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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한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영화 <러브레터>의 감독 이와이 슌지의 작품 세계는 ‘화이트 이와이’와 ‘블랙 이와이’로 나뉜다. 전자가 <하나와 앨리스>, <러브레터>처럼 밝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지녔다면, 후자는 눅눅하고 어두운 정서를 짙게 품는다. 오늘 소개할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블랙 이와이’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며, 마치 누군가 보이고 싶지 않아 꼭꼭 숨겨둔 일기를 몰래 읽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영화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에테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래서 에테르가 뭔데?”라고 되묻곤 했고, 보지 않은 나조차도 그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물리 수업 시간이었다. 교수님이 빛의 파동에 대해 설명하던 중, 갑자기 에테르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에테르란, 한때 빛의 파동이 전파되기 위해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었던 상상의 매질이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된 개념이지만, 누군가는 오랜 시간 그것을 믿었다고 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영화는 어떻게 표현했기에, 사람들이 에테르에 대해 그토록 말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의문을 풀기 위해 영화관을 찾아갔다. 영화를 본 이후, 내 일상은 릴리 슈슈의 음악과 함께 흐르는 에테르 속에 잠식되었다. 모든 감각이 저항 없이 영화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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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스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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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릴리 슈슈라는 영화 속 가상의 가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 유이치, 호시노, 쿠노, 츠다 — 이 네 명의 인물은 릴리의 음악에 의지하거나 그를 통해 서로 얽혀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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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치는 평범한 중학생으로, 학교에서는 존재감이 적고 조용한 성격이다.

 

호시노는 그런 유이치의 절친으로, 밝고 똑똑하며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호시노도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아픔이 있었다. 유이치와 그의 친구들은 호시노의 아픈 과거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으며 우정을 쌓아 나간다. 여름방학 동안 친구들과 함께 오키나와 여행을 계획하지만, 돈이 부족했던 소년들은 결국 소매치기를 감행하게 된다. 그렇게 훔친 돈으로 떠난 오키나와 여행 중 두 번의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 사건은 모범생이던 호시노의 성격을 뒤바꿔 놓았으며, 호시노는 개학 이후 완전히 다른 인물로 변화한다. 한때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던 호시노가 현재는 악의 리더가 되어 군림하며 폭력을 일삼고, 친구였던 유이치조차 그 대상이 된다.

 

유이치의 짝사랑 대상인 쿠노는 조용하고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소녀로, 학교에서 질투의 대상이 된다. 결국 왕따가 되고, 여학생들의 요청을 받은 호시노는 그녀를 향해 집단 괴롭힘과 함께 성폭행까지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쿠노는 꺾이지 않고 드뷔시의 ‘아라베스크’를 연주하며 자기 세계를 지켜낸다. 그녀는 끝내 무너지지 않는 인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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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다는 호시노의 학교 폭력에 시달리며, 원조교제까지 강요받는다. 유이치는 그런 츠다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는다. 둘은 서로의 상처를 통해 조금씩 가까워지고, 유이치는 그녀에게 릴리 슈슈의 음악을 소개한다. 릴리의 음악에서 위로를 받던 츠다는 결국 릴리의 곡의 글라이더처럼 하늘을 날고 싶다며 투신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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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치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공간은 릴리 슈슈 팬들이 익명으로 교감하는 인터넷 게시판이었다. 그는 ‘필리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푸른 고양이’라는 닉네임의 유저와 깊은 공감을 나눈다. 그러나 릴리의 콘서트에서 푸른 고양이가 사실 자신을 가장 괴롭힌 호시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에테르가 가장 충만하다고 여겨졌던 콘서트장은 오히려 유이치에게 절망의 순간이 된다. 유이치는 호시노에게 칼을 휘두르고, 피 묻은 파란 사과를 들고 콘서트장을 벗어난다.

 

새 학기를 맞은 학교는 두 명의 학생이 죽었음에도 무관심하며, 오직 성적에만 관심을 둔다. 반면 그런 현실에서 쿠노는 꺾이지 않고 계속해서 피아노를 연주한다. 유이치는 그녀의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쿠노가 연주하는 드뷔시의 선율을 듣던 그 순간, 유이치의 삶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한 세상 속에서 유이치의 릴리도, 에테르도 결국 사라졌지만, 어떤 음악은 남았고, 어떤 사람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끝까지 무너지지 않은 쿠노를 보며, 이 영화에서 아주 작고 조심스러운 희망 같은 것을 느꼈다.


 

 

존재하지 않는 위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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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슈슈의 음악과 그녀가 말하는 에테르는 이들에게 도피처였고, 위안이었고, 때로는 현실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거울이었다. 드뷔시의 ‘아라베스크’와 같은 클래식 음악이 교차 편집으로 등장하며, 폭력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화면을 채운다. 이 상반된 조합은 오히려 잔혹함을 더 부각시킨다.

 

영화는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을 나누며 끝난다. 릴리의 콘서트에서 소년이 죽은 이후 릴리는 ‘불결한 여인’으로 불린다. 릴리는 어쩌면 우울과 죽음, 디지털과 가상의 상징이었고, 쿠노가 연주한 드뷔시는 현실과 희망의 상징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상의 세계에 부유하고, 그 세계가 현실인 듯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이 영화는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감독 이와이 슌지는 릴리 슈슈라는 가상의 인물을 실존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 실제로 웹사이트를 열었고, 릴리에 대한 이야기들이 퍼지게 했다. 사람들은 릴리를 진짜처럼 여기며 이야기를 나눴고, 그렇게 모인 데이터들로 감독은 먼저 소설을 쓴 뒤, 그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 모든 일이 2000년에 있었던 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던 시대, 그 대격동과 혼란 속에서 기술이 어떻게 인간의 세계를 바꾸는지를 실험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요즘 사람들이 AI에 대해 느끼는 막연한 기대와 공포처럼 당시엔 인터넷이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이다.


릴리 슈슈를 중심으로 얽힌 유이치와 호시노의 관계처럼 디지털 속에서 위로받고 연결되던 관계들이 현실에선 허무하게 붕괴되는 걸 보면서,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실제 인간성을 얼마나 반영하는지 묻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호시노도 입체적인 인물이었다. 현실에서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데, 인터넷 안에서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하고, 실제로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어쩌면 그 아이가 정말로 원했던 건, 그 가상의 공간 안에서의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이다.

 

그렇게 인터넷 속에서 따뜻했던 연결이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이 영화는 어쩌면 그렇게 되돌아갈 수 없는 시대의 방향을 가리키며, 우리에게 말없이 경고하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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