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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초등학교 4학년 생일날이었다.

   

새 학기에 생일을 늘 맞이했던 나에게 단골같이 찾아왔던 생일 선물은 다름 아닌 학용품이었다.

 

이제는 학교 앞 문구점의 학용품이 지겨워질 초등학교 4학년, 선물을 사러 가자는 부모님의 말씀에 난생처음 핫트랙스라는 대형 문구점에 방문했다. 당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핫트랙스의 유행이 막 시작되던 시기였는데, 동네 문구점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거라 짐작했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외국제 볼펜과 아기자기한 캐릭터 노트 및 필통 등으로 가득 찬 거대한 문구점을 보고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그때부터 문구점에 대한 나의 일방적인 사랑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사랑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 삶에 힐링을 주는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딘가에 여행을 가면 그 도시의 문구점을 꼭 가보는 작은 습관을 함께 지닌 채 말이다.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새 학기 전날 곱게 깎은 연필을 새 필통에 넣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내가 사랑했던 도시들의 문구점 몇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도심 속 숨은 보물찾기, 도쿄 이토야


 

도쿄 긴자에 위치한 이토야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굉장히 오래된 문구점이다. 오래되었다고 해서 건물 외관까지 낡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도쿄 내에서도 화려함으로 명성이 높은 긴자답게, 이토야는 12층 규모의 대형 빌딩 하나를 전부 차지하고 있다.


나에게 이토야의 첫인상은 “이게 문구점이라고?”였다.


12층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지만, 각 층마다 다른 테마로 구성되어 있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노트와 다이어리, 필기구는 물론이고, 카드, 디자인 소품, 미술 용품까지 취향에 따라 구경할 수 있다. 보통 일본의 문구점이라고 하면 다양한 브랜드들이 입점되어 있어 웬만하면 다른 문구점과 제품들이 겹치기 십상이지만, 이토야에서만 볼 수 있는 고급 필기구와 일본 특유의 감성이 담긴 종이 제품들은 이곳을 방문하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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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야의 11층에는 일반적인 문구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이 있다. 바로 Hydroponic Farm이라는 작은 수경재배 농장이다. 10층에서 11층으로 넘어가던 에스컬레이터에서 순간 문구점이 끝나고 다른 가게가 시작되는 줄 알았다. 포근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문구점과 상반되는, 차갑고 현대적인 농장이 이 층을 차지하고 있었다.


문구점에 농장이 웬 말인가 싶었지만, 이곳에서 재배된 유기농 채소들은 이토야의 카페에서 사용되며, 자연과 문구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하고 싶었던 이토야의 진심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빽빽한 빌딩 숲속 사이에 진짜 숲속 같은 농장이라니, 도심 속에서 초록 빛깔의 보물을 찾은 듯했다.

 

 

 

치앙마이의 감성을 한 장씩 넘기는 곳, Dibdee Binder


 

따뜻한 감성과 손길이 묻어 있는 공간, Dibdee Binder는 치앙마이에 위치한 작고 소박한 문구점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흔히 볼 수 있는 공장제 노트가 아닌, 손으로 직접 제본한 노트와 바인더, 그리고 정성이 깃든 작은 소품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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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치앙마이라는 도시가 가진 특유의 따뜻한 감성이 스며들어 있다.


가게 한쪽에는 섬세한 패턴의 세라믹 그릇과 컵들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고, 손으로 한 땀 한 땀 만든 팔찌와 작은 오브제들이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종이의 질감만큼이나 공간 자체도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문구점이라기보다는 여행의 한순간을 기록하는 필름 카메라의 프레임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이곳을 방문하고 나면, 단순한 노트 한 권이 아니라 치앙마이에서의 기억을 담아 갈 작은 조각 하나를 손에 쥐고 떠나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Dibdee Binder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여행지일지도 모른다.

 

 

 

창작자를 위한 실험실, 베를린의 Modulor


 

Modulor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가 제시한 비례 측정 체계를 일컫는 단어다.


이름에서부터 힌트를 얻을 수 있듯이, 베를린에 위치한 Modulor 문구점은 단순한 문구점이 아닌, 건축과 디자인을 위한 모든 재료를 파는 실험실 같은 공간이다.

 

건축 디자인을 전공한 나로서 이 문구점을 처음 방문했을 때, Modulor의 맞춤 제작 서비스 존을 보고 굉장히 놀랐다.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다양한 두께와 색상의 아크릴 및 목재부터, 레이저 가공, 3D 프린팅까지 모형을 만들기 위한 모든 재료 준비가 한곳에서 이루어지는 걸 보고, 한국으로 당장 이 시스템을 옮겨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전문가들을 위한 공간뿐만 아니라, 실용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디자인 소품과 문구들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공간으로 비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2층에는 디자이너 가구점도 입점되어 있어 Hay나 Montana와 같은 브랜드의 가구도 함께 구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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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점에서 가구를 판매한다니! 살면서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 이런 감도 높은 경험을 한 공간에서 이룰 수 있는 베를리너들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


처음 가보는 문구점을 방문할 때면, 문구점 앞에서 한없이 행복하고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떠오른다. 게다가 여행지에서 새로 산 노트에 글을 적으면 괜히 글이 더 잘 써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것이 내가 문구점을 좋아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각자의 인생 기록가로서, 여행을 떠날 때 그 도시의 문구점에서 나만의 기록 도구들을 장만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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