽다. 뭘까? 무엇을 보았니? 음에 살짝 질문을 던져보려 했는데, 엥— 안 알려주고 떠났다.
만족
누나한텐 좀 알려주지! 비밀인가 보다. 아기라도 프라이버시는 있을 테니 더는 묻지 않겠다. 다만, 얼마나 기쁜지 제 방 침대에 누워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한다. 일기장을 갑자기 꺼내든다. 오랫동안 가지고 싶었던 것이었구나. 웃는 얼굴이 참 예쁘다.
큰 사건
원하는 것을 사러 가는 길인가 보다. 아, 어깨가 너무 위풍당당하다. 아, 무엇을 원했는지 살짝 알겠다. 슈퍼맨 망토를 사러 가는 것이 분명하다. 발걸음이 어찌나 당당한지, 어머니가 뒤에서 “어머어머” 하시는 입모양이 보인다. 뒷배가 든든하니 가슴을 쫙 편 채 앞으로 향하는 아이다.
꿈
가장 귀여운 순간이다. 신나는 하루였지 않았는가. 고단하기도 했겠다. 남색의 저녁빛이 얼굴에 드리워져 있고,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고요함을 메운다.
아이의 저 고른 숨이 누군가의 전부일 테지.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살그머니 넘겨 이마를 쓸어주는 누군가의 손길이 선연하다. 따뜻한 기운에 더 깊은 꿈 안으로 빠져든다. 어찌나 그렇게 다정하게 바라보는 시선인지. 그리움마저 떠오른다.
벽난로 앞에서
일상이다. 겨울이 아닐 테니 주광색 전등 아래에서 소꿉장난하는 아이의 모습이겠다. 혼자서도 잘 논다. 매번 함께 노는 재미도 있지만, 혼자 역할극을 하며 이래저래 바쁜 즐거움도 있다.
목마의 기사
역할에 완전히 몰입했다! 나는 이제 기사다! 기품 있게 왕을 수호하는, 갑옷을 두른 멋쟁이다! 진지한 눈빛이 꽤 멋있다.
약이 올라서
어머, 그 모습을 사촌이 지켜보다가 놀렸나 보다. 볼이 빵빵하게 부풀고, 어깨는 시무룩하게 접혔다. 방구석 끝으로 가서 슬쩍 들고 있던 장난감 칼을 내려놓는다. 어허, 기사도 지칠 때가 있는 법이다. 혼자 있을 시간을 줘야 하지 않겠나. 다들 고개를 돌려 그를 존중하라!
거짓말
주책이지. 사촌은 구석에 머리를 기댄 채 앉아 있는 아이의 뒤에서 속삭인다. 무서운 이야기라도 하나 보다. 못 들은 척하려 하지만 자꾸 귀가 쫑긋대며 싱숭생숭해진다. 안 믿는다고 소리쳐 보지만,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린다.
자꾸만 가중되는 서사의 흐름에 아이가 벌떡 일어나 스멀스멀 엄마가 있는 쪽으로 향한다. 절대 무서워서 가는 게 아니다. 그냥, 그냥 가는 거다. 엄마가 나를 불렀을 수도 있다.
아이는 잠잔다
엄마가 부른 걸로 치고, 그 품 안에 마구 파고든다. 따뜻한 온기에 긴장감이 사르르 녹는다. 어머니는 아들의 투정을 모른 척 다독여준다.
톡톡, 이마를 한 번. 등을 두 번. 귓가에도 한 번. 어머니의 손길에 잠이 사르르—아이의 안으로 스며든다. 조용하고, 고요한 순간. 새근거리는 숨이 조금씩 들려오고, 어머니는 아이의 이마에 조용히 머리를 맞댄다. 엄마는 늘 여기 있다.
시인의 이야기
눈을 뜨니, 돌아온 현재다. 그는 눈앞에 노모를 마주한다.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서로를 맞대고 있지만, 눈을 감은 채 아이처럼 잠들어 있는 어머니다.
