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의 스윙걸즈가, 근 20년 만에 돌아왔다. 엉망인 리듬과 웃지 않을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받고 있는 여고생들이 우연히 ‘빅밴드 재즈‘의 세계에 들어오면서 자신들만의 ’스윙 리듬‘을 찾아가는 좌충우돌 이야기. 하이틴 영화에 완벽한 클리셰일 수 없다. 하지만 아는 맛이 더 끊기가 어렵듯, 103분의 러닝타임이 참 짧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아주 사소한 청춘의 파편까지 응축해 담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래서 장면과 장면이 흘러가는 것을 붙잡을 수 없어 슬펐다. 감독 야구치 시노부 특유의 코미디 감각과 배우 우에노 주리의 젊은 시절 모습이 영화의 킥이라면 킥이다.
또, 악기를 전혀 다뤄본 적 없었던 배우들이 무려 4년의 연습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후에 알고 픽션 밖, 청춘에 진심이었던 사람들의 현재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스윙 재즈의 매력에 빠져 아끼던 컴퓨터를 냅다 팔아서 소리가 잘 나지도 않는 고물 악기를 사고, 연습할 곳이 없어 강가나 동전 노래방에 숨어들고, 돈을 벌기 위해 알바를 한다. 아등바등 삶을 이어가기 위해 하는 행동은 어른들과 다를 바 없으나, 그 동기가 단순히 소리를 내고 싶어서 라는게 이 소녀들이 빛나는 이유가 아닐까.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설사 어른들에게 혼이 날 지어도 몰래 하고야 말던 그때. 금기와 처벌 같은 무거운 건 모르겠고 그저 그것을 해야 직성이 풀리던 그때. 완벽하지 않아도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흡족하던 그때. 세상이 주는 자극에 불이 잘 타오르던 그때의 향수에 관객은 어쩔 수 없이 젖어든다.
실수가 용납이 되고, 욕심이 응원받는 그런 세상은 여전한가. 초고화질의 스크린 세계에 언뜻 빛바랜 듯한 <스윙걸즈>가 돌아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한 향수만은 아닌 게 확실하다.
재즈가 하고 싶어 울고, 무대가 갖고 싶어 마트, 놀이터, 도박장을 전전하는 소녀들과 소년 하나의 모습이 부럽고 기특하다. 그러다 꼬질하게 꿰맨 퀼트 가방에서 각자의 악기를 꺼내들고 진지하게 연주를 하기 시작하면 어떤 존경심이 들기도 한다.
그런 세상이 안녕하도록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을까.
뒤 박자에 강세를 두는 재즈는 묘한 매력이 있다. 처음에는 틀리고 어색하게 들려도 왠지 들썩 거리게 되는 마법을 부린다. 마치 스윙걸즈의 엉망인 리듬이 중독적인 것처럼.
재즈에서는 엇박자가 맞고, 정박은 재미가 없다. 그리고 신호등 안내 소리처럼 재즈는 일상 어디에나 있다. 나만 들리는 엇박자가 어울리는 세계를 찾기만 한다면, 청춘이 영원하다고 믿을 수 있지 않을까?
반대로 스스로가 지금 재미없는 어른이라, 대조되는 그들의 모습에 바삐 흐르기만 하는 시간의 잔인함을 다시 한번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더 눈을 뗄 수 없었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에서 면역 없이 웃어버렸던 것 같다. 신청서를 깜박해 공연을 할 수 없게 되거나, 눈 속에 갇혀 기차가 멈춰버려도 소녀들은 어찌 됐든 무대에 오른다. 그리고 마음껏 연주한다.
티 나는 억지로, 영화적 허용으로, 말도 안 되는 우연으로 소녀들을 무대에 올려주는 엇박자. 대책 없는 긍정은 매번 대책 없이 좋다.
순수한 열정이라는 말만큼 진부하고 지겨운 청춘의 언어가 있을까? 어쩌면 이 이상한 거부감은 어릴 적 나에 대한 질투로 비롯되는 것일지 모른다. 다시는 오지 않아 괜히 미운, 그 찰나의 소중함이 얼마나 눈이 부신지 알기에.
그래서 눈이 시리더라도 당당한 스윙걸즈에게 눈을 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정박자든 엇박자든, 내가 내는 소리가 맞다고 근거 없이 당당하던 시절, 그리고 그 맹랑함에 기꺼이 꺾여주던 세상을 다시금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대책 없이 웃긴 그들의 모습에 동조하며 극장이라는 것도 잊은 채 나도 모르게 따라 웃게 되는 영화.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는 봄에 어울리는 영화 <스윙걸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