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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as ghosted." ghost는 영어로 '잠수타다'라는 은어다. 잠수이별이 최악의 이별이라고 했던가.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 나의 존재가 너무도 쉽게 지워진다. 이렇게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감정적 연결이 끊기는 것을 넘어, 사회적으로 존재가 거부당한 이들이 있다.

 

연극 <유령>은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동시에 이야기를 전달하는 '극'이라는 방식 자체에 대해서도 탐구한다.


극은 배명순 역을 맡은 이지하 배우의 대사, "저는 배씨였다가, 정씨였다가, 다시 배씨가 될 예정입니다"로 출발한다. 그녀가 맡은 역할, '배명순'은 그녀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집을 나와 '정순임'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간다. 정순임이었던 그녀는 다시 배명순으로 돌아오지만, 암에 걸려 이른 죽음을 맞이한다.

 

비극적인 내용이나, 풀어가는 방식이 무겁지 않다. 친숙한 가요나 뮤지컬 곡조를 삽입하기도 하고, 가정폭력의 장면은 춤을 추듯이 우스꽝스럽게 그려내 폭력성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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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당한 폭력의 정도를 알게 하는 것은 극의 분장사가 등장해 얼굴에 그리는 멍의 크기와 색깔이다. 분장사는 자신이 멍을 그리는 역할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며 배역과 창작자의 경계를 서서히 허문다. 분장사(로 분한 전유경 배우)를 시작으로, 배역은 하나둘씩 그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으로 돌변한다.

 

<유령>은 '극중극'이자 '메타극'이다. 배우들은 그 배역을 연기하는 자신이라는 배역을 맡는다. 특히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 역을 맡은 강신구 배우는 자신은 맨날 이런 역을 맡게 된다고 투덜거리며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배우들은 점점 언성을 높여 연출을 소환하고, 그때마다 나오는 건 '무대 감독(으로 분한 이승우 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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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요구사항이 계속 부딪히고, 극은 본격적으로 배우와 역할의 경계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알던 배우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네. 칠한 다음에 변하는 거죠. 전혀 다른 사람으로. 그리고 분장이 지워지면 원래대로 돌아오고. 원래 그 사람인데 그렇게 달라지는 거잖아요. 우리 인생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분장사 역을 맡은 전유경 배우의 대사다. 이렇게 각자의 철학을 나누는 토론을 오가며 <유령>의 표면적인 극은 어쨌든 계속 흘러간다.

 

배명순이자 정순임이었던 그녀는 무연고자였기에 장례가 제대로 치러지지 못하고 시신 안치실로 옮겨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처럼 화장되지 못한 채 있던 다른 두 구의 유령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은 '유령'이 되어 무대 위로 돌아와 자신의 삶을 관객에게 들려준다. 그리고 극의 마지막, 배우들은 이들을 위해 장례의식을 지낸다. 아직 들려줄 이야기가 있어 무대에 존재했던 배역을 승천시키기 위해 배우는 무당이 된다. 역할을 맡은 인물과 소통해 내 안으로 몰입시키고, 그 인물이 되어 판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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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은 연극을 보러 왔지만 하나의 의식에 참여하게 되며, 무대 위 가지런히 놓여 있는 직육면체들을 비석처럼 바라보게 된다. 함께 장례를 치렀기에 관객들은 이 이야기를 ‘안타까운 사람들‘로 스쳐가지 않고 마지막 명복을 빌어주게 된다. <유령>의 관객석은 작품의 특성 때문인지 무대와 가장 가까운 측면에도 관객석이 마련되어 있다. 나는 측면에서 그들이 움직이는 장면을 정말 가까이서 보며, 마치 공연 스태프가 된 것 같은 마음으로 극에 함께 임했다.


이전에 공연을 보며 상상한 적이 있다. 만약 앙상블이 주연 배우보다 훨씬 많은 보수를 받는다면, 배우들은 앙상블을 자처할까?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하고 싶어 할까? 돈의 액수가 아무리 크더라도 후자가 더 많지 않을까.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무대에 존재하기 위해서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사람은 최소한의 '인정 욕구‘가 채워져야 하는 존재다.

 

사람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여기서 온 걸지도 모른다. 배우들은 누군가의 못다 한 엔딩을 써 주기 위해 본연의 자신을 기꺼이 내려놓고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을 한다. <유령>은 배우라는 직업이 갖는 ‘경계성‘을 통해 경계에 머물러 있는 ‘유령들‘을 조명한다. 무연고자들, 행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 가정폭력에 계속 노출되는 이들. 국가로부터 ’ghost’ 당해버린 이들을 위해 연극이라는 의식을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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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소소리>로 2024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에 선정되고 최근 백상예술대상에서도 연극상을 수상한 고선웅 연출의 신작, 연극 <유령>은 오는 6월 22일 일요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된다.

 



함께 추천하는 작품


 

연극 <화이트 래빗 레드 래빗> - 배우가 공연 당일 무대에서 처음 대본을 열람하게 되는 극이라 화제가 되었다. <유령>에서 배우들이 정체성과 서사를 넘나들며 '지금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과 결을 같이 하는 극이다. 연극이라는 형식이 얼마나 즉흥적이고 일회성인지 보여준다. <유령>에서도 배우들이 이 작품을 은근히 언급하기도 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케이 넘버> - 해외 입양을 간 아이들에게 부여되는 번호인 ‘케이 넘버’(K-Number). 서류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회적 '유령'이 되어버린 이들의 실화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을 네 번째 찾은 미오카 밀러(한국명 김미옥)는 1974년 8살 때쯤 미국으로 입양되었지만, 그녀는 입양 후 불우한 시간을 보냈다. 양부모와 절교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자립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미국 시민권이 없다는 황당한 상황을 마주한다. 양부모가 입양 당시 서류 작업을 마치지 않았던 것이다. 미오카씨처럼 행정적으로 누락된 입양아들은 전 세계에 얼마나 많을까. 참고로 이러한 '비자발적 불법체류자들'은 미국에만 2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유령>이 무연고자들의 이야기를 무대 위로 불러냈다면, 영화 <케이 넘버>는 국제 입양인들이 겪는 법적, 사회적 소외를 카메라 앞에 세운다.


드라마 <조명 가게> - 한이 남아 떠나지 못하는 영혼들이 모여드는 공간, '조명 가게'. 이승과 저승 사이,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머무는 존재들이 빛을 기다리는 곳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삶의 의지를 주려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눈물을 자아내는 드라마이다. <무빙>의 원작자 강풀 작가만의 한국형 판타지를 체험할 수 있다.


도서 <배우라는 세계> - 강동원, 원빈, 한지민, 한효주, 김지훈, 이준혁, 홍경 등 수많은 유명 배우들을 코치한 신용욱 배우의 연기 지도 에세이이다. “이 책은 잘 정리된 연기 교재가 아니라, 연기를 하고 또 가르치며 겪은 시행착오들을 토대로 써 내려간 연기를 대하는 태도, 결국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라고 신용욱 배우는 책을 소개한다.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말이자 <유령>의 주제의식인, "온 세상은 무대, 남녀는 배우"라는 말이 살아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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