이제는 어른이 된 아이가 그녀의 이마를 한 번, 등을 두 번, 귓가에도 한 번. 아이의 손길에 사르르—미소를 짓는다. 그러다 서서히 사그라지는 기색과 숨소리. 조금은 먼, 이별이다.
프레데리크 쇼팽
ⓒ 장유진
마주르카, 작품번호 33 (1~4번)
이 곡은 폴란드의 민속 춤곡 ‘마주르카’를 쇼팽의 감성으로 재해석한 네 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미리 적어놓은 글자 위로 검지 손가락으로 얹은 채 쇼팽과 눈을 맞출 뿐이다.
1번
약간 ‘사랑의 길’의 곡조가 떠오른다. 꿈을 위해 여정을 떠났지만, 어쩔 수 없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기분이다.
약간의 포도주로 기분을 들뜨게 만드는 과정 같기도 하다. 이 특유의 서정적이고 입체적인 뛰어오름! 쇼팽 피아노 협주곡에서 느꼈던 음표들이다. 반갑다.
론도 형식이라 처음의 주제가 마지막에 반복된다고 하는데, 약간의 가라앉음으로 되돌아온 게 느껴졌다. 신기하다! 이게 론도구나.
2번
조금은 나아진 기분 선상에서 시작한다. “무심한 듯 사랑스러울 것”이라는 조언이 딱 들어맞는다.
이 조언을 알고 들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싶은, 배부른 생각도 든다. 뒤로 갈수록 통통 튀어 올라 앙증맞음이 가중되지만 그렇다고 막 튀어 오르진 않는다.
같은 주제가 또 다시 돌아온다! 이것도 론도일까? 시작과 끝이 같다는 건 꽤 반갑고, 듣기에도 좋다.
3번
뭔가 들어본 것 같다! 이미 유명한 곡조가 아닐까. <어린이 정경>의 ‘미지의 나라’가 생각날 만큼, 어딘가의 풍경을 명랑하게 그려주는 기분이다. 손을 잡아주는 것 같기도 하다.
에버랜드에 가면 이런 소리가 마음을 동동—뛰게 할 것 같고, 경의선 숲길을 혼자 산책할 때 풀랑 바이올린 소나타 119를 들을 때 내 발걸음 소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어떤 모양새냐고? 강아지가 신나서 왼발, 오른발을 동-당-동-당 거리며 걷는 모습을 본 적 있는가? 딱 그거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이 기분 좋은 패턴들. 질리지 않는다. 점점 사그라드는 듯하다가, 영롱하게 끝을 맺는다.
4번
순식간에 감정선을 짙게 끌어와 버린다. 아까의 ‘시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듣기 좋은 아이러니다. 꾹꾹 눌러주는 연주자. 동작이 크진 않은데도 음색이 선명하다.
한 번의 누름 자체가 분명하니까, 발음이 좋은 발라더의 노래를 듣는 기분이다. 표정은 성마르지만, 소리는 짙다. 과장됨이 없고, 음악이 전면에서 넓게 드리워져 있다.
후반부에서 흐름을 잡아 이끄는 구간에서는 왼손의 쿵— 하는 저음이 인상 깊다. 꼭 저런 소리가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저런 확정적인 음을 내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마스터 클래스에서 배웠다. (실제로 그렇게 가르쳐 준 건 아니지만…) 음악은 점차 서정적인 동요가 되어 물방울을 가지고 노는 구간에 도달한다.
아— 듣기 좋다. 귀가 쨍하게 쇼팽을 그려주는 일리야 라쉬코프스키다. 다시 익숙한 선율이 되돌아오지만, 표현하는 감정선의 세기는 매번 달라진다. 왼손이 서로 다른 색감의 물방울을 통— 하고 8번 정도 튀어 오르게 만든 뒤 강렬하게 끝을 맺는다.
녹턴 20번
같은 작곡가의 곡이기에, 별다른 멘트 없이 연주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누구나 서두만 들으면 익숙하다고 느낄 만큼 유명한 곡이다.
시작에 피워낸 첫 음이 기저에 깔린 채, 사라지지 않고 조용히 이어진다. 그 잔향은 어디까지 도달할까. 은은한 울림이 미미하게, 그러나 분명히 머문다.
