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킹 아이스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각자의 이유로 꽁꽁 얼어붙은 세 인물이 만나 서로 부딪히며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가이드로 일하는 나나(주동우), 그 옆을 지키는 샤오(굴초소), 그리고 잘나가는 상하이 금융권 샐러리맨 하오펑(류호연)이 그들이다. 조선족이 대부분인 중국의 도시 연길에서 일주일 남짓한 시간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 꼼짝 않던 그들의 세계에 균열음이 번진다. 쨍—쨍—.
누가 물이 되어 흘러가고, 수증기가 되어 날아갈까.
분자와 분자 사이의 거리
얼음을 꺼내 수면 위에 올려놓으면, 순식간에 녹기 시작해 다시 물로 돌아간다. 이 원리를 인물들에게 적용해 만든 영화가 바로 《브레이킹 아이스》다. 더 작은 분자 단위로 보면, 얼음은 일정한 분자 배열로 고정되어 있지만, 외부의 영향을 받으면 그 구조가 무너지며 상태가 변한다. 즉, 얼음은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다. 다른 분자와의 충돌이 있어야만 흐트러지고, 마침내 흐르게 된다.
갑갑한 상하이에서 떠나온 하오펑은 어쩌면 예측 가능한 삶, 즉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이다. 스스로도 그 지루한 일상을 "이쯤에서 끝내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그러나 한 번도 안전한 길에서 벗어나 본 적 없는 그의 태도는 여전히 뻣뻣하기만 하다. 얼음처럼 딱딱한 그 앞에 나나가 나타나면서, 그의 내부에서 분자배열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제멋대로 춤추고, 마시고, 울고 웃는 나나를 보며, 멈춰 있던 하오펑의 시간도 서서히 흐르기 시작한다.
서로의 체온에 닿으며 감정은 흐르고, 이내 서로에게 물들기 시작한다. 관계의 밀도는 분자 사이의 거리처럼 낮아지고, 대신 존재의 경계는 점차 확장된다.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상태 변화다. 자유로운 영혼인 나나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하오펑과 샤오. 세 사람 사이의 감정은 서로를 향하지만, 녹는점에 도달하기까지는 조용하다. 어느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청춘의 사랑은, 마치 재 묻은 얼음처럼 탁하고 흐릿하다.
영화의 또 다른 제목은 《연동(燃冬)》이다. 중국계 싱가포르 출신 감독 앤서니 챈은 두 제목을 모두 염두에 두고 지은 것일까. '연동'은 ‘불타는 겨울’이라는 뜻으로, 한때 타올랐다가 사라지는 계절의 순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영화는 제목에서 출발한 호기심을 끝내 의문으로 남긴다. 정말로 이 세 사람의 겨울은 불타올랐던 걸까?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차갑디차가운 사랑을 담고자 했는지, 그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시대의 집단적 우울
나나 역의 주동우가 출연한 《먼 훗날 우리》,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역시 아픈 청춘들에 관한 이야기다. 주동우는 아픈 와중에도 단단히 자기 살길을 찾아내는 캐릭터에 대한 깊은 내면 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 여기도 비슷한 나나가 있다. 낮에는 수술한 발을 주무르며 관광객들 앞에서 신나게 떠들고, 밤에는 술로 시간을 죽인다. 침대에서는 스케이트를 타고 빙판 위를 가로지르는 꿈을 꾼다.
나나는 고향으로부터 도망쳐 중국이지만 한글이 혼재된 간판들로 가득한 연길에 숨었다. 뿌리가 불분명한 이곳에서 나나는 질문으로부터 자유롭다. 발에 흉터는 무엇인지, 피겨는 아주 그만둔 건지, 집에는 언제 돌아갈 건지, 꽤 가까운 사이로 보이는 샤오조차 묻지 않는다.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이유일지 몰라서일까.
