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3월, 명품 브랜드 매장에서 전시 ‘알렉스카츠: 반향’을 관람했다. 작품은 많지 않았지만, 하나하나가 인상적이었기에 아쉬움이 없었다. 다만, 매장 구경을 한 후 전시회를 관람했던 점이 아쉬웠다. 관람 후, 매장을 구경했다면 제품들이 예술작품으로 보이는 순간을 맛볼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그 아쉬움을 25년 5월에 달랠 수 있었다. 똑같은 상황이나 작품은 아니지만, 럭셔리 브랜드의 제품을 다른 시각으로 보고, 예술작품으로 향유하기에 충분했다.
‘아트 오브 럭셔리’는 국내 최초로 R.LUX와 서울미술관이 협업한 전시회다. 관람권 한 장으로 해당 전시를 비롯해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와 ‘사란란’ 전시도 관람할 수 있으며, 석파정까지 구경할 수 있다. 그렇다고 볼거리가 없거나 완성도가 낮아서 묶은 게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꼼꼼히 둘러보면 2시간가량 소요된다. 하나의 전시만으로 풍족한데, 세 개의 전시와 역사적인 명소까지 향유할 수 있으니 가성비 좋은 전시다. 강익중, 김환기, 이우환, 로버트 인디애나, 살바도르 달리, 앤디워홀, 쿠사마 야요이등 18인의 작품 28점이 전시되어 있다.
2층 서울미술관에 도착하면 직원이 관람 방법을 친절히 설명해 준다. 허투루 들으면 가성비 좋은 전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할 수 있다. 쉬운 설명이니 귀 기울여 들어보자. 2층에 마련된 전시는 서울미술관의 소장품전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였다. 이중섭, 천경자, 박수근 등 한국 미술사 거장들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학교 다닐 때 미술책에서 봤던 작품도 있었고, 신사임당의 재발견도 있었다. 이중섭 작가의 편지화는 작가를 예술가가 아니라, 평범한 아버지로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다른 예술가들도 누군가의 자식 혹은 부모인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인식했다.
쿠사마 야요이, Pumpkin, 2010s, FRP (Fiberglass reinforced plastic)
3층 ‘아트 오브 럭셔리’ 전시장에 들어서니 전시 소개와 로버트 인디애나의 love 작품이 보였다. 로버트 인디애나는 미국의 현대미술가이며 팝아트로 유명하다. 우리가 평소 사용하는 문자를 love, eat, hope 등과 같이 예술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그의 대표작인 love를 보면서 사랑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로버트 인디애나 작품의 매력은 일상의 소중함과 언어의 가치를 일깨워줬다.
다음으로 관람한 작품은 쿠사마 야요이의 pumpkin이었다. 직접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뒷짐을 진 채 마치 내가 카메라가 된 듯이 줌인, 줌아웃을 하며 살펴봤다. 평소 관람할 때도 그렇게 보지만, 이번에는 더 신중하게 줌인과 줌아웃을 했고 몇 번이나 반복했다. 멀리서 볼 때는 웅장함, 화려함, 입체적, 생명력이 느껴졌다. 가까이에서 볼 때는 정교함이 보였다. 호박 특유의 굴곡, 쨍한 노란 색감과 검정색의 무늬, 쿠사마 야요이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물방울무늬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 여배우의 입술을 본 딴 살바도르 달리의 소파가 있었다. 보자마자 앉고 싶은 욕구가 꿈틀댔다. 보들보들한 촉감과 푹신이 아닌 폭신-한 착석감이 느껴질 것 같았다. 매혹적인 선명한 빨간색도 인상적이었다. 혈색이 돌면서 도톰하고 선이 예쁜 입술이었겠다고 짐작했다.