연주자는 꾹꾹— 소리를 건반 아래로 눌러 보낸다. 굳이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는, 심장 언저리에서 흐르는 선율이다. 심지어 시작의 음을 떠내보내는 그 길마저도 여운이 깊다.
클래식 공연에서는, 연주자가 끝났다는 신호를 주기 전까지 박수를 기다리는 것이 하나의 미덕이다. 왜일까? 연주자는 손을 떼었지만, 음표는 악기 안에 남아 여전히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형의 것이 공간을 떠나도록 기다려주는 마음.
연주자도, 우리도 그 소리를 다시는 만날 수 없다. 소멸의 과정 자체를 바라보는 일— 그것도 음악을 마주하는 자세겠다. 사람이 낫을 들고 가로로 휘두를 때 생기는 그 아치형의 흐름. 그 곡선이 서서히 파동이 되어 멀어져 간다.
그날 나는 소리의 파장이 공기와 이별하면서 오히려 더 커지는 일순간을 목격했다. 그 울림을 끝까지 지켜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피아노 건반 소리의 진짜 매력이다. 아— 즐겁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 사계, 작품번호 37a 중 6월: 뱃노래
ⓒ 장유진
가만 보면, 물의 파동을 천천히 그려내는 것 같다. 연주가의 상체가 거의 앞쪽으로 몰려 있는데도, 소리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다. 사계의 6월을 듣는 김에, 우리의 지난 6월은 어땠었는지 떠올려보자. 7월의 중반에서 떠올리는 지난달은 벌써 꽤 아득하다. 지금만큼 더웠던가? 날이 좋았던가?
여러 생각들이 자리를 차지하려는 찰나, 피아니스트가 강한 타건으로 바람결 몇 가지를 불러온다. 건반과 연주자의 눈동자가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어쩜 저렇게 올곧게 시선을 마주할 수 있을까? 팔꿈치와 어깨로 감정을 충분히 내려놓는 모습이 신기하다.
한 음, 한 음에 마음을 담아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나니, 더욱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6월의 뱃노래다. 나는 어떤 모양으로 그 배 위에 몸을 실었던가? 가만히 쪼그려 앉아, 물살 안에 손을 살짝 담갔던 것 같다. 마음을 한껏 뉜 상태로, 얕은 별 무리가 되어 사라지는 음을 바라본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전주곡, 작품번호 32 중 발췌 (5,10,12번)
5번
라흐마니노프다. 당신은 연주자마다 유달리 잘 맞는 작곡가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일리야 라쉬코프스키는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할 때 유난히 합이 잘 맞는 것 같다.
첫 음을 띄우는 순간부터, 그는 옛사람과 ‘공명’한다. 실연으로 들으면 단박에 깨달을 수 있다. 아, 이 사람과 이 작곡가는 꽤 잘 맞는다. 피아니스트가 음 하나마다 작은 종을 흔든다고 상상해 보시라. 오른손의 강렬한 움직임을 마주하셨는가? 흐름을 막아설 수 없는 꽃잎이 마구 피어난다.
손이 교차한 지점에서는 흩날리는 벚꽃과 다름없다. 무언가를 가득 채워내는 소리다. 마룻바닥 위에 서서히 퍼져나가, 고요히 사라진다. 소멸하는 그 파형의 모습이, 눈앞에 확연히 ‘보인다’.
10번
일리야 라쉬코프스키의 10번은 ‘내려놓음'이다. 개별적인 요소는 우아하지만, 흐름 자체는 매 순간이 기다림이다. 처음 그려진 음이 오래 머물 수 있도록, 그는 충분한 공간을 내어준다. 페달을 어떻게 쓰는지 궁금해질 만큼, 리듬을 타오르게 만드는 순간들이 유독 인상 깊다.