사실 슬픈건 다 똑같다. 팬데믹이 지나간 후, 혹은 잠잠해진 틈에 우울은 우리의 지병이 되었다. 언제 또 삶을 일시정지당할지 모른다는 무의식이 이미 몸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소중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겨워지기도 한다. 우울도 지겨워지지 않나. 모두가 어느정도는 슬픈 세상, 꿈을 빼앗겼거나, 할부로 갚아나가고 있는 삶. 영화는 그런 시대의 사랑을 이야기 한다.
이 영화가 ’치유’까지 다루는지는 모르겠다. 상징이 난무하기 때문에, 오롯이 세 사람의 현재에 집중한 영화같기도 하다. 이유를 묻지 않아도 서로 아는 관계, 친근하면서도 긴장감을 유지하는 관계란 낯설지 않다. 이는 초반에 얼음이 똑같은 모양으로 재단되고 육지로 운반되는 장면과도 겹쳐진다. 세 얼음 조각들은 무엇이 될까.
도피의 종말
얼음으로 된 미로에 갇힌 세 인물이 하염없이 거니는 장면이 있다. 그들은 벽을 마주치기도 하는데. 어쩐지 막다른 길이 아니라 도착지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사실에 놀라지도 않는 듯, 가만히 서 있다.
하얀 입김과 숨소리만이 가득 채우는 이 장면은, 이들의 무기력함과 체념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사실, 왜 슬픈지 아는 것보다 중요한 건 이 방황의 끝이 새로운 시작인지, 아니면 진짜 끝인지를 묻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뜨거운 숨을 내뱉는 이들은 과연 변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가장 큰 상태변화를 겪는 인물은 샤오라고 할 수 있다. 내내서브 라인으로 암시되던 지명수배범이 말미에 체포되는 장면은 상징적 장치이다. 남자의 이미지는 세 인물의 주위를 맴돌며, 억눌린 감정과 사회로부터의 도피 욕망을 드러낸다. 남자 역시 세상에서 밀려난 존재이며, 샤오는 그와 가장 가까이 교차하며, 심지어 직접 마주치기도 한다.
나나를 좋아하는 샤오가 하오펑에게 화를 내지 못하는 순간도, 오히려 그들과 함께 백두산 천지를 보러 가기 위해 운전대를 잡을 때도, 샤오의 내면에서는 무언가가 들끓고 있었을 것이다. 슬로우모션으로 연출된 수배범의 포획과 떠나는 샤오에게 나나가 건네는 키스는 서로 다른 장면이지만, 같은 욕망을 가르킨다. 그가 나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궁극적으로 그것이 이뤄질 수 없음을.
이런 체념은 또 다른 시작을 낳는다. 나나는 다시 집으로, 하오펑은 절벽 대신 사랑을 선택하고 샤오는 자유를 선택한다. 두 사람 못지 않게 뜨겁게 진동하는 샤오와 그의 오토바이는 증기를 내며 연길을 떠난다. 도피의 종말은 또 다른 도피일 수도 있으나, 이들의 변화가 계속될 거라는 믿음은 어쩐지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는 결국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한 절망을 그리는 것도 아니다. 꽁꽁 얼어붙은 사회 속 개인들이 아주 우연히 서로 충돌할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그저 조용히 관찰하는 듯하다.
고요하게 슬픈 세대라는 생각이 든다. 높고 시린 빙벽 앞에서, 세 사람은 입김으로 그것을 무너뜨릴 순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듯 보인다. 영화 속에서는 누구도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샤오가 떠난다고 말할 때, 어른의 슬픈 어깨를 포착하고 힘없이 눈물 흘리는 조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고립의 예감, 아니면 묘한 동질감에서 오는 안도감이었을까?
어쨌든, 하오펑이 떨어져 산산조각나는 얼음이 되기 전에 녹아서 다행이다. 물리법칙에 따르면 얼음이든 물이든 증기이든,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세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이라기 보다는, 더 본질적인 어떤 유대—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관계. 결국 그것에 대한 이야기였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