앤디 워홀의 flowers는 네 송이의 꽃을 담은 작품이었다. 원색으로 배경을 채우고, 단순한 선으로 꽃을 표현했다. 첫인상은 직관적이고 단순함이었으나 다시 봤을 때는 화려함이 느껴졌다. 상반되는 색이 매끄러우면서 화려한 조화를 이루었으며, 이를 단순한 선이 뒷받침해줬다. 작품을 보면서 실제 꽃을 떠올려봤다. 대부분 모양새가 현란하지 않았다. 알록달록하거나 강렬한 색이 아니더라도 색감 자체가 화려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꽃이 많이 모일수록 화려함은 배가 된다. 이러한 꽃의 특성을 앤디 워홀이 알아보고 작품에 녹여낸 듯하다. 여기까지가 Material Luxury 섹션이었다. 테마에 맞게 작품들은 매우 화려하고, 관람객의 이목을 끄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한 번 더 보고, 자세히 보니 독특함, 정교함, 개성도 느껴졌다. 이 점이 매우 신기했다. 럭셔리=화려함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Spiritual Luxury 섹션은 전 섹션과 다르게 보이지 않는 럭셔리에 대해 다뤘다. 물질적인 의미에서 멈추지 않고 정신적, 내면적으로 파고든 흔적들이 작품 곳곳에서 보였다. 이 섹션의 작품들은 색감부터 달랐다. 원색보다는 옅은 색감을 사용했고, 질감이나 기법도 단순했다. 절제되었다는 특성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특성과 어울리지 않게 작품들이 화려해 보였다. 조용한 사람이 한마디를 던지면 시선이 집중되는 것처럼, 절제로 인해 오히려 시선이 가고 아우라가 느껴졌다. 전시 소개 글에 묵상의 시간을 제공한다는 문구가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묵상하게 되는 힘을 가진 작품들이었다.
브랜드 존인 Inspiring Luxury 공간은 알럭스 소개, 브랜드 제품의 특징, 역사, 시그니처 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알럭스는 럭셔리 뷰티 버티컬 서비스다. 럭셔리 브랜드 제품을 집에서 빠르게 배송받을 수 있다. 알럭스는 전시장 내에 브랜드 존을 만들었으며, 주기적으로 브랜드를 교체하여 여러 브랜드를 소개하고 있다. 관람객이 쉽고 깊이 몰입할 수 있도록 영상 콘텐츠, 음악, 향기로 공감각적 연출을 했다. 여기서 23년 3월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영상에 등장하는 브랜드 제품들을 보면서 컨셉, 분위기, 모델 등 하나같이 예술이었다. 관람 당시 브랜드는 SISLEY였는데, 이 브랜드에 대해 잘 모르던 나에게 더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원래 나는 럭셔리 브랜드는 물론, 중저가 브랜드에 대해 잘 모르는 유형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브랜드에 관한 고정관념에 균열이 생겨서 자연스레 관심이 가고 아는 게 하나, 둘 생기고 있다. 그만큼 더욱 Inspiring Luxury의 전시장은 배우고, 알아가는 곳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향이 정해진 구역에서만 나오고 계속 발향되지 않아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직원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아예 모르고 지나칠 뻔할 정도였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머무는 내내 그 장소만의 향이 느껴졌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관람했던 탓인지 기대만큼이 아니어서 몹시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Timeless Luxury에서는 한국 전통의 럭셔리를 향유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서양의 럭셔리였다면, 이 섹션에서는 동양 럭셔리의 매력과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앞에서 워낙 화려한 럭셔리를 경험했기에 동양의 장점이 단점으로 되어 밋밋하게 느껴질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서양의 럭셔리를 뛰어넘은 화려함으로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 특히 중앙에 전시된 조선백자 달항아리와 뒤에 걸린 작품이 함께 보이는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순식간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액자에서 달항아리가 튀어나온 것 같아 판타지적인 느낌도 들었다. 달항아리 위로 떨어지는 조명에 더욱 빛나는 표면과 자태를 보고 있으니, 천사의 소리와 국악이 들리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아우라와 화려함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반들반들한 표면, 맑은 색감, 부드럽지만 힘 있는 선에 감탄했다. ‘수려하다’라는 표현이 저절로 떠올랐다.
유독 눈에 띈 달항아리가 있었다. 다른 항아리와 다르게 붉은색이 그림처럼 칠해져 있었다. 사실 관람 전 정보를 찾아본 터라 붉은 무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의도한 무늬가 아니라 굽는 과정에서 저절로 생겼다고 한다. 우연이 창조를 만든 결과였다. 다른 하나는 실금이 있었는데, 그 자체로도 예술작품이었다. 최고의 럭셔리는 이런 연륜이 아닐까. 오롯이 담긴 세월과 지나온 경험의 흔적은 값어치를 매길 수 없다. 그렇기에 더욱 귀하고 창조적이며, 가치 있다.
달항아리 뒤편, 벽면에 걸린 작품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달항아리가 다르게 보였다. 정면에서는 배경과 달항아리가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고, 측면에서는 달항아리만 돋보였다. 줌인과 줌아웃만 하며 관람하는 내게 지인이 귀띔해주지 않았다면, 그 귀한 포인트를 놓쳤을 테다.