12번
여문 라일락 같다. 오른손 아래로 또렷한 음들이 한 층 더 몰려 있는데, 틈 사이가 가벼워 귀가 여백에 집중된다. 왼손이 그 아래를 단단히 받쳐 흐름을 채우면, 오른편은 꽃잎을 털어내듯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재빠른 춤을 추기 시작한 곡은, 어느새 어딘가로 향하는 길목에 다다른다. 어딜까? 추측하기엔 이미 가녀려진 채 곁을 떠나버렸다.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 장유진
연습곡, 작품번호 2-1 (Etude in C-sharp minor, Op.2, No.1)
제목이 ‘연습곡’인 걸 알고는, 연주자들은 막상 이 안에서 어떤 걸 연습하는 걸까 문득 궁금했다.
무엇을 숙달시키기 위해 이 과정을 되풀이할까? 무엇을 길러내려 할까? 건반의 표면에 어떻게 맞닿아야 할지를 고민할까? ‘누른다’라는 행위는 같지만, 내 지문과 그 하얀 것 사이에서 어떻게 ‘감정’을 발현시킬지를 고민할까?
오늘의 피아니스트는 작곡가가 그려낸 서정성을 그만의 애환과 무게감으로 선명하게 누르고 있다. ‘친다’기보다, 저 아래로 꾹꾹— 담아낸다고 보는 게 맞겠다.
클래식 곡들을 듣다 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감정을 둘 이상 섞어낸 작품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활기찬데 슬프다. 이런 묘사하기 힘든 감정들이 많아 흥미로울 때도 있지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멀어지고 싶을 때도 있다. 어렵다, 참.
왼손을 위한 전주곡, 작품번호 9-1 (Prelude for the Left Hand, Op.9, No.1)
왼손이 오른손의 자리에 올라 노래하는 시점이다. 투박하고 무게감 있던 악기가 갑자기 높은 소리를 내는 기분이 든다. 원래의 자리에서 쿵— 하고 내리찍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주 강한 압력으로 종을 울린다.
한 손으로도 음의 향기는 충분히 피어난다. 눈을 감고 들었다면, 아마 이게 한 손인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앞에서 연주자는 오른손을 의자 위에 얹고, 왼손으로만 조용히 속삭여줄 뿐이다.
12개의 연습곡, 작품번호 8 중 발췌 (5,8,11,12번)
5번
왼손은 다시 공중으로 떠오르고, 휴식하던 오른손은 찬란함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나는 곡을 들을 때, 연주자들이 빛을 보여주는 지점을 유심히 살펴보곤 한다. 그렇다면, 일리야 라쉬코프스키의 빛은 어디에 있을까?
하얀 건반과 손바닥의 지면이 맞닿기 직전, 바로 그 작은 틈. 그 안에 그의 빛이 있다. 놀랍도록 담담하고, 정돈된 소리를 그 틈에서 내보낸다.
8번
5번보다 나른한 속도감 안에 놓여 있다. 연주자의 자세를 보시라. 눈빛을 보시라. 흐트러짐 없이, 올곧게 피아노와 눈을 맞춘다. 연주하는 이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까?
아무것도 없는 하얀 배경일까? 귀로 소리에 집중하고 있을까? 지금 피어나고 있는 현상을 음미하고 있나? 손에 닿는 감각에 몰입하고 있을까? 됐다. 완전한 영감의 순간이 아니겠나. 방해할 수 없다. 나는 그냥 조용히, 내 자리에 가만히 앉아 멀찍이 구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1번
손가락마다 공명하는 은종이 물방울이 되어 오선 위를 또렷이 찍어낸다. 확실하고, 타협 없이 내딛는 발걸음인데도 왜 부담스럽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이래서 ‘연주자들의 연주자’일까?
분명할수록 따뜻하다. 일자 형태의 눈물방울이 투명한 유리창 위에서 여러 갈래로 흘러내리는 모습 같다. 피아니스트의 손을 보자. 소리를 띄우고, 그 틈에서 잠시 머무른 뒤, 조용히 주먹을 쥔 채 멀어진다.
12번
한숨에 흐름을 고조시킨다. 그러다가 다시 내려앉아, 여리고 또 여리게 노래한다. 이 강약 조절! 어쩌면 좋을까! 소리가 이렇게 기세가 강하니, 말릴 재간이 없어 함께 끌려갈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니, 그의 앞에는 악보도 없다. 이 밀착된 집중력 속, 모든 소리와 숨이 온전히 그의 것이다. 이미 체화된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내보이고, 연주자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관객을 향해 싱긋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한다. 아, 이런 연주자구나. 일리야 라쉬코프스키는.
