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집과 꿀』은 단편소설집으로,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놓인 한국계 디아스포라들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그런데 원치 않은 사건들에 휘말려 집과 정체성을 상실한 이들의 삶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과연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드러나지 않는 것이 곧 정체성이고, 대답할 질문이 적을수록 살기 수월한 디아스포라들을 완벽히 그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상실을 정체성으로 삼지 않고 그들을 이해할 방법이 없을까. 여기에는 완전한 역사적 기록보다는 시적인 말들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정답은 없겠으나, 폴 윤은 말로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 디아스포라의 삶을 가장 섬세한 감각으로 묘사한다.
상실과 자리잡음 사이
디아스포라는 전쟁, 탈북, 강제 이주 등의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영원한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를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타인의 약점을 찾아내는 동물적 능력으로 살아간다. 과장을 보태자면, 그렇기에 이토록 오래, 세계를 이루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디아스포라는 그 잔인한 방식에 의해 쉽게 고립된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낯선 타인을 식별해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이민 와 캐나다의 교도소를 거쳐 낯선 도시를 옮겨다니는 보(단편 [보선]),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외진 산골 고향에 은둔한 동수([달의 골짜기])는 직접적인 디아스포라의 삶을 보여준다.
출소 후 끌려온 도시의 카지노에서 일을 구한 보는, 멋대로 난 소문을 따라 험악하게 굴면서 자리를 잡으려고 노력한다. 어떤 편견은 편안한 방공호가 되어주기도 한다. 극도로 감정이 절제된 보가 낯선 곳에 자리를 잡는 소리. 그것은 카로와의 대화, 즉 사람과의 교류에서 비롯된다. 그것만으로도 살고 싶어지는 밤도 있다.
“보는 카로에게 하고 싶은 질문들을 계속 더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거기 달빛 속에, 카로 곁에 긴장을 풀고 가볍게 서 있는 동안, 공기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났고, 바람이 불었고, 그는 갑자기 자신이 아주 먼 길을 왔으며 무언가 굉장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리라는 걸, 오늘 밤이나 내일은 아닐지 몰라도 머지않아 일어나리라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집중했다. 그들이 밤의 마지막 시간 내내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그 느낌이 지속되기를 바라며.” (p. 53)
동수는 버려진 고향 집을 묵묵히 고치고, 어느 날 찾아온 두 아이, 운식과 은혜를 들인다. 그들의 삶엔 물음표가 없다. 그저 하루하루를 보잘것없는 일거리로 채우며, 무언가를 기다리듯 시간을 보낸다. “달은 뜨고, 기울고…”
냉전 시대에 탈북해 남한과 독일을 거쳐 스페인에 다다른 장년 여성 주연은 어느 날, 아들을 만나게 될 기회를 얻는다. 삼십 년 전, 도망치느라 그녀는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다. 이제는 ‘니콜라이 코마로프‘라는 다 큰 어른의 이름을 발음하기 위해 주연은 도움을 받아야 했다.
끝없는 질문을 뒤로 하고
시끄러운 외부의 세계로부터 도망치거나, 밀어내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타지에서 몇 세대를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영국에 터를 잡은 탈북민의 자녀이자 부부로 살아가는 그레이스와 해리([크로머])는 가게를 운영한다. 두 사람은 고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각자의 아버지가 어떻게 영국에 도착했는지도 모르지만, 서로의 가족이 되어준다.
영국에서 태어나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북한에서 왔는지, 북한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질문은 평생 그들을 따라다닌다. 그것은 “그들이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레이스와 해리 둘 다 한국어를 서서히 잊어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크로머]는 영원한 타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질문의 무게를 생각하게 한다.

한편, [역참에서]는 1608년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일본에 있는 조선인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을 담는다. 조선인 고아 소년의 고국 송환 길을 함께하는 사무라이 도시오는 그 길에서 뿌리 없이 떠도는 아이의 현재 삶을, 그리고 미래를 헤아린다. 여느 아이처럼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또래 보다 많은 것을 아는 조숙한 얼굴을 한 유미를 생각하면 도시오는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타오른다. 그곳을 긁는다.”
고국으로 데려갈 수행원 앞에서 가지고 놀던 화살로 개를 죽이고 달아난 유미에게 화를 내는 도시오의 마음은 어떨까. 드디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는데, 유미는 왜 도망쳤을까. 두 사람의 분노와 슬픔은 누구의 탓인가. 그 감정의 뿌리는 디아스포라의 그것처럼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일까.

“어디서 왔냐”는 흔한 이 질문이 잔인한 이유는, 어느 누구도 100퍼센트 멋진 대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영원히 거슬리는 근원에 대한 질문. 사실 그건 가시가 할퀴고 간 상처로 인하 고통임에도, 우리는 가시를 미워하며 상처를 달랠 줄 모른다.
옮긴이 서제인은 폴 윤의 소설을 번역하는 일이 문학보다는 미술의 영역에 가깝다고 했다. 그 말에, 왜 단편의 끝마다 홀로 남겨진 듯이 슬픔이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최소한의 선”으로 이루어진 이 미니멀리즘적 소설은 디아스포라가 숨어 있는 존재인 듯, 기억의 파편을 굳이 이어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공백으로 존재하는 부분을 그물망처럼 드러냄으로써 상실의 아픔과 미완의 회복을 마주하게 된다.
알려고 해도 다 알 수 없는 것들은 어렵다. 역사로 편입시키기에도, 미시사로 남기기에도 애매하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을 것들을 이렇게 소설로나마 상상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현실에는 더 소설같은 일이 많았을 테니, 비약은 아닐지 모른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기적이었던, 지금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혹은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조금은 알게 되는. 우리가 초면이 아니게 되도록 만들어준 소설, 『벌집과 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