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옛날 영화를 많이 찾아봤다. 여기서도 내 반골 기질이 등장하는데, 요즘 나오는 영화들은 다 너무 뻔하고 비슷해서 보기 싫었다. 그렇다고 예술적인 작품을 보자니 내 교양이 그 수준을 못 따라간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는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닌 입맛을 만족시킬 것들을 찾아 헤매던 중에 ‘노팅힐’을 찾았다. 이 영화가 나에게는 제육 덮밥이었는지 세 번 정도 다시 봤고, 어지간한 장면은 지금도 물어보면 바로 대답할 수 있을 정도다.
그 당시에 ‘노팅힐 커피 하우스’를 알게 됐고 순전히 이름 때문에 찾아갔다. 직접 가보니 인테리어 소품 같은 것들을 보면서 이름만 가져다 쓴 게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어 마음에 들었다. 고맙게도 그 날의 날씨까지도 영화처럼 적당히 맑았고, 적당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옷에 쏟아버린 커피는 안나를 윌리엄의 집으로 데려갔고, 그날 내 입에 쏟아진 커피 한 잔과 나를 뒤덮은 햇살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인연을 데려왔다.
“본인을 정의하자면?”
음,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카페를 꼭 했어야만 하는 사람’이다. 여길 오픈한 이후로 이곳이 나의 일터이자 쉼터가 됐다. 손님들이 몰아치면 바쁘게 일을 하느라 잡생각을 할 틈이 없다. 반대로 한산한 날이면 미뤄뒀던 일들을 하나씩 처리하거나 조용히 쉬면서 나를 되돌아본다. 어지러운 생각들을 털어내고 빈자리를 나로 다시 채울 수 있다. 어떻게 보더라도 좋은 것만 안겨준 곳이라 이 공간 자체가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수식어다.
“카페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계속 이 분야에서 일을 해왔나?”
나도 남들처럼 그저 카페 가는 걸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 중 하나였다. 카페에 머물렀던 시간은 나에게 너무나 좋은 추억으로 남았는데, 문득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렸던 그 경험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마음으로 카페를 시작했다.
꽤 예민한 사람이다 보니 처음에는 힘들었다. 카페를 나서는 손님들의 표정 하나까지 신경 쓰였다. 그분들은 아마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나 혼자 이런저런 상상을 더 하며 마음에 짐을 쌓아뒀다. 늘 어느 한구석이 짓눌려 있는 것 같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다행히 지금은 그 짐들은 내려놨다. 점점 일에 적응해 가면서 자연스럽게 모두가 만족하는 공간을 만들 수는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욕심을 내려놨다고 해야 할까. 당연히 이곳을 찾아오는 분들에게는 최선을 다한다.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나의 공간이 맞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내려놓는다. 이제는 적절한 선에서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웠다.
“노팅힐은 좋아하는 것과 보여주고 싶은 것 중에 어느 쪽에 가까운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공간으로 풀어낸 곳이다. 인테리어도 내가 좋아하는 색들을 많이 썼고, 불어오는 바람이나 햇살을 느끼는 게 좋아서 창문도 거의 열어둔다. 이런 사소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이 공간을 찾아오는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내 입맛에 맞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운 곳이다. 그래서 리뷰를 읽다 ‘취향이 느껴진다’라는 말이 눈에 들어오면 내 마음이 잘 전해지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노팅힐 커피하우스’라는 이름은 영화에서 따 온 것인가, 아니면 지역에서?”
나에게 ‘노팅힐’이라는 단어가 그리는 풍경을 담은 이름이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노팅힐’이라는 영화는 나에게 따스한 온기를 안겨줬다. 잔잔함 속에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자칫 무료해질 수도 있는 반복적인 윌리엄의 삶에 들이닥친 안나라는 변화의 바람도 좋았다. 별일 없이 흘러가는 소소한 일상에 이따금 변화의 바람이 불어와도 조금 살랑거릴 뿐인 그 모든 조화가 나에게는 따스함이었다.
이 카페 위치를 자세히 보면 다른 골목보다 아주 살짝 높은 언덕에 있다. 노팅힐이라는 지역이 언덕에 있는 것과 비슷해서 이 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 유럽 주택가에 있을 법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기에 하우스를 붙였다. 집처럼 편안한 분위기에서 잘 쉬고 갈 수 있는, 그런 따스함을 담은 공간이라고 할까.
흔히 말하는 유럽 분위기의 카페를 많이 다녔는데, 너무 유럽 같다고 느껴졌다. 카페라는 공간에 유럽을 때려 박은 느낌? 그런 곳보다는 적절하게 균형을 맞춘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유럽과 한국, 카페와 집, 그 어딘가에 적절하게 자리 잡은 곳. 그렇게 방향을 잡고서 이런저런 것들을 내 나름의 취향으로 맞춰가다 보니 ‘노팅힐 커피하우스’가 만들어졌다.
“이 카페를 시작했을 때 보여주고 싶었던 이미지 같은 게 있는지?”
다시 한번 찾아오고 싶은 곳을 만들고 싶었다. 어떤 이유라도 좋았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듯이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의 끝에는 내가 만든 이곳으로 다시 오고 싶다는 마음이 있기를 바란다.
책이나 영화 포스터, 식물 같은 게 많은 것도 그런 이유다.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를만한 곳에 이런저런 소품들을 가져다 뒀다. 여기서 읽었던 책이 마음에 들어서. 책을 읽으면서 쉬던 시간이 좋아서. 우연히 눈에 들어온 화분이 너무 예뻐서. 어떤 이유라도 좋았다. 누군가에게 나의 공간이 다시 한번 오고 싶어지는 곳이 됐으면 한다. 처음에 했던 말과 이어지지만, 여기서 손님들의 하루에 내가 느끼던 그 따스함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단골들의 공통적인 특징 같은 게 있는가? 기억에 남는 손님이라거나?”
공간을 잘 느끼는 사람들인 것 같다. 작은 것이라도 바뀌면 바로 알아차린다. 꽃을 새로 갈거나, 디퓨저 향을 바꾸거나, 작은 화분을 새로 사거나 하면 그분들은 금세 발견하고 “향이 바뀌었네요?”라고 물어본다. 그런 걸 보면 이 공간 자체를 즐기시는 분들이 자주 찾아오는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손님은 당신이다. 오픈 초기에 정신없이 일하던 중에 어떤 남자분이 혼자 들어오길래 눈이 갔다.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기도 하고, 뭔가를 쓰기도 하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꽤 신기했다.
그때 남기고 간 쪽지가 가장 큰 이유다. 테이블을 치우다 트레이 밑에 깔린 영화 대사를 적은 종이를 찾았다. 그걸 보면서 내가 만든 이 공간과 손님이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서 그 종이도 아직 보관하고 있다.
*
나는 중간이 없다. 매사가 그렇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늘 새로운 것을 찾다 보니 새로움이 없는 사람은 재미가 없다. 재미없는 사람에게는 금세 흥미가 식어버려 인연이 이어지지 못한다. 반대로 재미만 있다면 그 인연은 꽤 오래가는데, 그렇다 보니 취향이 확실한 사람을 좋아한다. 취향은 위스키 같은 녀석이라 시간이 묻어나면서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내일을 기대하게 만든다. 새로움에 이끌리는 나는 취향이 짙게 묻은 누군가의 내일을 다시 찾아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