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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우리 집 거대한 책장 속, 낡디낡은 책 한 권이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엄마의 젊고 아름다웠던 20대의 시간을 함께했던 이 책의 이름은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 20대를 보내고 있는 나의 가방 속에, 그리고 내 마음속에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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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을 수식하는 몇몇 문장들이 있다. 불꽃처럼 살다 간 여성, 한국의 1세대 독일 유학생, 그 시절 유일했던 뮌헨 대학교의 동양 여자 유학생...


이 말들만으로도 그녀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는 대학은커녕 고등학교조차 수학하기 어려운 전후 세대였지만, 강한 학구열과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에 그녀는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전공과 맞지 않는 자신의 성향에 깊은 고민을 하던 그녀는 결국 가장 갈망하던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약 5년간의 유학을 마친 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시간 강사와 조교수로 시간을 보내며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던 삶과는 거리가 있는 시간을 보낸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던 1965년 1월, 그녀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계절, 겨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60~70년대, 방황하던 청춘들에게 필독서처럼 읽혔던, 엄마가 20대 시절, 밤을 새워 가며 읽었다던, 불꽃같이 강렬했지만 안타깝게 꺼져 버린 그녀의 삶과 생각이 담긴 이 책에 어쩐지 이끌렸고, 나의 첫 외국 생활을 함께할 책으로 이 책을 택하게 되었다.

 

독일 유학의 시작부터 딸의 출산과 성장까지. 마음 깊숙이 숨겨 두었던 일기장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그녀의 문장을 읽을 때면, 마치 나의 생각을 거울처럼 비춰 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엄마가 조용히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은, 그녀가 독일 땅을 처음 밟았던 날을 회상하는 장면이었다.

 

“… 내가 독일의 땅을 처음 밟은 것은 가을도 깊은 시월이었다. 하늘은 회색이었고 불투명하게 두꺼웠다. 공기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힐 물기에 가득 차 있었고 무겁고 칙칙했다. … 지금도 나는 뮌헨의 가을 하면 내가 처음 도착한 해의 가을이 생각나고, 그때의 심연 속을 헤매던 느낌과 모든 것이 회색이었던 인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 안개비와 유럽적 가스등과 함께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때의 나의 젊은 호기심인지도 모른다. 나의 다시없이 절실했던 고독인지도 모른다.”

 

이 장면을 떠올리며, 나도 처음 네덜란드에 도착했던 날을 다시금 기억해 보게 됐다. 모든 게 낯설고 두려웠지만, 동시에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렘과 호기심이 가득했던 시간이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여리고 어린 마음을 지닌 채, 아무도 모르는 도시에서 단단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전혜린이 말한 ‘절실한 고독’이라는 말은 그 모든 감정이 녹아 있는 단어였고, 내가 유럽에서 보낸 첫 계절과도 너무 닮아 있었다. 그때의 고독은 슬픔이 아니라, 오히려 내 삶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기에 더 깊고 선명하게 남아 있는 감정이었다.

 

전혜린의 문장에서 또 한 번 마음을 붙잡힌 구절은 딸과 엄마, 두 존재가 연결되는 순간을 이야기한 장면이었다.


“…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내가 지금 내 옆에 또 하나가 되어서 앉아 있다는 것을… 정화는 나였다. 그 순간에 나는 분명히 정화를 체험했다. 그리고 알았다. 내가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영원히 정화 속에서 사는 것이다. 정화 속에 있는 내 세포는 전부 다시 정화 아이 속에 살 것이고 그렇게 계속함으로써 내 육신은 지상에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다. …"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딸 속에 자신이 영원히 살아간다는 그 문장을 읽고 나서, 엄마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이렇지 않았을까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나와 엄마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토록 닮아 있는 모녀가 또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 때가 많다. 나의 모든 취향의 모태는 엄마였고, 엄마의 사랑과 자양분을 통해 지금의 나로 성장했다.

 

그래서였을까.


엄마가 사랑했던 책을 나도 비슷한 시기에 꺼내 들고, 그 책을 안고 낯선 땅에서 여러 계절을 보내 온 사실이 어쩐지 운명처럼 느껴졌다. 엄마가 건넨 한 권의 책은 수십 년 전 누군가의 기록이자, 지나간 시간을 담고 있는 과거의 책이었지만, 그 문장을 읽고 있는 나는 지금의 시간을 살아가며 또 다른 해석을 새롭게 덧입히고 있었다.

 

이 책을 통해 전혜린이라는 사람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 것도, 엄마와 나의 관계를 다시금 되새기게 된 것도, 그리고 낯선 도시에서의 나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된 것도, 모두 어디선가 한 지점으로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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