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배명순이 남편으로부터 학대를 당하는 부분에서 시작된다. 점점 심해지는 폭력을 견디다 못한 배명순은 결국 학대를 피해 가출을 결심한다. 그는 남편을 피해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제대로 된 신분 없이 살아가다 결국 암을 진단받고 사망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승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유령의 형태로 영안실을 배회하게 되기 때문이다. 배명순의 죽음 이후, 극은 영안실을 떠나지 못한 지 173일이 된 우점수와 123일이 된 황종배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세상에서 소외당한 무연고자들의 죽음을 조명한다.
너무 무겁지 않게, 너무 가볍지 않게
<유령>에서 눈에 띄는 점은 '무연고자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극중극 형식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편이 배명순을 폭행하는 장면이 끝나고 나면 분장사 역할을 맡은 인물이 무대 위로 올라와 배명순에게는 멍 분장을, 남편에게는 술을 마셔 허옇게 질린 얼굴을 분장해 준다. 그 순간 가정폭력은 말 그대로 연극 속 한 장면처럼 그려진다. 그들은 단지 학대당하는, 학대하는 역할을 받았을 뿐이다.
현실과 연극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대사와 장면들이 이어지다, 결국 박 사장 역할을 맡은 배우가 자기도 이런 심한 대사는 빼고 싶었다는 말을 내뱉으면서 무대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제 배우들은 ‘등장인물’이 아니라 ‘등장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로, 무대 위에는 ‘배명순의 삶’이 아니라 ‘연극 <유령>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풍자하고 역할과 배우, 연극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 나간다.
후반부 무대감독의 입을 빌려 연출이 전하는 말처럼, 배우들이 배역과 대사에 대해 싸우고 말다툼을 하는 장면들은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유발하며 가정폭력이나 무연고자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너무 무겁지만은 않게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한다. 나아가 인물과 배우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연극인지 혼란이 생기는 지점을 통해 이것이 단순히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임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보내는 애도
유령들에게는 각자 사연이 있다. 홀로 외롭게 살다 자신이 선택한 방식이 아닌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우점수, 태어나자마자 버려지고 소년원을 들락날락하다 사망하게 된 황종배, 남편의 폭력에서 도망쳐 꿋꿋하게 삶을 이어나갔지만 암에 걸려 사망하게 된 배명순까지. 그들은 죽어서 유령이 되었지만 사실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유령이었다. 세상의 눈에 그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배명순이 가출 이후 제대로 된 신분 없이 이름과 나이까지 바꿔가며 살아가던 것은 그의 삶이 생전에도 유령처럼 눈에 보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렇기에 유령들의 이야기는 슬프다. 그들이 불행한 삶을 살다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죽어서도 유령의 형태로 남아 안식을 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여전히 세상에서 소외된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체는 죽은 지 몇 달이 지나서도 여전히 영안실 속 차가운 냉동고 안에 남아있다. 그들의 장례는 한 사람의 마무리가 아니라 지자체의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골칫덩어리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일까, 연극은 그들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방법으로 화장을 선택한다.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안식을 연극이 대신 선사해주는 것과 같다. 100분가량 그들의 삶을 따라가던 관객들은 그들의 장례식에 참석해 드디어 찾아온 마지막에 박수를 보낸다.
세상에는 연출이 없기에
<유령>은 내내 세상은 무대, 인간은 배우와 같다는 말을 전한다. 역할과 배우는 분리되지 않고, 그렇기에 그들은 주어진 역할에 불만을 품기도 한다. 그들은 그런 대사나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부여받은 역할이 그럴 뿐이었지. 그래서 그들은 역할을 연기하다가도 갑자기 배우가 되어 무대 위에서 연출을 부른다. 연출이 괜찮다고 했던 대사나 장면을 직접 해보니 역시 별로였던 탓이다. 그러나 연출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의 열렬한 부름에도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무대감독에게 메시지로 말을 전달할 뿐이다.
극 중반에 이런 장면이 있다. 무대감독은 답답한 마음에 객석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객석 쪽에서 누군가 대답한다. 배우가 숨어있던 것이다. 그리곤 합을 맞춰보지도 않고 어떻게 연극을 같이 하냐는 배우들에게 말한다. 정해진 대사나 장면 없이, 무대 위에서 흘러가는 대로 행동하면 된다고. 연출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이 등장 이후 배우는 마치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처럼 인물들의 상황에 한마디씩 코멘트를 남긴다.
아무리 세상이 무대와 같다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출을 통해 바꿀 수 있는 연극과 달리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 세상에 모든 것을 총괄하는 '연출'은 존재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내 역할을 바꿔달라고 타협할 수도 없다. 대신, 사람들이 존재한다. 유령 이야기를 보고 듣고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들. 합을 맞춰보지 않고도 불쑥 무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사람들. 우리 모두가 객석에서 대답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유령> 속 유령들은 살아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사회에서 외면당한 채 살아가다 죽은 사람들. 그렇기에 그들은 유령이 되어 한발로는 땅을 딛고, 한발로는 신발에 달린 스케이트를 굴리며 땅을 유영하듯 떠다닌다. 삶과 죽음 사이에 갇혀 있는 것처럼, 혹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유령이었던 것처럼.
그러니 사람을 유령으로 만드는 것은 죽음이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 곁에도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유령과도 같은 사람들이 존재할 테니까. 그래서 생각해 본다. 어쩌면 우리가 할 일은 소리치는 관객이자 배우가 되어 그들의 삶이란 연극에 동참하는 것, 그들의 삶을 꾸준히 지켜보고 한마디씩 참견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