클로드 드뷔시 - 달빛
ⓒ 장유진
모두가 아는 그 ‘드뷔시’의, 그 ‘달빛’이다. 다만 대부분은 유튜브 영상이나 음원으로 즐겨 들을 뿐, 실제 연주가의 손안에서 피어난 달무리를 직접 붙잡아 본 경험은 드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꽤 운이 좋은 편이겠다.
달이 하늘 높이 떠 있는, 밤 9시가 넘은 시점이다. 이 무덥고 습한 여름을 피해 거실 바닥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긴 여운을 정리해 줄 연주가가 눈앞에 있다.
첫 음과 그 흐름을 굳이 묘사해야 할까. 아마 그 공간에 있던 자가 아니라면 느낄 수 없는, 온난한 하얀 안개가 피어났다. 나는 눈을 감고 머리를 무릎 위에 묻었다. 바닥에 손가락 몇 개를 얹었던 기억이 난다. ‘이걸 내가 참 좋아해···’ 생각하며, 무심히 그어지는 긴 선이 사라질 때까지 응시했다.
마냥 따뜻하다고 느낄 찰나, 쨍— 하는 달의 기운도 함께 다가오며 음색이 보다 선명해진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이 날의 하우스 콘서트 1:16:51을 꼭 보셨으면 좋겠다. 연주자들이 피워낸 소리는 생각보다 금세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드시 마음을 열고, 눈을 감고, 기꺼이 기다려 들어내는 자세가 필요하겠다. 그래야 옆자리를 내어줄 테니까.
눈앞에 있는 것에만 마음을 주던 연주가는 때때로 고개를 들어 보이며 고요히 끄덕인다. 그 안으로 빨려들 듯 상반신을 기울이기도 하고, 팔 하나를 높이기도 한다. 그 광경 자체를 음미해 보자. 피아노에 앞서, 드뷔시에 앞서, 이 음악 안에서 살아나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다.
하콘 영상을 다시 보니 카메라도 예술을 한다. 음이 멀어지면서 카메라도 화면이 흐려지더니, 자연스럽게 디졸브 된다. (카메라 감독님, 칭찬해)
앵콜 –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전주곡 나단조, BWV 85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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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당시에는 처음 들어보는 곡이라 그냥 조용히 감상했다. 다만 이게 바흐의 곡일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뭔가 규율적인 기운은 여전한데, 소리의 색감이 유난히 자유롭게 날뛰고 있었다. 아마 편곡 덕분이겠지.
이런 곡은 양손의 서로 다른 표현법을 음미하는 데 큰 즐거움이 있다. 흐르는 것과 두드리는 것. 그 두 지점에서 모든 음이 다뤄진다. 음악과 가장 밀접하게 닿고자 하는 연주가를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4. 끝내며 - 나의 빛은 어디에 있는가?
ⓒ 장유진
내향적인 연주자들은 연주 때와는 전혀 다른 쑥스러운 표정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그 모습이 웃음이 나면서도, 왠지 이해가 된다. 나도 관객석에서는 음악에 심취해 있다가도 연주자가 살짝 지나가기라도 하면 흠칫 움츠러들지 않던가. (음하하) 그래도 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가까이 맞닿지 않더라도 이미 충분히 좋은 인연이다. 피아노 하나를 두고 이렇게 1시간 넘게 인사를 나누지 않았는가.
참, 인간으로 태어나 다양한 호사를 누리고 있다. 공연이 끝나고 친구와 오늘의 공연에 대한 회포를 풀기 위해, 달달한 하이볼을 하나씩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함께 20개가 넘는 선물 박스를 살펴본 친구는 내게 한 문장으로 기쁜 마음을 건네주었다.
“네가 왜 클래식을 좋아하는지 알겠어.”
아, (···) 그 여름밤에 빛이 스몄다.
그 많던 선물 상자 중, 내 것은 여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