정면과 측면 다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측면에서 볼 때가 더 좋았다. 정면에서 옆으로 걸음을 옮겨 바라보면 배경이 스르르 사라지면서 달항아리가 뚜렷해졌다. 그 모습이 카메라로 피사체에 포커스를 맞춰 찍을 때 같았다. 혹은 사랑에 빠지면 주변이 흐릿해지고 그 사람만 보이던 순간 같았다.
‘아트 오브 럭셔리’는 테마를 나누어 구성한 이유가 무엇일까. 왜 하필 주제가 럭셔리일까. 궁금했다.
럭셔리는 ‘풍요’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시작했지만, ‘사치’라는 의미로 변하면서 현재는 ‘명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럭셔리의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걸 나타낸다. 나조차도 럭셔리하면 명품이 떠오르곤 한다. 브랜드에 관해 생각이 바뀌었지만 명품은 아직 좀 어렵다. 그러나 ‘아트 오브 럭셔리’를 관람 후 인식이 바뀌었다. 명품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내면에서의 풍요 또는 영감, 독창적, 예술작품으로써 보게 된다. 인식의 변화로 럭셔리와 좀 가까워졌다.
비로소 궁금증이 해소됐다. 관람자가 럭셔리의 의미를 다각도에서 인식할 수 있도록 테마를 나누어 구성한 거다. 그리고 기존 럭셔리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본질과 진정한 가치에 대해 생각하고, 대중의 인식이 변화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럭셔리’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테다.
‘럭셔리’를 좋아하는 사람, 편견이 있는 사람, 다른 시각에서 보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는 전시다. 이 중 해당하는 게 없더라도 생각이나 시야의 확장 혹은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아트 오브 럭셔리’를 꼭 보길 바란다.
필자의 팁을 곁들인 tmi
‘아트 오브 럭셔리’ 전시 관람을 마친 후, 4층에 올라갔다. 동선을 따라가니 건물 밖이었다. 눈앞에 서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문을 열고 나가면 다른 세상이 펼쳐지던 것과 비슷했다. 순간 이동을 해서 여행지로 떠난 기분과 서울미술관의 비밀공간에 들어온 느낌도 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곳은 석파정이었다.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별서였으며, 왕이 사랑한 곳이라고 한다.
석파정이라고 해서 정자 하나만 있을 줄 알았는데, 하나의 마을이 펼쳐졌다. 보호수로 지정된 소나무, 사랑채와 별채, 천세송, 정자, 언덕 위에 있는 거북이바위까지 보였다. (한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너럭바위도 석파정에 포함된다.) 알고 보니 정자를 포함한 일대를 석파정이라고 한다. 사랑채와 별채를 둘러본 후, 거북이바위 앞에 섰다. 마치 사람이 깎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 바위는 거북이와 닮았다고 해서 거북이바위라고 한다. 사실 내 눈에는 거북이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그림 같은 바위 표면이 인상적이었다.
정자의 모습은 익숙한 조선의 정자와는 달랐다. 바닥은 화강암, 지붕과 기둥은 청나라풍이었다. 돌다리를 건너는 순간부터 정자에 들어가 주변을 둘러보던 순간까지 힐링이었다. 정자 뒤에는 물줄기가 흐르고, 앞에는 단풍나무가 보였다. 그 풍경을 보면서 가을에 한 번 와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흥선대원군이 이곳에서 예술활동을 펼쳤다고 하는데, 왜인지 알 듯했다. ‘석파정’의 또 다른 이름은 ‘유수성중관풍루’라고 한다.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단풍을 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참, 찰떡이다.
좀 더 올라가니 너럭바위가 있었다. 코끼리 모양을 닮아서 코끼리바위라고도 하는데, 이번에는 내 눈에도 코끼리가 보여서 신기했다. 무엇보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폭포는 없지만, 바위폭포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였다.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손을 대고 소원도 빌었다.
석파정 옆에는 서울미술관 별관이 있었다. 그곳에서 진행 중인 카와시마 코토리 개인전 ‘사란란’ 전시도 함께 관람할 수 있다. 시간이 없다면, 석파정은 꼭 봤으면 좋겠다. ‘아트 오브 럭셔리’를 보고 석파정을 구경하면, 연결성이 생겨 럭셔리의 피날레를 완벽하게 장식할 수 있다.